2017년 1월 24일 작성글
<라라랜드>를 볼 때마다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고 싶다는 단순한 희망을 넘어, 영화를 본 직후의 감상과 얻었던 영감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마저 들었다. 그런 다짐만 몇 번을 했던가. 영화는 한번 더 볼수록 더욱 빠져들었고 너무너무 좋아하는 영화가 되어버린 후에는 이 영화가 주인공이 되는 글은 반드시 잘 써야한다는 부푼 욕심에 글을 쓰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지나쳐버렸던 것이 세 번째, 그리고 이제 드디어 <라라랜드>를 기억하는 방법으로 내 말로서, 내 글로서 표현할 수 있는 오늘이 왔다.
라라랜드를 지난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영화관'에서만 4번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자랑일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중 한 번은 영화를 보다가 잠들어버렸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다. 처음 이 영화를 보러 갔을 때는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적어도 내 주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극찬했다. 특히 나와 생각이 자주 통하는 혹은 선호가 비슷한 부류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고 아주 초반의 내 인상은 '당황'이었다고 기억한다. 굉장히 갑작스럽고도 예상치못했던 첫인상. 처음엔 '뭐지. 이게 아닌데..' 기대를 너무 했나, 잘못 들어왔나 싶었다. 엠마 스톤도 라이언 고슬링도 보이지 않고 엄청난 인파가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노래를 부르며 열심히 춤을 추니 나는 벙쪄버렸다. 떼창, Another Day of Sun. 현란한 안무와 신나는 멜로디에 첫 장면부터 눈길을 빼앗기고 흥이 넘쳤지만 그 흥이 너무나도 거대해 압도당하고 보니 당황스러웠던 것 같다. 영화를 여러 번 본 지금, 나는 이 인트로를 가장 사랑한다.
첫 관람 3일 후 <라라랜드>를 다시 예매하고 영화관에 갔다. 이제 어떤 내용인지 알고 스토리 흐름을 모두 예상할 수 있으니 마음이 더욱 편했다. 완전히 매료되어 버린 두번째 관람 이후 OST를 구입했다. 세 번째 관람 이후에는 컬러링을 바꿨다. 차츰 내 일상 곳곳에 파고들어 여운을 남기는 <라라랜드>의 여파가 대단했다. 그리고 지난 네번째 관람, 현재로서는 마지막 관람,에 안타깝게도 졸아버렸다. 왜 졸았을까. 이미 대부분의 전개를 기억하는 익숙함이 이야기를 지루하게 만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재관람부터는 장면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자막을 보지 않고 대사를 들었고 원어로 듣는 대사의 감동이 더했다. 그렇지만 퇴근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심야영화를 간 것은 귀의 피로도를 폭발시켰다. 마치 토익 리스닝 시험을 보듯 고도의 집중력으로 귀를 쫑긋세워보았지만 그럴수록 귀는 문을 닫아버리더니 눈까지 감게 만들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이야기를 해보면 라라랜드 공식홈페이지가 스스로 영화를 소개하는 문구는 다음과 같다.
"Set in modern day Los Angeles, this original musical about everyday life explores the joy and pain of pursuing your dreams."
꿈을 쫓고 다가가는 기쁨과 어려움에 대한 우리들 삶의 이야기. 꿈(Dream)은 앞으로도 계속 언급하겠지만 이 영화를 이끌어 나가는 매우 중요한 동력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은 자신들의 꿈을 쫓는 사람으로 세바스찬과 미아다. 세바스찬은 재즈피아니스트로서 정통 재즈클럽 사장을 꿈꾸며 미아는 연기지망생으로 성공한 여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둘은 연인사이로서 서로의 꿈을 지지하고 응원하고 존중해주며 서로가 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사랑을 나누지만 끝내는 이별을 하게 된다.
영화제목인 라라랜드(LA LA LAND)는 꿈의 나라, 비현실적인 세계라는 뜻을 가진 실제 영어단어다. 특히, 영화·TV 산업과 연관지어 Los Angeles, Hollywood, Southern California 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된 LA(Los Angeles)를 빗대었고 영화 속 꿈을 꾸는 사람들을 위한 별들의 도시이기도 하다. 또한 라라랜드는 "이 영화는 마법이다"라는 슬로건을 영화홍보 전면에 걸었다. 마법, 꿈, 별, 비현실적, 이러한 단어들이 보여주듯 영화는 꿈을 꾸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들의 꿈에 관객은 마법처럼 빨려들어가 주인공들이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도전하고 좌절하고 성공하고 이별하는 과정에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게 한다.
촬영기법에서도 이 영화는 환상적인 장면들이 곳곳에서 연출된다. 앞서 언급했던 고속도로가 뮤지컬의 무대가 되는 첫번째 넘버 'Another Day of Sun'은 원테이크로 연출하여 장관을 보여준다. 실제로는 세번에 나누어 촬영되었다고 하지만 이 역시도 사실 놀라운 결과로 가히 "Fantastic"이라 할 수 있다. 실제 당시 촬영상황을 보여주는 메이킹필름을 보면 이 한 장면을 찍기 위해 출연진과 스태프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고 노력했는지 피부로 전해진다. 'Someone in the Crowd' 넘버는 원테이크로 카메라를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다시 내려인물들을 비추는 과정과 영상 속 표지판, 파티, 샴페인, 풀 등이 병렬적으로 팝업되는 장면들의 배경, 소재가 몽환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가장 압권은 라라랜드 메인포스터 사진과 같이 LA의 신비로운 보라색 일몰장면이다. 'A Lovely Night'과 'City of Stars(Pier)' 넘버를 촬영한 장면에는 보랏빛으로 물든 신비로운 하늘이 포착되었다. 맑은 날의 일몰 중 한정된 시간대에만 볼 수 있다는 이 광경을 영화에 담기 위해 부단히 신경썼다고 하는데 덕분에 영화는 더욱 신비롭고 환상적으로 표현된다. 그 밖에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날아가 은하수에서 춤을 추는 장면, 세바스찬과 미아에게만 주목되는 핀조명, 환상 속의 과거회상씬에서 보여지는 여러 예술적인 연출부분 등이 모두 인상 깊다.
고전형식인 과거의 오리지널 뮤지컬을 그대로 차용해 가장 모던하고 멋지게 현대판 오리지널 뮤지컬 작품으로 제작해낸 연출과 감독의 재주에 진심으로 경의와 감탄을 표하고 싶다. <라라랜드> 감독인 다미엔 차젤레 감독은 <위플래쉬>로 헐리우드에 성공적으로 데뷔한 비교적 신인 감독이다. <위플래쉬>이후 차기작인 <라라랜드>가 올해 골든글러브 7개부문을 휩쓸며 불과 두번째 작품만에 그는 감독상까지 수상했다. 그의 천재적인 연출능력과 창의적인 영감들을 보면 다시한번 존경을 표한다. 그런 그가 공통적으로 프로듀스한 영화에서 보이는 굵은 줄기 중 하나는 꿈과 사랑의 Trade-off적인 관계이다. 그는 <위플래쉬>에서 꿈과 사랑 중 단 하나만 택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전제했는데 그의 세계관에서 꿈과 사랑은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라라랜드>에서도 마찬가지로 세바스찬과 미아는 서로의 꿈과 사랑 중 하나를 택하게 되고 그 결과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사랑은 포기하도록, 혹은 이뤄지지 않도록 설정된다.
<라라랜드>의 러브스토리로 들어가보면 영화는 WINTER-SPRING-SUMMER-FALL-WINTER 라는 계절이 바뀌는 시간적 순서로 전개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바스찬과 미아는 점점 사랑이 깊어지고 SUMMER 파트의 경우에는 둘의 사랑이야기로 거의 모든 스토리가 채워져있다. 뮤지컬영화인만큼 남녀주인공은 서로 같이 춤을 추고 노래로 부르며 호흡을 같이 한다. 보고만 있어도 보는 사람이 기분 좋아지는 너무나 행복해보이고 아름다운 커플이다.
그러나 둘의 관계가 처음부터 애틋하고 서로의 꿈을 지지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바스찬은 영화 초반에서 여자를 소개시켜준다는 누나의 제안에 가장 먼저 한 말이 "Does she like jazz?"였다. 자신과 연애하기 위해서는 재즈를 좋아하는 여자여야 한다는 것이 최우선 조건인 듯 보인다. 그렇지만 미아는 재즈에 무지한 사람이자 심지어 "I hate jazz."라고 말하는 여자다. 세바스찬은 그녀를 The Lighthouse Cafe에 데려가 재즈공연을 보여주고 재즈에 대한 자신의 주관과 애정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재즈는 끊임없는 Conflict과 Compromise의 반복이며 매일 밤마다 새로이 연주되는 이 흥분되는 장르를 알아달라고 설파하기도 한다. 미아는 이후 재즈를 좋아하게 되고 세바스찬의 꿈을 응원해주며 SEB'S라는 깜찍한 로고까지 만들어서 건네주는 애정을 보인다.
연기자를 꿈꿨던 미아는 세바스찬의 독려를 통해 오디션에 목매지 않고 주어진 대사만을 연기하는 연기자를 넘어서 배우와 동시에 Storyteller, Screenwriter를 꿈꾸게 된다. 자신이 직접 구상한 일인극 'So Long Boulder City'를 극장에서 선보이는 미아의 도전까지 세바스찬의 격려와 응원은 절대적이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미아의 염려에 너의 대단한 연극을 보는 사람들은 정말 럭키한 사람들이라고 말해주고 타인의 시선에 "Fuck'em"과 "피쉬카카(똥오줌이라는 뜻으로 보이는 비속어)"라는 단어를 시원하게 날려준다. 기억에 남는 그의 대사 중 하나는 미아가 파리에서 슈팅에 들어가는 그녀의 마지막 오디션을 보고 난 아마 떨어질 것이라며 기대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세바스찬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면서 세바스찬은 너는 그 기회를 잡으면('When' you get this) 모든 걸 다 바쳐야 한다고 말하고 미아도 내가 그 기회를 잡으면('If' I get this) 이라고 말하는데 세바스찬의 When과 미아의 If는 믿음과 확신의 정도가 다르다. 세바스찬은 그녀가 성공할 것이라고 누구보다 믿고 지지해주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응원하고 믿어주는 둘은 왜 결국 헤어졌을까? 라라랜드의 결말을 보면 안타깝고 아련해서 해피엔딩이 아닌 둘의 이별에 만족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 역시도 둘의 돌이킬 수 없는 이별에 슬퍼하고 헤어지지 않았더라면의 불가능한 가정에서 출발하는 세바스찬과 미아의 마지막 비디오 장면들에 마음이 쓰려졌다. 여기서 둘의 사랑과 연애의 모습에 아쉬운 점을 찾을 수 있는데 둘은 각자에게 꿈이 독립적으로 존재했지만 서로가 꿈을 '공유'하지는 않았다. 보통 사랑하는 연인관계가 되면 자연스레 서로가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보게 되고 미래의 서로의 모습과 상호작용, 역할들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 속 세바스찬은 재즈카페 사장이, 미아는 여배우가 되고 싶었던 미래에서 서로간의 역할은 없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미아가 스토리텔러나 각본가였다면 언젠가는 재즈 이야기를 넣어서 연극을 만들어보겠다는, 혹은 세바스찬과 같이 연극을 한 편 만들어보자는 미래를 상상해볼 수 있다. 세바스찬은 재즈카페를 운영하면서 미아에게 촬영이 없을 때는 같이 가게를 돌보자고 말했을 수도 있다. 상상의 여지는 많다. 하지만 둘이 함께할 미래의 가능성은 철저히 배제된 채 각자의 꿈에만 다가서다가 서로를 잃게 되었다. 대낮의 그리니치 공원에서 "Where are we?"라고 말하는 미아에게 "We just can wait and see."라고 대답하는 세바스찬의 대화는 각자의 꿈만큼 사랑을 열렬하게 지켜내려고 노력하지 않는 점에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는 모두가 꿈이 있고 계속 꿈을 향해 전진하길 원한다. 나 역시도 작가라는 꿈을 꾸는데 우리들의 꿈을 향한 발걸음에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것이고 앞으로는 서로가 함께 꾸고 만들어갈 수 있는 꿈이 더욱 중요하고 소중해질 것이다. 각자의 꿈에 서로의 공간을, 역할을 마련해주는 것, 그래서 미래를 함께해야하는 일말의 여지를 두고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 세바스찬과 미아도 그랬다면 계속 사랑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