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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욱 Jul 19. 2023

서오릉∙西五陵 / 여름∙夏

SEOOREUNG / SUMMER

2023.07.16 일요일


코로나를 기점으로 일상을 일상으로 유지하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타인에 대한 어느 정도의 혐오와 이기가 나를 지키기 위한 당연한 방어수단처럼 자리 잡고, 후세로부터 잠깐 빌려 쓰는 자연을 당장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돈벌이 수단으로만 바라보고 미친 듯이 파헤친다. 결국 그렇게 파헤친 자연의 조각들은 날카로운 화살촉이 되어 나와 나의 후손에게 다시 날아온다. 


잘못된 유혹에 순간 휩쓸리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만으로도 너무 많은 에너지와 감정이 소모되는 시대를 걷고 있다. 계절은 돌고 돌아 시린 겨울이 지나고 결국 우리 모두에게 봄이 온다고 믿었던 내 책의 마지막 문장이 조금 위태롭게 느껴지는 순간 휘둘리는 마음을 다잡고 싶어 서오릉을 찾았다. 녹음이 한껏 짙어진 숲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고요했다. 


명릉 정자각 일원의 여름 풍광
명릉의 봉분


순창원 주변을 둘러싼 소나무 숲
소나무와 함께 바라본 순창원의 정자각


순창원 주변의 소나무 숲은 조금 달라졌다. 홍살문은 보수 중인지 모습이 보이질 않았고 홍살문 주변의 소나무는 보기 흉한 - 하지만 꼭 필요한 - 지지대나 나무들 간에 서로 잡아주는 로프들이 생겼다. 우리 주변의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은 영원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얼마 전 목재 문화재에겐 최악의 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외래종 흰개미가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천만다행으로 확산되기 이전에 박멸될 수 있었지만 만약 이미 확산했었다면 대부분 목조로 이루어진 우리 문화재의 관리 난이도나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숲 사이로 보이는 경릉 정자각
정면에서 바라본 경릉 정자각 일원의 풍광
소나무와 함께 바라본 경릉 정자각


작년 여름, 텀블벅 펀딩을 통해 지난 8년간의 작업을 사진집으로 출간한 이후, 앞으로의 내 작업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앞으로 10년을 더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기록할 수 있을까. 나의 체력과 정신력은 너무나도 유한하기만 한데. 멀리 있는 대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이제 조금씩 옅어지고 곁에 있는 순간의 여전함이 더없이 아름답고 소중하다. 한참을 혼자 고민한 결과 앞으로 10년을 더 해보기로 결심했다. (이게 그렇게 고민까지 할 일인가 싶지만) 물론 흘러가는 시간이 켜켜이 쌓이면서 더 아름다워지는 곳도 있고 아름다움이 사라져 실망하는 날도 있겠지만, 변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 두면 내 실력에 작품은 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기록으로서의 가치는 남을 것이라 생각한다. 


경릉과 순창원 사이의 숲길
순창원과 익릉 사이의 소나무 숲
비 온 뒤 싱그러운 청단풍


밝음은 밝게, 어둠은 어둡게. 보이는 것은 그리고 안 보이는 것은 그리지 않는 게 참 당연한데 지금까지 내가 찍어온 사진들을 돌이켜보면 나는 그렇게 찍지 않았던 것 같다. 빛과 어둠을 과장하고 더 예쁘게 보여주고 싶은 욕심을 줄이면 조금 더 나은 사진이, 아니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AI가 알아서 단어 몇 개로 공허한 이미지를 뚝딱 만들어 주는 시대에 의도를 담아 조금 덜 찍을 수 있다는 건 작가의 훌륭한 무기이자 일종의 특권이다. 그래서 요즘은 선예도를 강조하는 현행 렌즈들보다 70~80년대에 만들어진 미놀타, 캐논 수동 렌즈들을 작업에 더 많이 활용하고 있다. 모든 것이 너무 선명하기만 한 사진은 금방 질리기 마련이다.

 

익릉 정자각 일원의 풍광
수경원 일원의 풍광


이날 아쉽게도 시간이 부족해 홍릉과 창릉까진 둘러보진 못했으나 오랜만에 금천에 물이 흐르는 서오릉을 홀로 산책하면서 마음 살림을 정돈할 수 있었다. 이렇게 또 한 번의 여름을 건넌다.

 


 종묘, 창덕궁, 서오릉 8년의 기록

 < 차경 : 빌려온 풍경 > 사진집 구매 : http://bitly.ws/LP2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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