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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욱 Aug 29. 2023

다시, 창덕궁

23년 8월 늦은 여름의 기록

23.08.15


오랜만에 창덕궁을 찾았다. 삶이 바쁘고 정신없다는 핑계로 계속 미루고 미루다가 5개월 만에 만나는 창덕궁은 어찌나 반갑던지. 그간 가장 마음이 쓰였던 건 금천교 옆 느티나무 고목이었다. 세월의 모진 풍파에 비록 모습이 조금 달라졌지만 그래도 지금 있는 그대로 충분히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정녕 아름답지 않으면 기록할 가치가 없는 것인가' 잠시나마 이 작업을 계속 이어나가야 할지 고민했던 나를 반성한다. 결국 당신이 변해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기록해야 비로소 나도 완성될 수 있다.



창덕궁은 내게 참 고마운 공간이다. 인생의 중요한 30대 시절을 여기저기 한눈팔지 않고 한 가지 주제에 열정을 갖고 몰입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즐거움을 알게 해 줬고 그 시간들이 앞으로의 10년을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이날 창덕궁을 둘러보면서 아마도 나는 이 공간을 내 평생의 작업 대상으로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직감했다.


궁의 곳곳에는 여전히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구도가 숨겨져 있다. 새로운 시선을 발견하면서 경험이 쌓여 미천한 실력이 늘면 기존의 시선을 보완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결국 그렇게 나도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같은 공간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니 그저 즐겁다. 사계절 수시로 성정각 희우루의 풍경을 많이도 찍었는데, 이날은 관물헌 뒤편으로 돌아가 희우루 주변을 바라봤다. '관물(觀物)'은 만물을 보고 그 이치를 깊이 연구한다는 뜻이다. 관물헌의 현판에는 '집희(緝熙)'라고 적혀있는데 '계속해서 밝게 빛난다'는 의미다.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문구처럼 느껴져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마음에 간직했다.


관물헌 뒤편에서 문을 통해 바라본 희우루 주변의 풍경
관물헌 내부의 풍경



창덕궁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청단풍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후원 입구를 조금 올라가 꺾어진 길모퉁이를 돌면 순식간에 하늘을 가득 채운 녹음이 펼쳐지는데 그 순간이 청량하기 그지없다. 예전에는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 주합루를 한 프레임 안에 담는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이제는 좀 더 넓게 영화당까지 같이 담아봐도 좋을 것 같다. 너무 억지스럽지 않게 세 공간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고민해 봐야겠다. 영화당 전각 내부를 통해 부용지 방향을 바라본 사진이 이날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장이었다. 기둥들이 작은 프레임을 만들어 그 사이로 큰 풍경을 조금씩 나눠서 보는 눈 맛이 좋았다.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
후원 진입로의 푸르름


부용지 일원, 정면의 주합루와 오른쪽의 영화당
영화당 옆 느티나무 아래에서 바라본 부용정 일원의 풍경


영화당 전각 내부를 통해 바라본 부용지 주변의 풍경
영화당 전경


인스타그램에서 창덕궁을 검색하면 한복인지 아닌지 모를 국적불명의 옷을 입고 찍은 사진들과 인위적인 빛이 가득한 풍경뿐인데 지금까지 내가 봐온 창덕궁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인터넷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의 한계라고 생각된다. 오랜 시간 창덕궁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보니 여름날 큰 비가 내린 후, 아직 흐린 구름이 남아있을 때 창덕궁이 가장 계절답고 아름다웠다. 금천에는 물이 흐르고 후원의 나뭇잎은 건드리기만 해도 녹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이 싱그럽고 주변의 공기는 촉촉하다. 그저 궁궐과 후원의 길을 따라 걷기만 해도 마음이 초록으로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다.  



> 8년간의 기록, 열다섯 번의 풍경 [차경 : 빌려온 풍경] - 1권 종묘 창덕궁 사진집 구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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