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8월 늦은 여름의 기록
23.08.15
오랜만에 창덕궁을 찾았다. 삶이 바쁘고 정신없다는 핑계로 계속 미루고 미루다가 5개월 만에 만나는 창덕궁은 어찌나 반갑던지. 그간 가장 마음이 쓰였던 건 금천교 옆 느티나무 고목이었다. 세월의 모진 풍파에 비록 모습이 조금 달라졌지만 그래도 지금 있는 그대로 충분히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정녕 아름답지 않으면 기록할 가치가 없는 것인가' 잠시나마 이 작업을 계속 이어나가야 할지 고민했던 나를 반성한다. 결국 당신이 변해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기록해야 비로소 나도 완성될 수 있다.
창덕궁은 내게 참 고마운 공간이다. 인생의 중요한 30대 시절을 여기저기 한눈팔지 않고 한 가지 주제에 열정을 갖고 몰입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즐거움을 알게 해 줬고 그 시간들이 앞으로의 10년을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이날 창덕궁을 둘러보면서 아마도 나는 이 공간을 내 평생의 작업 대상으로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직감했다.
궁의 곳곳에는 여전히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구도가 숨겨져 있다. 새로운 시선을 발견하면서 경험이 쌓여 미천한 실력이 늘면 기존의 시선을 보완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결국 그렇게 나도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같은 공간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니 그저 즐겁다. 사계절 수시로 성정각 희우루의 풍경을 많이도 찍었는데, 이날은 관물헌 뒤편으로 돌아가 희우루 주변을 바라봤다. '관물(觀物)'은 만물을 보고 그 이치를 깊이 연구한다는 뜻이다. 관물헌의 현판에는 '집희(緝熙)'라고 적혀있는데 '계속해서 밝게 빛난다'는 의미다.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문구처럼 느껴져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마음에 간직했다.
창덕궁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청단풍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후원 입구를 조금 올라가 꺾어진 길모퉁이를 돌면 순식간에 하늘을 가득 채운 녹음이 펼쳐지는데 그 순간이 청량하기 그지없다. 예전에는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 주합루를 한 프레임 안에 담는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이제는 좀 더 넓게 영화당까지 같이 담아봐도 좋을 것 같다. 너무 억지스럽지 않게 세 공간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고민해 봐야겠다. 영화당 전각 내부를 통해 부용지 방향을 바라본 사진이 이날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장이었다. 기둥들이 작은 프레임을 만들어 그 사이로 큰 풍경을 조금씩 나눠서 보는 눈 맛이 좋았다.
인스타그램에서 창덕궁을 검색하면 한복인지 아닌지 모를 국적불명의 옷을 입고 찍은 사진들과 인위적인 빛이 가득한 풍경뿐인데 지금까지 내가 봐온 창덕궁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인터넷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의 한계라고 생각된다. 오랜 시간 창덕궁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보니 여름날 큰 비가 내린 후, 아직 흐린 구름이 남아있을 때 창덕궁이 가장 계절답고 아름다웠다. 금천에는 물이 흐르고 후원의 나뭇잎은 건드리기만 해도 녹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이 싱그럽고 주변의 공기는 촉촉하다. 그저 궁궐과 후원의 길을 따라 걷기만 해도 마음이 초록으로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다.
> 8년간의 기록, 열다섯 번의 풍경 [차경 : 빌려온 풍경] - 1권 종묘 창덕궁 사진집 구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