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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 Jan 18. 2023

고군분투와 아무얘기

약 2년간 작지 않은 규모의 정부 과제를 관리했다. 정부 과제는 이골이 날 정도로 했었던 터라 별로 특별할 것도 없었다. 덕분에 오래간만에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한동안은 오랜만의 프리젠테이션이 꽤 긴장되었다. 그래도 몇 번 하니 다시 예전처럼 단상에서 원하는 대로 말하고 생각한 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말하기 기술은 자전거 타기와 비슷하게 한번 체득하면 잊지 않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의 공식적 잘난 척은 언제나 즐겁다. 과제 막바지가 되니 한 달 사이 보고서 5건을 요청했다. 각각 30~40페이지 작성해야 하는 보고서다. 챙겨야 하는 다른 일들이 너무 많아서 기한에 간신히 맞추거나, 기한을 넘겨서 제출하는 일이 잦다. 주관 기관은 나를 때려주고 싶겠지만, 멍청해서 느린 척하며 조율하고 있다. 책임자가 멍청해서 못한다는데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 개인도 조금 억울한 면은 있다. 이 컨소시엄 내에서 과제를 팀이 아닌 혼자 챙기는 건 나뿐이다. 과제 규모에 비해 객관적으로 일이 많지는 않지만, 혼자 하기에는 많다(추궁당할 일이니 이런 변명을 하지는 않았다). 이것 말고도 메인 업무 몇 개씩 달고서 말이다.


이제 실무를 완전히 못하게 되었다. 아주 작은 실무라도 하겠다고 하면 잡아먹히기 직전까지 간다. 지금 맡은 일이 경영진 포함 조직 내 나만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만큼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요청한 것이니, 단 하루도 다른일로 집중력을 잃지 말아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물론 이러고 며칠 뒤 실무 서포트를 많이 해주고 있기는 하다. 머쓱해하시는 듯 하지만 예상하던 일이다.). 예전엔 내게 의지하는 팀이 썩 못미더웠지만 억지로나마 의존도가 많이 빠지니 그도 섭섭하다.


조직 개편 이후로 꽤 많은 일들이 꽤 빠른 호흡으로 진행되고 있다. 어떤 셀은 벌써 성과가 발생하고 있고, 어떤 셀은 아직 성과가 요원하다. 셀 구성원의 역량과 상관없이 명확히 디렉션하고, 반드시 해야 하는 세 가지 이내의 일만 제시하고, 성과를 일일로 보고 받는 경우에 성과가 창출되는 듯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셀의 실무자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데 생각보다 서툰 듯하고, 어떤 태스크가 일의 key인지 생각하는 걸 어려워하는 듯하다. 아침마다 하고 있는 태스크와 방향을 점검하는 셀은 성과가 생긴다. 일단 일의 방향은 잡았다고 생각해서 지켜만보고 있는 셀은 이내 방향을 잃는다.

오랜만에 빠른 호흡이다. 하루하루의 성과에 웃고, 하루하루의 실패에 운다. 이전에는 바쁘기는 했지만 빠르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창업했을 때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반갑다. 아직 더 빠를 수 있다고 생각은 든다. 다만 모두가 같은 속도로 뛸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단은 기다린다.


하드씽이라는 책이 있다. 실리콘벨리의 상장사 오너가 위기에 빠진 회사를 구해내는 스토리의 책이다. 시황이 좋지 않다. 우리도 하드씽 하고 있다. 오랜만에 일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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