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hiloS Mar 16. 2021

여행을 추억하는 방법, 요리

일상 속에서 여행자는 불현듯 추억을 앓는다



나는 '요알못'이다.

누군가는 '간장 한 스푼만 더 넣으면 맛이 좋아질 거야.' 하는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뚝딱뚝딱 간을 맞추던데 나는 그런 쪽으로는 전혀 감이 없다.

비염을 오래 앓아서 그런지 후각과 더불어 미각도 남들보다 조금 둔하다.

게다가 성질도 급해서 식재료를 사고, 다듬고, 조리하고, 식사를 차리고, 먹고, 치우는 과정 자체를 잘하지도 즐기지도 못한다.



요리 못하는 사람 특.jpg



지금은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집 앞으로 각종 음식이 배달되는 세상이다.

한국은 마트 물가가 비싼 편이라 오히려 외식을 하는 것이 싸게 먹히기도 한다.

때문에 평소에는 요리를 못하는 스스로에게 전혀 불만이 없지만, 간혹 불편하고 아쉬워질 때가 있다.


바로 '여행'을 할 때다.

나는 편도 여행 마니아였다. 여행이 언제 끝날 지 가늠할 수 없으니 예산에 대한 압박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루에 쓸 수 있는 예산의 마지노선을 아주 타이트하게 정해놓고 그 안에서 교통비, 식비, 숙박비를 해결했다. 교통비를 많이 쓴 날이면 식비나 숙박비에서 지출을 적게 하는 식으로 밸런스를 맞췄는데 대부분 숙박비를 최우선으로 아꼈다.

숙박이야 적당히 따뜻하고 몸만 누일 수 있으면 그만이지만, 식비를 아끼려면 맛있는 걸 먹고 싶은 원초적 욕구를 무시해야 했다. 그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적은 돈으로 원하는 음식을 스스로에게 먹일 수 있는 매우 합리적인 여행 스킬이 요리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요리 실력은 ‘맛있음’은 물론 ‘먹을 수 있음’마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식당에서 밥을 사 먹고 숙박비와 교통비에서 최대한 아끼는 것이 최선의 타협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안타까운 상황은 동행이 생기면 항상 요리를 대접받는 입장이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서서 설거지라도 했지만, 계속 대접받다 보면 괜스레 뻘쭘해지고는 했다.




'오늘은 요리를 해야겠다!'


대략 일주일 전에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 떠난' 하우스메이트는 요리를 곧잘 하는 사람이었다. 부엌과 냉장고에는 그가 남기고 간 요리 재료가 있었다.

파스타면, 올리브 오일, 닭가슴살, 다진 마늘, 페페론치노.. 그냥 두기 아까운 멀쩡한 재료들이었다.


'이걸로 토마토 파스타랑 닭가슴살 샐러드 만들 수 있겠는데?'  

스페인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늘의 메뉴 즉,  Menu del Dia가 생각났다. 그 Menu del Dia에 자주 등장하는 음식이 샐러드랑 파스타였다.

애피타이저, 메인 디쉬, 디저트와 와인까지 나오는 세트 메뉴라 가성비가 좋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자주 먹었었다. 한국으로 치면 백반이다.

순례길에서 친구들이 파스타 만드는 것을 어깨너머로 자주 봤기 때문에 나도 그럴싸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순례길에서 먹었던 샐러드와 파스타들



'그때는 마트에 가는 게 일상이었는데.'

평소 마트 가는 것을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순례길을 걸을 때는 마트만 보면 환장했었다.

스페인에는 시에스타라는 낮잠 문화가 있어서 한낮에 상점을 닫고, 일요일에도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는다. 대도시 위주로 여행한다면 이런 부분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순례길에서는 이런 문화로 인해 종종 크나큰 불편을 겪는다.

순례길은 도보로 5~10분이면 통과할 수 있는 초미니 마을들을 경유하게 되어있다. 이런 곳은 보통 식당이나 구멍가게 한두 개가 상점의 전부다. 만에 하나 일요일에 초미니 마을에서 숙박하게 되면 그 날은 아주 재수가 없는 거다. 몇 개 있지도 않은 상점들이 모두 닫기 때문에 배낭에 있는 먹을거리로 저녁을 해결해야 할 수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마트가 보이는 족족 들어가 필요한 것들을 쟁여놓던가, 살 것이 없어도 구경은 꼭 하고 나와야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이쯤 되니 내 요리 실력이 어떻든지 간에 순례길에서 먹었던 한 끼를 당장 만들어내야겠다는 강렬한 충동이 들었다.

마트에 가서 궁핍한 순례자의 마음으로 심사숙고하여 파스타용 토마토소스, 샐러드용 채소, 오리엔탈 소스를 골랐다.

비싸지 않은 스페인 와인도 한병 골랐다. 비록 가난하더라도 1 day 1 bottle은 꼭 해야겠다며 1병에 5유로를 넘지 않는 와인들만 먹고는 했었다. 무조건 질보다 양이 우선이던 시절이었다.


요리중..
완성!


역시 내 요리실력은 썩 훌륭하지 않았다. 파스타면을 푹 익히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옛 기억을 음미하는데 방해가 될 정도의 실수는 아니었다.

오히려 순례자 숙소의 주방을 잠시 빌려 만들던, 그래서 어딘가 조금씩은 어색했던 그 당시의 요리 같아서 좋았다.


순례자 숙소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프리 푸드박스에 쓸만한 재료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파스타면은 십중팔구 나왔다.

마트에 가서 부족한 재료와 와인을 사고 나면 언제나 요리는 친구들의 몫이었다.

친구들이 나에게 요리를 통해 좋은 추억을 선물해주었던 것처럼, 훗날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한 끼와 추억을 선물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끔 여행지에서 먹었던 음식을 요리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생각해둔 메뉴도 있다. 순대볶음과 뿔뽀(스페인식 문어요리)다.





이 글을 시작으로 일상 속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여행의 기억과 그에 대한 단상을 브런치라는 새로운 공간에 차근차근 기록해두려고 한다.


여행을 마음껏 가지 못하는 시절이다.

앞으로 내가 쓰게 될 글들이 해소되지 않는 방랑벽에 괴로워하고 있을 여행자들에게는 공감과 위로를, 떠날 날을 기다리고 있을 예비 여행자들에게는 여행에 대한 영감을 제시해줄 수 있길 바라며 첫 글을 마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