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잘 다녀올 수 있을까?
오죽하면 그 누구의 이의 없이 언제라도 즉각 떠날 만한 멋들어진 이유들을 은밀히 구상해 두었을까.
상상 속 나는 아주 유명한 작가다. 스페인의 해변가에 앉아 보사노바를 들으며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프로방스 지역의 어느 유명한 향수 공방에서 나의 글에 걸맞은 시그니처 향을 조향 한다. 어디로 떠나도 존중받는 이 견고한 프로페셔널함이란!
현실에서는 상상만 펼칠 뿐 글 한 줄 쓰지 않고, 책 한 장 넘기지 않는 나였다. 그리 훌쩍 떠날 만한 능력이나 오랜 바람을 실현하겠다는 굳은 의지도 없었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자주, 원하는 곳으로 떠나기는 쉽지 않다. 여행 단짝인 남편과 같이 가려면 시간과 금전적 여유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니 기회가 많이 없었다. 그 외에는 친구들과의 모임통장에서 충분한 여행 자금이 모여야 떠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엄마가 건네준 흰 용돈 봉투 하나가 계기가 되어 갑자기 일본 홋카이도에 가게 되었다.
“둘이 어디 호캉스라도 다녀와.”
호캉스라는 신조어는 다른 매체나 주위 아주머니들에게 들은 걸까? 엄마랑 내가 함께 해본 적 없는 경험이니. 아쉽게도 남편은 일이 바빠 당분간 휴가를 낼 수 없었다. 그 대신 엄마와 둘이 좋은 시간 보내면서 왠지 어색한 사이도 좀 가까워져 보라며 모녀 여행을 권했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이른 새벽 간단한 찬물 세수로 부은 눈을 가라앉힌 뒤 공항으로 향하고 있다.
우리의 첫 번째 여행은 10여 년 전 떠난 11월의 베이징 여행이었다.
아직도 떠올릴 때마다 죄책감과 찜찜함이 나를 끈질기게 두드린다. 온몸을 얼어붙게 만든 추위와 돌풍 바람으로 강렬하게 기억된, 처음이자 마지막 모녀 해외여행. 그 뒤 기회가 있을 때면 늘 따뜻한 휴양지만 찾는 엄마를 보며 혼자 어찌나 찔리던지.
예상치 못한 추위에 떨며 이역만리 땅에서 길까지 찾느라 고군분투하고, 나의 구박까지 견뎌야 했던 엄마.
베이징에 갔던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대학생의 신분으로는 다소 많은 과외비를 벌게 되면서, 나도 남들처럼 엄마와 해외여행 한 번 떠나보겠다는 호기로운 생각이 시작점이었다. 설익은 효도를 시도한 거다.
사실 여행경비를 모두 부담할 만큼 돈이 많은 건 아니었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 베이징이 내 주머니 사정에 알맞아 보였다. 11월 베이징행 비행기표가 왜 그리 저렴한지 그때 한 번 더 생각했어야 했다.
엄마는 당시 여러 복잡한 일들로 골치가 아파 여행 생각조차 없던 때였다. 별로 가기 싫어하는 엄마에게 내가 다 책임질 테니 따라만 오라고 큰소리쳤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던 나의 순간적인 패기로 우리는 그렇게 초겨울에도 매우 추운 베이징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누가 알았을까. 우리의 첫 해외여행이 꽤 오래 아픔으로 기억될 거란걸.
베이징의 11월은 회오리바람이 낙엽을 공중으로 마구 휘날리게 할 정도로 추웠다.
내가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애매한 실력의 중국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에도 실패하는 바람에 우리는 모든 여정을 헤매야만 했다. 내 미숙한 모습이 화끈하고 부끄러웠다.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도리어 짜증으로 표출되었다. 서로에게 다른 종류의 상처만 남기게 된 여행이었다.
물론 에어비앤비에서 현지인 친구를 만나 즐거운 동행도 하고, 모든 것이 마냥 못 견딜만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보통 여러 해가 흐르고 나면 즐거운 기억으로 말끔하게 채색되는 여행의 감상이 아직까지 이리 가슴을 욱신이게 하는 것을 보면, 엄마의 몸과 마음을 고생시키기만 한 그 여행을 언젠가는 꼭 만회하리라는 부채감이 있었나 보다.
그런 우리가 10년 만에 다시 일본으로 떠난다.
엄마에게도 설렘과 복잡함, 얼마간의 부담이 느껴진다.
나는 엄마에게 화를 내거나 구박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무사히 3박 4일을 보낼 수 있을 것인지 벌써 걱정이다.
엄마는 패키지로 가야 신상이 편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 말에 과거 나의 처참한 통솔력이 떠오른다. 뜨끔하면서도 울컥했지만, 효를 행하기 위한 평정심을 유지하려면 패키지여행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