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앞지르려 취미에 매달리다
서른네 살의 내가 학원가방을 메고 늦을 세라 종종걸음으로 중고등학생들이 가득한 엘리베이터에 끼여 탄다.
동그란 안경을 쓴 초등학생 여자아이와 인사를 나눈다. 우리는 4층에서 같이 내려 가야금 학원에 들어선다. 가야금 레슨이 끝나면 바로 같은 건물 아래층에 있는 기타 학원으로 직행이다. 학원이 끝나면 학생들로 북적한 분식집에서 김밥 한 줄 사들고 곧장 집으로 돌아온다. 바로 구슬땀을 흘리며 악기 연습에 돌입한다. 그러고 나서 굳어버린 혀의 긴장을 풀기 위해 갖가지 희한한 발음을 수없이 연습한다.
취미 생활에 진심인 나는 가야금과 클래식 기타를 배우고, 보컬발성 수업을 듣고, 부지런히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있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는지, 연습은 이만하면 됐는지, 즐겁고 성취감을 느끼는지까지 세심하게 살피며 기록하기도 한다.
누가 봐도 ‘취미에 불과한 것’들에 왜 이렇게까지 진심인지 의아할 거다.
누군가 나를 가까이에서 지켜본다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이렇게 매달리는 건 참으로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의 낭비가 아니냐, 너무 한가하고 속 편한 생활 아니냐며 한심하게 볼지도 모르겠다. 보통 취미생활에서는 가볍고 산뜻한 것들이 기대되기 마련이니까. 무채색의 일상에 예쁜 색채 한두 방울 더해주는 것으로 취미는 그 본분에 충실한 것이다.
그런 취미활동이 나에게는 좀 더 진지하고 간절한 필요에서 시작되었다. 취미에 진심이게 되면서부터 평생 나를 따라다닌 불안을 앞지를 실마리를 얻었다. 지금의 ‘취미 부자’로 거듭나게 된 첫 시작점은 바로 가야금과의 만남이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첫 회사에 취직했다.
집과 회사 간 거리가 멀어서 사회 초년생이 지낼 만한 적당한 방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다행히 방배동 쪽에 다세대주택 건물 하나를 갖고 계시던 고모가 반지하 방이 하나 비어 있다며, 원한다면 지내도 괜찮다고 하셨다. 곧 재개발 예정이라 새로운 임차인을 받지 않으신다고 했다. 빈 집으로 놀리지 않으면서도 떠나야 할 때엔 담백하게 집을 비울 수 있는 내가 제격이었다. 널찍한 방 한 칸과 거실이 있어 혼자 살기에 꽤 넉넉한 방을 쓰게 됐다. 서울 하늘 아래 내가 지낼 곳이 생겼다.
처음엔 출근길 인파 속에서 바쁘게 걸음을 맞추며 이동하는 것이 좋았다. 신입사원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입사 동기들과 교육을 받는 것도 뿌듯했다. 하지만 이내 첫 직장에 적응하느라 잠시 잊었던 불안이 다시 불쑥 찾아오기 시작했다. 익숙한 그 예감이다.
내가 이곳에 어울리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고, 왜 계속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막막함.
내 일은 당장 내가 아닌 그누구라도 할 수 있었다. 일을 효율적으로 잘하는 요령도 없었다. 파티션 없이 사무실 한가운데 앉아 사방으로 눈치를 보느라 실시간으로 방전되었다. 쉴 새 없이 쌓이는 일이 밀리지 않도록 의자와 한 몸이 되었다. 건조한 눈을 필사적으로 끔뻑이고 비비면서 버티는 날들이 이어졌다. 집에 돌아오는 길, 전광판 불빛에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눈이 건조하게 바싹 말라선지 눈물도 나오지 않는구나.
내 공간이 생겨 좋다고 자랑하던 반지하 자취방도 여름이 되니 끝없는 습기와 난생처음 보는 거대한 벌레들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방문에는 매번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힘들게 떨쳐냈던 우울과 불안에 다시 사로잡혀버리고 말았다.
이쯤 되니 그만두는 것의 불명예스러움에만 매몰된 채 의미 없는 출퇴근만 반복되었다. 이번에도 그만둔다면 두 번 다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할 것 같다. 막다른 절벽 앞에 현기증이 났다.
주말에는 쥐 죽은 듯 늦잠을 자고 늦은 오후에 부스스 일어나 배를 채우러 동네 마실을 나가곤 했다. 가뜩이나 해가 잘 들지 않는 창문마다 암막커튼까지 쳐 놓으니 낮과 밤을 착각하기 십상이었다. 가만히 버티기만 하면 지속될 눅눅하고 평화로운 일상. 그러던 어느 날 무기력한 주말 아침에 뜻밖의 방해꾼이 등장했다.
“이게 웬 둥당거리는 소리지?”
옆 방에 가야금 레슨실이 들어온 듯했다. 처음 배우는 학생이 서툴게 뜯는 ‘아리랑’이 귀에 거슬리면서도 관심이 갔다. 장구 반주에 맞춰 현란하게 마음을 뺏는 연주곡이 들려올 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나중에 그 음악이 가야금 산조였다는 걸 알았다. 가끔 일찍 퇴근하면 저녁에도 가야금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매일 오후 다섯 시부터 일찍 퇴근하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였다. 바로 옆집이니까, 낮 시간에 문을 두드리면 선생님과 곧장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레슨을 마친 학생이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며 떠나는 소리가 들린다.
이때 우연인 척 나가서 말을 걸면 되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옆 집 사람이라고 인사를 드리면서 가야금 소리가 참 좋다고 대화를 시작해야지. 머릿속에 대사까지 생각해 두었다. 나도 가야금을 배워보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며칠간 문고리는 수도 없이 움켜잡았는데 소심한 나머지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현관만 서성이고 말았다. 망설이다가 결국 언제부턴가 옆집 가야금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바로 옆집에서 가야금을 배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내 유일한 낙이었던 가야금 연주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다니.
며칠을 고민하다 집 근처 국악 학원에 등록했다.
가야금은 당시 취미로는 생소해 사람들이 많이 배우지는 않았다. ‘한 사람의 몫’을 하지 못하고 겉도는 나처럼 모두가 열광하거나 유행을 타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주변에 배우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남과 비교하며 늘지 않는 실력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처음엔 손모양도 어렵고 무엇보다 줄을 누를 때마다 손가락이 아파서 쩔쩔맸다.
이상하게 포기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무 살 이후 처음으로 의욕적으로 배워보는 일이었다. 검지손가락 끝에 물집이 잡혔다가 피멍으로 바뀐 부분이 동그랗게 떨어져 나가는 걸 보고도 묘하게 기뻤다.
학원에서 연습용 가야금을 빌려왔다. 열두 줄의 명주실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압력을 주며 야무지게 뜯어본다. 쨍한 소리가 나다가 이내 웅 하고 여음이 꽤 오래 울린다.
처음에는 슬그머니 출몰하던 벌레들이 어느덧 보란 듯이 방 안을 활보하고, 천장 한편에서 물이 새 똑똑 떨어지는 와중에도 가야금 소리 덕에 얼추 그럴듯한 분위기가 난다. 비가 올 때 줄을 뜯으면 반지하방이 훌륭한 공연장으로 변한다. 진도 나간 부분을 다음 수업 전까지 숙지하고 싶은 욕심에 다른 잡생각을 할 새가 없다.
나의 불안은 나보다 늘 열 걸음 정도 앞서 있었다.
아무리 잰걸음으로 지나쳐 본들 지름길에도 정통하여 이미 저 앞에서 날 기다렸다. 무슨 일이든 시작하자마자 금방 그만둘 것 같다는 끈질긴 예감에 자주 사로잡혔다.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무엇이든 부여잡고 매달리게 만들었다.
가장 만만하게 붙들 건 꼬리를 무는 부정적인 생각들. 그런 불안이 나를 쫓아오지 못하게 하려면 뒤엉킨 생각들이 피어오를 겨를조차 주지 않아야 했다. 불안을 잊게 하는 것이면 일단 붙들고 봐야 했다. 가장 흔들리던 시기에 가야금을 만나 다행이었다.
머지않아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마음속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나를 엄중하게 질책한다.
‘그럴 줄 알았지. 도대체 왜 한 가지 일을 딱 정해 자신을 던져 매진하고, 세상 속에서 한 사람의 몫을 만들어 나가는 정석의 길을 걷지 못하는 거니?’
수년간 도망친 경험을 통해 나는 내가 끈기 없고 산만한 데다가 겁이 많아 늘 '주변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단정 지었다. 그것이 내 자격지심의 큰 지분을 차지해 왔다.
또 그만뒀고 또 도망쳤다. 목소리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여전히 신랄했다. 이번에는 한 가지 다른 게 있었다. 불안의 망망대해에 난파된 나에게 붙들 것이 있었다.
가야금이 나와 함께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