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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더분한 버마재비
Jan 12. 2024
5,6년 전 난 훈련병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풀방구리에 쥐 들락거리듯 했다.
"봐, 접수 완료에서 전달완료로 바뀌었어! 전달완료래! 내 편지를 받았대! "
"어? 두 번째 보낸 건 더 빨리 전달됐네?"
"사진이 올라왔어! 안경이 없어서 찾을 수가 없네... 자기가 찾아봐! 오호, 여기 있구나!"
"소포가 왔대! 얼른 집에 들어가 봐야 하는데..."
아들의 훈련소 입소와 함께 '더캠프' 안에 있는 카페에 하루에도 몇 번을 들락거리며 새로 올라온 사진이 있는지, 내가 보낸 편지를 아들이 받았는지, 전화는 몇 소대 몇 분대 아이들까지 했는지 체크하느라 바빴다. 백룡부대 밖에서 근무 중인 훈련병인 셈이었다. 몇 장의 사진으로 나뉘어 올라온 250여 명의 까까머리 얼굴 속에서 남편은 안경을 들어 올리며 아들을 먼저 찾아내고 '잘 지내고 있네!'라고 흐릿한 얼굴을 가리켰고, 돋보기를 찾아 쓴 나는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화면을 늘려 "음, 멀쩡하네! "라고 확인하곤 했었다.
장정소포가 왔었다. 그 안에는 입고 갔던 옷가지와 신발, 급하게 써서 휘갈긴듯한 쪽지 두장, 첫 px 구입물품이라며 영양크림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아우성이 실려왔다.
'지옥이야 살려줘!'
딱지 접듯 접어온 편지 겉에 쓰인 아들의 절규였다. 하지만 먼저 군대 간 친구의 아들, 박스 한 귀퉁이에 '살려줘!'라고 써 보내왔다는 것을 익히 들었던 우리는 훈련병들은 다 그런 거라고 웃어버렸다. 노골적으로 지옥에서 살려달라는 아우성은 오히려 우리를 피식 웃게 만들었다. 편지 속에서 아들은 진심 지옥이라고 하지만 잘 지내고 있다고, 심지어 밥맛은 훌륭하다고, 부식도 잘 나온다고, 하지만 아우야 너는 의경이나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쉼 없이 주절거렸다.
편지 속 정점은 녀석이 그 안에서도 커플 팔찌를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때 같으면 쓰러져 잠들기 바빴는데 살만한가 보다고 좀 더 일찍이 다녀온 남편이 말했다. 그 살만한 훈련병은 제 동생에게 여자친구에게 줄 커플팔찌를 여러 가지 검색 후 칼라 인쇄해서 소포로 보내달라고 첫 번째 온 편지에도, 소포에 동봉된 편지와 쪽지, 박스 겉면까지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었다. '남자들이란...' 했다가 나도 그런 남자와 결혼해 살고 있으니 입을 다물고 말았다.
훈련소 내 같은 생활관 병사 중 가장 편지가 많이 오는 사람 중 한 사람이라고 넌지시 말하던 아들, 그것이 아마도 스스로 지옥이라는 그곳에서 버틸 수 있는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어 코로나로 인해 입소식 퇴소식도 없이 임실 35사단에 훈련 중 일 때도 나는 작은 아들 그림자를 쫓아 부대 안을 마스크를 쓴 미어캣처럼 서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국내 병영체험이 아니다. 좀 먼 곳이다. 작은 아들은 겨울방학을 이용해서 호주로 단기어학연수를 떠났다. 이제 나는 호주에 가 있다. 아마도 일주일정도면 본 둥 만 둥 해지겠지만 아직 호주를 향한 미어캣의 자세로 서있다.
며칠 전 아들을 따라서 광저우와 자카르타를 거쳐 퍼스에 도착하기까지 34시간여를 비행기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중국거리를 걷고, 자카르타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무사히 홈스테이를 하는 퍼스 숙소에 도착했다.
출발하기 며칠 전, 아들은 구글지도를 통해 홈스테이 하는 집의 외관을 보여주었다.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대학 친구들과 같이 떠나는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여행지밖에서 나는 빼꼼히 뒤꿈치를 들고 들여다보고 있다. 발 디뎌본 적 없는 3개국을 지도 위에서 화살표로 비행기를 다고 날았고, 손가락을 넓혀 도착지 퍼스의 대학과 홈스테이 하는 곳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들과 영상통화를 하며 푸른 하늘과 홈스테이 하는 집의 야외식탁과 수영장, 빨간 리본을 맨 몰티즈를 보았다.
계절은 반대이지만 우리 시각과 거의 같이 흐르는 (한 시간 늦은 시차) 하루와 최고기온 34도이지만 습하지 않아 체감 온도가 조금 낮은 데다 여름을 타지 않는 아들은 제법 잘 적응하고 있다. 콘센트 부근에 보이는 개미떼와 알 수 없는 벌레들의 성지라는 점만 빼고 말이다. 셰프이신 홈스테이 주인 때문에 다른 친구들보다 훌륭한 음식을 맛볼 수 있고, 이달 말까지 저렴한 가격에 여러 가지 교통수단으로 맘껏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복 받은듯하다.
하지만 군대도 핸드폰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던 훈련병기간 동안만 (손편지는 물론 더 캠프 앱 안에서 보내는 쪽지 수준이었지만) 반짝, 짧은 사랑이었다. 핸드폰이 주어지고 매일 톡과 통화를 하면서 잘 지내다 못해 외부보다 훨씬 건강하고 규칙적인 생활에 마음이 놓인 우리는 반가움에 올라가던 말꼬리가 시간이 갈수록 무덤덤해지고 마침내 또 휴가야? 하고 앞서가는 말을 꿀꺽 삼키고 익산역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군복 입은 아들을 맞이했다.
호주도 그럴지 모른다. 이제 집 떠난 지 일주일, 점점 가족 단톡방에 사진이 올라오는 횟수가 줄고 있고 우르르 달려들어 감탄사를 날려주던 아이들도 이제 시간 날 때 툭 던지고 나가고 있다. 그래도 나는 가장 끈질기게 아들이 머물고 있는 큰 섬을 향해 눈길을 주고 있다. 며칠 전에는 '붉은 크리스마스섬'이라는 ebs채널을 끝까지 보고 있었다. 매년 한번, 번식을 위해 육지에 서식하던 홍게 떼가 죽음을 불사하고 도로를 건너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여정도 흥미로웠지만, 그 시청의 시작은 그곳이 인도네시아에서 500킬로 떨어진 호주의 섬이었기 때문이었다.
군에 입대했을 때도, 호주에 갔을 때도 적응기에 엄마인 나는 같이 며칠을 보낸다. 넘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달린 자전거 보조바퀴처럼 낯선 환경에서 필요한 관심과 투덜거림을 받아줄 대화상대가 된다. 그리고 이제 홀로 탈 수 있을 때는 떼어내야 할 보조바퀴가 되어버린 날이 오면 과감하게 떨어져 나갈 준비가 되어있다. 간간이 내가 널 그래도 뒤에서 바라보고 있단다 정도의 메시지만 전해주면 될 것이다.
어제 호스트 이웃의 초대를 받아 한걍뷰와 같은 정원에 앉아 함께 햄버거와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톡방에 올라왔다. 그 전날은 홈스테이 부부가 한식을 궁금해해서 불닭볶음면과 잡채를 해서 같이 먹었다며 사진을 보내오기도 했다. 주말에는 호스트의 페리를 타고 낚시를 갈 예정이라고 한다. 이만하면 됐다. 이제 가끔 들여다 보아도 될 만큼 아들은 적응한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