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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더분한 버마재비 Apr 04. 2024

어머니 흉내 내본 며느리 쪽파김치

 바야흐로 봄이 왔다. 지난 다녀간  딸도  온다고 한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그럼 파김치를  담아야지!'

마침 며칠 전 큰 시누이가 한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하셨. 새벽에  바다낚시를  간  남편이 잡아  넉넉하게 떠온 우럭과  노래미 회를 들고  늦은 오후 시골에 갔다.

  

"형님은  우리가  푸성귀  팔러 나가는 줄 아시나 봐!"

대문 앞에  놓인  파란 봉투를  보고  볼멘소리를 했다. 양이 너무  많다. 미나리와  쪽파가  커다란  비닐봉지에  각각 채워졌다.  어린 상추도 며칠은  먹을듯하다.

"그래서  부추는  조금밖에 안 베었네!"

뒤에서  작은  봉투를  들고  오시며 형님은  웃었다.  

"아유, 잘하셨어요! 그것도  많아요. 여하튼 형님 손 크 신 것은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해마다  이맘때면  큰 시누이네  쪽파 안부가 궁금해진다.  내 것도  아니지만  내 것 인양 뽑아  욕심껏  파김치를  담는다. 이때 먹는  쪽파김치는 일 년 먹어본  모든 김치들 중 단연 으뜸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다  봄 햇살에  푸릇푸릇해지고  살이 오르기  시작하는  즈음에  먹는  파는  매운맛도  달기만 하다.


이 맛을  나만 아는 게 아니다. 남편과  세 아이들  모두 쪽파를  버무린 날은 익히지도 않은  생파에  밥을  먹는다. 고기라도  구워  파김치에  돌돌 싸서  먹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아  절로  온몸이  배시시 웃는다. 이렇게 우리를  봄만 되면  쪽파김치에  열광하게  만든 분은  바로 어머니, 시어머니다.


 어머니는  당신이  지으시던  농사를  큰 시누에게  내어준 지  오래지만  이렇게  실렁실렁  봄바람이  일면  가을에  뿌려놓은  씨앗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밭으로 가셨다. 나비 날개처럼  나풀거리는  애기상추와 부추 밑동을 잘라  탈탈 털어  겉잎을  벗겨내고 예쁘게  손질했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시금치도, 씩씩하게  물오른 쪽파도 다듬어  바구니에  담고  손가락에  물을  묻혀  튕겨 이파리에  생기를  입혔다.  다음날  남편은 보퉁이에  담긴 푸성귀를  싣고  어머니를  역전시장으로  모셔다  드렸다. 어머니는  돼지고기  한 근과  콩나물이나  두부를  사들고,  오후에야  돌아오셨다. 돼지고기  한 근 3천5백 원 , 4천 원 하던  때였다.


 이때 어린 쪽파는 우리들 몫이었다. 팔기에는  너무 가늘어서  상품가치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다듬는데  시간이  너무 걸려서  옹색한  달래 같은 쪽파. 그런데  아이들은 대궁이  굵은  쪽파보다  그렇게 가는  파를  좋아했다.  아린 맛도   파냄새도  강하지 않고  젓갈맛과  겨우내  품고 있던 쪽파의 단맛만  오롯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젓가락으로  가느다란 쪽파 한 줄기씩 가져가 뜨끈한 밥 위에 척 걸쳐 야무지게 먹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오달지게  웃으셨다. 


 하지만 바깥에서 일하고 들어와 거실 가득 파냄새를 풍기며 다듬느라 더욱 작아진 어머니의 등을 바라보는 며느리는  한숨을  지었었다.

'또 일감이 기다리고 있구나!'


그런데  이젠 겨우내 단내를  품은 채 웅크리고 있던 쪽파가 살을 올리는 초봄이면 쪽파김치를 담을 생각을 한다.

몸이  불편한  친정 엄마와  두 시간여를  다듬다 보니  엄마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허리도  다리도  아프신 분이  어떻게든  손을  거들어보겠다고  긴 시간  앉아  버티시는 게  도리어  화가 나서  들어가서  허리 잡으시라고  등 떠밀어  방으로  들여보냈다.

겉잎하나를  벗겨내면 달랑 푸른 이파리 한 장 남을 만큼  가는 파줄기와  씨름하며  다리를  뻗었다  오그렸다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끙 신음을 내며 혼잣말을  했다.

'이 어려운 걸  몇 년을  날로  먹은 거지?'

  더 이상  못할 것 같아  일어서려다 다시  눌러앉아  밤 12시를  넘기고  끝냈다.


 어머니는 작고 옹골찬 손놀림으로 가지런히  씻어놓은  파를 붉은 젓갈양념이 밖으로 튀는 일 없이 자밤자밤 얌전하게  버무렸었다. 어깨너머로 배운 며느리는  크고 엉성한 손으로 걷어붙인 소매에, 팔뚝에 고춧가루 양념이 튄다. 어느새  대가리가  들쭉날쭉 하더니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듯 버무리고  말았다. 가지런한  모양은  애당초  글렀다.

 

 하지만 맛만은 어머니를 닮겠다고 용써본다. 퇴근해  들어오는 남편 입에도 제비  입처럼  벌어진 아이들 입에도  쏙 넣어줘 본다.  호호  입을  불어가면서도 쓰읍 매운맛을  달래가면서도  맛있다는 반응이다.  얼추  어머니 흉내는 낸듯하다.

 

김치를 담고 난 대야를 어머니는 작은 손바닥으로 싹싹 훑어 내려 김치통에 담았다. 남은 국물은 헹궈  다음 날 국을 끓일 때 쓸 요량으로 빈 냄비에 담아두시곤 했다. 궁상스럽다는 생각에 며느리는 고시랑거렸지만 어머니는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며느리는  어느새 버무린 통에  남은  양념을 손날로 싹싹 훑어 내리며  어머니 모습을  닮아가고  있음을  다. 


매년  봄이면  며느리는  어깨너머로  배운  입맛을  추억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두 해가  지났지만 잊지 않고  돌아오는  봄마다  어머니의  손맛을 흉내 내본다.  그리고  뒤늦게 그 수고로움을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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