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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더분한 버마재비 Nov 28. 2023

깔끔이와 털털이의  김장대첩

깔끔이는  언니, 나는 털털이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이름이 아니고  코흘리개 시절부터 따라온 별명이다. 분명 자매였지만 극명하게 다른  성격은 자주 비교되었고 별것 아닌 일로 싸움을  부채질했다.  어느새  동생인  내가 키도  덩치도  두 살 터울인 언니를  앞서갔다. 누가  언니냐고  묻는  사람도  더러 생겨났다. 그리고  새초롬한  언니보다 수더분한  나는  외할머니와 엄마, 아버지의  인정을  더 받은 듯했고  열 살을 넘기자  언니를  친구처럼  여길 수  있는 특권을  얻은 듯 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언니에게

 "언니야!"

라고  불렀다. 언니는

"언니면  언니지!  언니야가  뭐냐? 내가  니  친구냐?"

라고만  한 것은  절대 아니다.  앞머리와 끝에 꼭 ' 저 가시나가'라는   말을 꼭  갖다 붙였다. 우리는 늘 그렇게 티격태격했다.

해질 무렵이면  방청소를  해야 하는데  서로  네가  할 차례라고  우겨댔고, 이를  지켜보던  외할머니나  엄마가  아궁이에 불을  밀어 넣던 부지깽이를 들고  쫒아나오면  둘 다  사립문 밖으로  도망 나오며  서로에게  눈을  흘겨댔다. 언니는  두해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더 혼이 났고  늘  억울했다. 그러다 보니  구구절절  이유를  대야 했다. 그래서  더 혼이 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고  결국 짜갈탱이라는  별명까지  다.


그런데  언니는  희멀건한  얼굴에 갸름하니 예뻤다.  그저 먹성 좋고  수더분한  나는  힘이 셌다. 오 남매 중 사 남매는 모두  예쁘고  잘생겼는데 어른들은 귄있다는  말로  내  그저 그렇게  생긴  얼굴을  위로했다.

 어느 가을, 동네에서 멀고 뒷마을에  가까운  논에서 탈곡이 끝난 벼 가마니를 옮기고 있었다. 내가 제 나이에 비해  수월하게  불끈 가마니를 들어 옮겼었나 보다. 그날도 언니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놀러 나갔고, 아직 어린 남동생들은 그저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디 가서  그렇게  불끈불끈  들어 올리지 말어라!"

엄마는  그렇게  힘쓰다가는  평생  일만 하고  산다며  장수도 아닌 내게  힘을  감추고  살라고  말했다. 당신처럼  일만 하고  살까 봐  걱정이  되셨나 보다. 그런데  내  위치가, 자리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열 살 터울인  큰언니는  일찍  돈 벌러  나갔고,  밑으로  두 남동생은  아직  어렸다. 바로  위  작은 언니는  비실비실, 하지만  예뻐서  분홍 원피스  살랑거리며  놀러 다니기  바빴다. 나는 이름처럼  사내아이 같은  딸이었다.


작은언니가  일을  하지 않아도  쯧쯧 혀를 차면서도  대놓고  말하지 못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이 기억은 내가  그  광경을 직접 본 것인지  아니면  엄마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내 머릿속에  그려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여름이었다. 우리는  그  시절  집에서  학교까지  십리를  걸어 다녔다. 그날  아침도  우리 동네에서  강 건너  맞은편  동네사이에  있는  징검다리를  건너  학교로 걸어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건너 마을에서  다시  학교로 가는 지름길에는  낮은  방조제와  수문이  있는 곳을  지나야 했는데  그  끝은 울퉁불퉁한  바위들을  깡충깡충 뛰어가야 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피리를  불며 가던  언니가  넘어졌다. 목구멍에서 붉은  피가  올라왔다. 집까지  다시  되돌아온 언니를  데리고  도시  병원에  가기 위해서  엄마는  버스를  타고  가며  애간장을  녹였다. 학교 가는 길, 아침에 일어난 사고였지만 언니가 광주 큰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때를 넘긴 후였.

몇 시간  걸려  도착한  병원에서 언니는 수술실에 혼자 들어갔고, 엄마는 아이도 아이지만 따라온 엄마가 먼저 쓰러지겠다는 사람들에 의해 한쪽으로 가서 기다리는데 병원이 떠나갈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검게 내려앉아버린 목젖을 꿰매고 나온 언니가  병원 앞 노점에  팔고 있던  참외가 먹고 싶다며  사달라고  조르더라는  이야기로  끝나는  엄마의  이야기.  정신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엄마와 달리  언니  눈에는  노랗게  익은  참외가  눈에  들어왔던지 사달라고  생떼를  쓰는 걸  아직  먹지도  못한다고  억지로  달래서  데리고  오느라고  혼났다는  이야기 끝에  그래도  살겠는지  집에 와서도  죽 쒀주니  기어코  밥 달라고 하는 통에  겨우 한 끼만 죽으로  때우고  밥 먹고  툭툭  아무 일 없었듯  자라는 게  신통방통 했다는 이야기. 그 후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약하던  언니는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빈혈에 시달렸고 집안일에서 제외되었다. 언니가 어지럽다고 이마를  찡그릴 때마다 어린 내 눈에는 핑계였고 엄살로 보였음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집에 일이 있는 날이면 살랑살랑 놀러 나가던 깔끔쟁이 언니는 시골에 살겠다고 몇 해 전 다시 들어왔고,  좋아하는 사람이 농사짓고 살겠다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던 털털이 나는 도시에 살고 있다. 대신 어디 가서 힘자랑하지 말라던 엄마의 말은 눈앞에 일감이 보이면 몸이 먼저 알아서 일어서는 통해 숨기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스무 살이 넘도록  밥상을  엎어가며  싸우던  우리는  싸우면서  정이  들었는지 가끔 빛바랜 옛이야기를  어제인 듯 꺼내어보며 가깝게  지내고 있다. 여전히 깔끔을  유지하고 있는  언니와 라이프스타일이  달라  티격태격하지만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  올망졸망  넣어 보낸  깔끔 언니표  고사리, 토란대, 깎은 밤 비닐팩등이  언니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나란히 누운 무 사진이 날아왔을 때부터 이미 내 허리는 예감하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구나... 이번  김장도  쉽지 않겠구나... 하고.

작년 김치통을 가득 싣고 돌아오는 길, 운전대를  잡고 열선시트에 지지던 허리의 통증과 뜨뜻한 감각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몸은 잊지 않고 기억해 냈다. 세월은 흘렀지만 깔끔이와 털털이의 역할은 여전했다. 언니와 둘이서 김장을 했던 작년, 배추를 날라주고 통을 갖다 주며 뒷설거지를 하는 일은 깔끔한 언니의 역할이었고 배추 버무리는 일은 모두 힘센 내일이었다. 혼자 하느라  잃어버린 온전한 허리를 찾는데 며칠이 걸렸던 통증이 기억났다. 다행히도  이번 김장은  언니의 작은 딸과 우리 집 양념딸이  참석, 젊은 피가  수혈된 모양새여서  안심이  되었지만  언니 밭에 심어놓은 재료를 모두 소진하기 위해서는 무김치, 갓김치, 파김치까지 김장에 포함시켜야 했다. 완벽한 사흘을 시골에서 살아야 했다.


시골살이를  하고  있는  언니로부터  반질반질한 하얀 몸과 거친 이파리의 싱싱함이 만져지는 무 사진이 날아왔었다. 역시 깔끔이다웠다. 작고 여린 무는 무김치용으로, 여문 무는 양념이나 저장용으로 구분해서 두줄로 놓고 따로 찍어 보내왔다.

"마당에 나갔는데  이웃집  아재가  무를  뽑고  있더라. 저기  건너편  밭에서도  아짐이  무를  뽑고  있는 거야. 그래서  나도  얼른  무를  뽑았다니까. "

그리고  다음날  비가 왔다. 경험 많은 동네 어른들이 선생님이셨다.

눈치껏  흉내 내며  농사를  짓는  언니는 텃밭에  배추모종 한판, 무와 갓, 쪽파까지 심었다.

"농사를  이만하면  잘  지었지? "

하며 배추 간을 지르는 중에도, 무를 씻는 중에도 맛보기를 입에 넣어주며 언니는 확인을 받는다. 스스로 기특한 모양이었다.

땅이  좋은 건지  농사를  잘 지은 건지  모르지만 배추 속이 노랗다 못해 주황색에 가까운 황금배추도 달보드레하고, 말끔하게 잘생긴 무도 매운맛없이 단맛이 났다. 나도, 김장에 투입된 젊은 두 딸도, 엄지 척을 해 보였다.

 


80 포기 배추를 씻어놓고 승리의 브이, 다듬어놓은 쪽파와 갓

집에서 담아놓은 멸치젓갈로 버무린 김장


다시 트렁크 가득 사흘동안 김장대첩을 치르고 난 노획물을 싣고 돌아가는 길, 작년보다 열선에 지져지는 등과 허리가 덜 뻐근했다. 인해전술만큼 좋은 것은 없다. 김치 버무릴 때 생각지도 못한 이장님까지 손을 보태주셔서 김장대첩을 수월하게 마쳤다. 다 끝냈다고 박수를 친 후, 절여서 씻어놓은 갓 한 바구니를 발견하고는 얼른 내일 김장하실 거라는 뒷집 할머니에게 넘겨드린 일도 참 잘했다 싶었다. 김장김치 맛도, 참여한 가족들도 서로서로 모두 고마웠다.

딸들이 김장대첩에  참여하면서 이색적인 경험을 했다. 사흘 동안 언니와 나는 각각의 딸들로부터 아이 취급을 받았다. 딸들은 살살하라고, 조심하라고, 쉬엄쉬엄하라고 쫓아다니며 걱정해 주고 거들어 주었다. 벌써 아가씨가 되고 엄마를 아이처럼 챙기는 아이들을 보며 조금은 내가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가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챙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몽글몽글 마음을 피어오르게 하더니 솜꽃처럼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그런데 몽글몽글한 마음과 달리 걱정도 하나 안겼다. 딸은 엄마를 닮는다더니 언니 딸은 언니처럼 청소와 정리를 맡았고, 내 양념딸은 나처럼 김치를 버무리고 칼질을 했다.

"딸아 어디 가서 그렇게 칼질 잘하면 안 되고 힘을 아껴 써야 하느니라!"

딸의 노련한 도마질 소리를 들으며 엄마처럼 나도 걱정이 앞섰다.

"나 보다 칼질을 더 잘하는데?"

라는 언니의 칭찬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빠른 손놀림과 빠른 도마질 소리를 들으며 아기게에게 그렇게 걸으면 안 된다며 옆으로 걷는 엄마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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