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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oresta Nov 09. 2021

12. 아침엔 판다, 오후엔 친구




이튿날 새벽, 아침 일찍 준비를 마치고 숙소 문이 열리자마자 가장 먼저 길을 나섰다. 순례길을 끝까지 걷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컨디션은 마음처럼 금방 회복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무리하지 않으며 걷는다고 걸었어도 이미 3주 이상을 쉬는 날 없이 걸은 것 자체가 무리였다. 남은 300km를 쉬엄쉬엄 걸어봤자 컨디션이 회복될 것 같지 않았다. 차라리 매일 조금 더 걸어서 산티아고에 일찍 도착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다시 출발한 첫날이었다. 씩씩하게 출발했지만 모르는 길을 새벽에 혼자 걷는 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몇 시간을 걸어도 익숙한 얼굴을 찾아볼 수 없자 더 큰 외로움을 느꼈다.


보통 순례길을 걷다보면, 처음 걷기 시작할 때 봤던 사람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자연스레 길과 숙소에서 마주치기 마련이다.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닐지라도 며칠, 몇 주를 길 위에서 마주치고 나면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땐 잘 걷고 있는지 안부가 궁금하고,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치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표현하진 않았지만 나와 같은 날씨 아래, 같은 길을 걷는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꼈고 어느새 정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일정이 어긋나면 더 이상 길에서 마주치기가 쉽지 않았다. 한발 한발 정직하게 걸어가는 길이기에, 하루 동안 벌어진 20~30km의 거리를 좁혀 다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함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길 위에선 만남과 헤어짐이 자연스레 반복됐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걷다 보면 또 새로운 인연을 만나겠지 생각하며 길을 걷는데, 일찍 길을 나선 탓인지 길 위에 순례자가 별로 없었다. 아침을 먹으러 들른 Bar엔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단체 순례객들의 무리라 오히려 더 피곤해졌다. 한 구석엔 혼자 조용히 커피를 마시는, 많이 피곤한지 한참 내려온 다크서클 때문에 판다처럼 보이는 한 순례자가 앉아있었다. Bar에 들어설 때부터 인사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오랫동안 빤히 쳐다보기에 그 옆에도 앉고 싶진 않았다. 일부러 단체 순례객들이 앉은 테이블 끝 모퉁이에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카페라떼와 음식에만 집중하며 아침을 먹는 사이, 다행히 단체 순례객과 판다 순례자도 먼저 떠났다. 일부러 조금 더 천천히 아침을 먹으며 시간을 끌다 길을 나섰다.


Bar에서 출발한 이후의 코스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한쪽은 거리가 더 짧고 외진 평원에 있는 길이었고, 다른 한쪽은 거리가 더 길고 포장된 도로를 따라 걷는 코스였다. 이미 혼자 걷는 와중에 외진 평원까지 가고 싶진 않았다. 도로를 걷는 건 피곤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더 많은 길로 가는 게 길을 잃을 위험이 적었다.  하다못해 사람이 없어도 도로에 차라도 있을 테니까. 실수로 다른 길로 들어서지 않으려고 화살표가 나올 때마다 확인하고 또 확인하면서 걸었다. 계속 걸어도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아 불안했지만, 지도도 없는 터라 내가 있는 곳의 위치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걸어서 다다른 마을 입구에 도착해 확인한 표지판엔 Oncina de la valdoncina라고 적혀있었다. 어디서부터 길을 잃은 건지, 외진 길의 초입에 들어와 있었다.


그날 찍은 사진을 다시 봐도 분명 화살표 아래엔 도로 코스에 있는 마을이 쓰여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외진 길로 들어섰는지 아직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미 한 시간 여를 걸어온 길을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길 위에 혼자밖에 없는 게 불안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노래도 흥얼거리며 즐겁게 길을 걸으려 애썼다. 그렇게 한 시간 여를 걸었을까, 길가에 작은 노상 카페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서는데 아침에 Bar에서 마주친 판다가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있었다. 아뿔싸. 몇 시간 만에 마주친 사람이 판다라니. 그는 또다시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 맘을 티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눈은 웃지 않고 입만 웃고 있었다. 인사를 건네며 다리를 최대한 빨리 움직였다. 판다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최대한 격차를 벌려놔야 했다. 그가 답을 할 새도 없이 "Hola"를 외치는 동시에 빠르게 그 앞을 지나갔다. 다리를 빨리 움직이려고 속으로 숫자를 세며 걸었다. '핫, 둘, 셋, 넷! 핫, 둘, 셋, 넷!' 거의 경보를 하다시피 최선을 다해 팔다리를 움직여 걷는데도 멀리서 판다가 보였다. 다리가 길어서인지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자꾸 격차가 줄어들었다. 황량한 길 위에 나랑 판다 둘 뿐. 혼자 걷던 순례길 위에서 성추행을 당한 순례자의 후기를 이미 들은 터였다. 도둑놈 사건 이후에 내 마음은 경계로 가득했고, 별로 첫인상이 좋지 않던 남자와 아무도 없는 길 위에 혼자 남겨진 순간 그 후기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못할 만큼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괜히 하늘을 보는  하면서 살짝 고개를 뒤로 돌려 곁눈질로 그가 어디쯤 오나 확인했다. 판다는 조금만 있으면 거의 나를 따라잡을 것 같았다. 한 시간 여를 경보로 걸은 터라 체력도 바닥이 났다. 그때 한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본능적으로 전략을 짰다. 이 마을에 앉아서 쉬어가자. 판다가 지나가지 않고 내게 다가온다면 (다가올 게 확실했지만) 웃으며 말을 건네 친구로 만들어 보자. 사람 없는 길 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마을 입구에 앉아서 일부러 신발끈을 다시 묶고 있는데 멀리서 판다가 내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쫄지 말자. 마음을 굳게 먹고 그를 마주 봤다.


일부러 먼저 말을 건넸다. "안녕! 이름이 뭐니? 어느 나라 사람이니? 어디서 출발했니? 오늘 어디까지 가니?" 그가 정신 차릴 틈이 없도록 속사포 랩을 하듯이 질문을 던졌다. 물론 최선을 다해 웃는 얼굴로. 분위기를 내 쪽으로 주도해야 했다. 의외로 판다는 해맑게 웃으며 내 질문에 열심히 답했다. 이름은 다비데, 이탈리아 사람, 레온에서 출발했고 오늘 아스토르가 (Astorga)까지 갈 거라고. 응? 아스토르가? 거기 레온에서 거의 50km 거리인데? 쉴 새 없이 걸어도 10시간인데? 지금 여기서 7시간은 더 걸어서 저녁 돼야 도착할 텐데? 판다는 자기 안내책자에는 그렇게 멀지 않다고 나와있다고 하며 책을 꺼냈다. 책을 들여다보며 거리를 다시 확인해보더니 그제야 하루 일정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판다, 아니 다비데. 아마도 그냥 지도에 레온 다음에 가장 크게 쓰여있는 도시를 말한 듯했다.


뭐야. 생각보다 멍청, 아니, 허술하잖아?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니 별로 나쁜 사람 같지도 않고. 그렇게 대화를 나눈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 대한 경계심이 풀어졌다. 아무도 없는 길 위에서 함께 걷는 유일한 사람.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 그는 좋은 말벗이었다. 중간에 마을도 별로 없는 황량한 이 길을, 혼자 걷는 것보단 둘이 걷는 게 훨씬 나으니까. 그렇게 아침에 내게 무서운 판다였던 그는 오후에는 좋은 동행이 되어 있었다. 그때까진 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면 그들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해도 알아듣는 척하려 무진 애를 썼는데, 이 친구는 시작이 판다여서 그런지 애를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아까 내 질문에 만만치 않게 이 친구도 내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나는 굳이 내 얘기 듣고 싶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숙소에 도착했을 땐 어느새 그와 진짜 친구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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