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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oresta Nov 05. 2021

1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다 때려치울래"


레온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나는 울고 있었다. 순례자 여권을 잃어버렸다. 생장에 도착한 날부터 23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내가 걸어온 길을 기억하기 위해 '숙소, 학교, 교회'에 들러 열심히 스탬프를 모았는데. 그 모든 순례길의 기록이 사라졌다. 여권이 없더라도 이 길을 걷는 동안의 모든 추억은 내 기억 속에 남아있을 거라는 걸 나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여권 때문에 그만두는 건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스스로에게도 되뇌었다. 그런데 마음이 그렇지가 않았다. 사실 여권을 잃어버려 그만두고 싶다는 건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베드 버그에 물리고, 한밤중에 도둑을 만나고, 얇은 옷가지에 이불도 없이 몸을 웅크리고 지새는 밤. 그리고 다음날 다시 짐을 지고 길을 걷는 일정. 그 모든 걸 혼자서 견디는 날들이 며칠간 계속되자 버텨내기가 힘들었다.


루이지와 한 약속을 지키고 싶었기에 베드 버그까지도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다. 다행히 레온에 도착한 날엔 봉사자들이 운영하는 공립 알베르게에 묵게 되었다. 내가 베드 버그에 물렸다고 하자 봉사자 분들은 내 옷가지와 물건을 모두 삶아 소독해 주고, 새로운 옷과 밤에 덮고 잘 담요까지 빌려주었다. 지난날 같은 숙소에서 묵으며 친해졌던 친구들도 마주쳐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괜찮아, 잘하고 있어, 곧 지나갈 거야'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잠들기 전 다른 이들의 별일 없이 즐거워 보이는 순례길 후기를 읽으면 짜증이 날만큼 사실 마음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여권을 잃어버린 건 말 그대로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었다. 이미 균열이 가기 시작한 마음은 작은 충격에도 와르르 무너졌다.


배낭을 모두 뒤집어 확인하고, 침대 위아래와 숙소를 샅샅이 뒤져보아도 여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미 다른 순례자들은 모두 숙소를 떠난 시간. 혹시나 누가 발견해 챙겨놓은 것은 아닐까 물어보려고 리셉션에 갔는데, 말을 꺼내다가 나도 모르게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터졌버렸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너무너무 서러워서 사람들 앞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나이가 지긋하신 봉사자 분들이 다가와 울고 있는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누가 여권을 본 사람 있는지 서로 물어보았지만, 봤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진짜 다 때려치고 싶다'는 마음이 들던 순간, 동시에 '그런데 내가 어제 체크인을 하고 여권을 받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을 멈추고 혹시 리셉션 책상 서랍에 여권이 있는지 한 번만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침 내내 이리저리 뛰어다닌 게 허무할 만큼, 여권은 리셉션 서랍에 곱게 놓여있었다. 아마 체크인 때 베드 버그 이야기를 하면서 정신이 없어 나도, 봉사자 분도 여권을 챙기는 걸 깜박했던 것 같다. 여권을 찾고 나니 그동안 붙들고 있었던 무언가가 풀어진 듯이 온몸에 기운이 쭉 빠졌다. 그때까지 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야 꺼냈다. "오늘은 쉬고 싶어요... 이곳에 하루 더 묵을래요..." 봉사자 분들은 당연하게 그러라며, 지친 나를 한 번씩 꼭 안아주었다. 지난 23일 동안, 컨디션이 좋지 않아 적게 걸은 날은 있어도 하루도 멈춰서 쉰 적이 없었다. 아무도 묻지 않은 책임감과 걷지 않는 데 대한 죄책감을 혼자 느끼며, 짧은 거리일지언정 매일 아침 숙소를 나서 걸었다. '못 하겠다'는 말을 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다. 그동안 좋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갔지만, 매일 짐을 지고 이동하는 일상에 사실 많이 지쳐있었다.




'오늘은 걷지 않고 숙소에서 쉬겠다' 말을 하고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여권은 찾았지만 '내가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인지한 터라 이 길을 계속해서 걸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울어서 빨갛게 부은 눈으로 아직 고요한 레온의 거리를 걸었다. 무작정 걷다가 아침을 먹으러 한 Bar에 들어갔다. 바에 앉은 아저씨 두 과 가운데에 주인아주머니 한 . 그들 옆에 앉아 주문을 하고는 아무 표정 없이 멍하니 있었다. 웃으며 인사할 기운조차도 내겐 남아있지 않았다. 누가 봐도 울다 온 티가 났는지 그녀는 조심스레 내 안색을 살폈다. 그러다 아무 말 없이 내 접시 위에 Jamón (하몬 :  소금에 절여 건조한 스페인식 햄) 한 조각을 올려주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 위로도 건네지 않았는데, 그녀의 친절이 어떤 말보다 완벽한 위로가 되었다. 그제야 기분이 조금 나아져 어색한 미소로 그녀에게 "Gracias (고마워요)" 말을 건넸다. 그녀는 눈짓으로 '다 괜찮다'고 내게 답했다.


아침을 먹고 나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때 내 마음속에는 '스스로에 대한 미안함'이 제일 컸던 것 같다. 내가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돌봐주지 않은 데에 대한 미안함. 그래서 오늘 하루는 맘껏 구경하고 맘 편히 쉬자고 마음먹었다. 제과점에 들러 빵을 사고, 마트에 들러 가장 좋아하는 복숭아를 종류별로 사서 먹었다. 아무 걱정 없이 레온 시내를 유유자적 돌아다녔다. 다행히도 레온은 그냥 지나쳤으면 아쉬울 만큼 아름다운 도시였다. 도심을 구경하다 레온 대성당에 들어가 아름다운 작품들을 구경했다. 우연히 성당 안에서 마리아를 다시 마주쳤다. 베드 버그로 고생하고 있다고 하자 그녀는 내게 베드 버그에 좋은 약을 알려주었다. 성당을 나와선 박물관으로 향했다. 저녁을 먹고는 공원에 누워, 길가에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거리 공연을 보며 배우의 넉살에 오랜만에 맘껏 웃었다. 하지만 웃으면서도 내내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순례길을 끝까지 걷고 싶었다. 여유를 가지고 중간중간 쉬어가며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걷기 위해서 이 길에 온 것이었다. 휴식도, 여유도, 관광도 모두 순례길의 일부일 때 아름다웠다. 순례길을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모든 아름다움과 즐거움도 공허하게 느껴졌다. 나는 길 위에서 사람들과 함께 걷는 게 좋았다.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각자의 속도로, 하지만 결국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는 게 좋았다. 그들과 길 위에서 함께 걷는 내가 좋았다. 레온에서 하루의 휴가를 보내고 나는 다시 순례길을 걷기로 했다. 피부는 계속 가려웠고, 몸과 마음도 여전히 지쳐있었으며, 길을 나서면 또다시 물집과 발의 통증으로 괴로울 걸 알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걷고 싶었다. 산티아고에 가서 루이지와 한 약속도 꼭 지켜내고 싶었다.


'불행은 행운과 함께 온다' 

불행은 겪을 만큼 겪었고, 이쯤이면 다시 행운이 올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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