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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oresta Jan 26. 2022

14. 내 경험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




산티아고 길을 걷고 있을 때의 나는 대학교 전공 학점이수를 마치고 인턴십을 하고, 졸업과 취업을 앞둔 상황이었다. 처음 웹툰을 보고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알기 시작해 막연한 동경을 가진 이후, 진짜 산티아고 길을 걷기로 결심했을 때 바랐던 것은 하나였다. 멈추고 나를 돌아보기. 한국에서, 특히 서울에서는 가만히만 있어도 죄책감이 느껴졌다. 수많은 기회가 쏟아졌고 그래서 무엇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이 들었다. 처음 20대가 되었을 때는 그 모든 경험과 기회들이 너무 신기하고 특별해서 달려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보이지 않는 압박감에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계속 가다 보면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졸업을 앞두고서도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길에서 한 달여의 시간을 혼자 걸으면서 생각하다 보면 그래도 조금은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산티아고 길 위에서 내가 갈 길을 찾았느냐면 그렇진 않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이 인도나 산티아고 순례길 같은 영적(?)이라고 소문난 곳에 여행을 가서 자신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하거나, 어떤 특별한 경험을 하고선 짠! 하고 변화했지만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될 것을 기대했지만) 실제 산티아고 길을 걷는 동안은 상상했던 것보다 혼자 사색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특히나 여름 산티아고는 유럽에서도 인기 있는 휴가 코스라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고 걷다 보면 어느새 앞뒤에 있던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길을 걷고 있었다. 혼자서 아무 말 없이 걷는 것은 생각보다 꽤나 외롭고 지루했다. 나는 혼자 사색하는 것보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대화하는 것이 더 좋았다. 그래서 기회가 있으면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사람들과 대화하며 내 경험과 생각이 정리되고, 그를 통해 나에 대해 알게 될 때가 더 많았다. 어느새 길을 출발할 때의 결심을 잊은 지는 오래였지만 길에 온 목표나 결심 같은 걸 잊은 덕분에 길에서 보내는 매 순간을 제대로 보고,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순례길을 걸으며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 동행은 역시나 다비데였다. 함께 걸으며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꿈에 대해, 일에 대해, 가족에 대해, 친구에 대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같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삶에 대한 주된 고민은 비슷했고, 그도 말이 많고 나도 말이 많은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할 말은 계속해서 생겨났다. 어느 정도 서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자 서로가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들으며 취향을 공유하고, 또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네 영화 취향은 우리 엄마랑 딱 맞겠다'라고 디스하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그날의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나는 한국에 있을 때 대학 캠퍼스 잡지랑 웹진에 글을 썼고 그 일이 너무 재밌었어. 글 쓰는 게 좋지만 그 일을 직업으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라는 말을 꺼냈다. 내 이야기를 듣던 그가 말했다. "나는 언젠가 네가 작가가 되어 책을 쓸 거란 걸 알아. 어떤 이야기를 쓸 거야? 산티아고에서 겪은 이야기를 쓰면 어때?"


글을 쓰는 게 재미있고 좋았지만, 한 번도 내가 작가가 되고 책을 내리란 상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글 쓰는데 소질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통해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진 았았다.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그가 자신 있게 '너는 작가가 되어 책을 쓸 거야'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그때껏 모르는 척했지만 내 안에 그런 바람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산티아고에 다녀온 지 6년이 지나 이제 7년이 되어가는 지금 내가 산티아고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은. 여전히 내가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작가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그때 그가 내게 그 말을 건넨 이후 산티아고 이야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삶에서 꼭 끝까지 써내야 할 이야기가 되었다. 삶의 고단함을 핑계로, 실은 게을러 이야기를 쓰지 못한 지난 시간 동안 내 마음 한편에는 늘 길 위에서의 경험을 이야기로 써야 한다는 마음이 돌덩이 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보다 나를 더 믿어준 사람. 2015년 그가 건넨 한마디가 2022년이 된 지금 내가 이 이야기를 끝까지 쓰도록 만들었다.


반나절을 꼬박 걷고도 순례자 여권에 스탬프를 받겠다며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동네 성당을 찾아가는 나를 보고 어느 날은 다비데가 말했다. "(스탬프를 모으는 거면) 내 여권도 너한테 줄게" 나는 답했다. "아니, 고맙지만 괜찮아. 내 경험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 내가 경험한 것들, 스쳐간 곳들을 잊지 않기 위해 스탬프를 모으는 거야" 산티아고 길 위의 이야기를 하나씩 기록해 나가는 지금, 나는 이제야 순례자 여권의 마지막 장을 채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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