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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oresta Feb 03. 2022

17. 나를 돌보며 길을 걷는 법




다음 날 아침, 비는 그쳤지만 아직 하늘은 아직 우중충했다. 다행히 체기는 내려갔지만, 등산화가 망가져 우선 가지고 있던 샌들을 신고 길을 나섰다. 전날 일정이 고단해서였는지, 신발이 망가진 게 속상해서 인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실망한 마음 때문인지 전처럼 힘이 나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져 평소보다 말없이 길을 걸었다. 다비데는 별 질문 없이 함께 걸으며 옆에서 손을 잡아 주었다. 쳐져 걷고 있는 우리 곁에 길에서 다비데와 친해진 이탈리안 친구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우리에게 함께 와인을 마시겠냐고 물었다. (아침 9시에...?) 그들은 '오늘은 어디까지 가야지'라는 목표 같은 것 없이, 그저 '되는대로, 가능하면 재밌게 보내야지'라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같았다. 친구 둘이 휴가를 맞아 함께 순례길에 와 원하는 만큼 걷고, 즐겁게 놀다가, 치고받고 싸우고 화해하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영화 '덤 앤 더머'의 주인공들이 떠올랐다.

 

그 당시엔 그들의 태도가 진지해야 할 순례길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니 그건 내가 만들어 놓은 기준이었을 뿐 그들이야 말로 오롯이 순례길을 걷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찾겠다'거나, '언제 어디까지 도착하겠다'는 목적 없이, 그냥 앞에 있는 길을 걷고,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실수하면 함께 고생하고 (하루는 숙소를 구하지 못해 길에서 잘 뻔했단다),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 함께 걷던 그들. 준비성 없고 즉흥적인 두 사람도 나 만큼이나 고생하긴 마찬가지였으나 나와 다르게 그들은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았다. 그냥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고, 짜증 나면 짜증을 내고, 화가 나면 서로 탓하며 싸우고, 다음 날엔 그 이야기를 농담 삼아 웃으며, 단순하게 그날 주어진 길을 걸었다. 그들에겐 '순례길을 어떻게 걸어야 한다'는 정해진 답이 없었다. 그래서 그토록 자유롭게 순례길을 누렸고 결국 자신들의 방식으로 산티아고에 무사히 도착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길가에 있는 벤치에 넷이 둘러앉아 모닝 와인을 나눠마시고 있었다. 길에서 고생한 에피소드를 재연하며 넉살 맞게 풀어놓는 그들 덕에 한참 웃었다. 쓸데없이 무겁던 마음이 그제야 좀 가벼워졌다. 평소 같으면 '점심이 되기 전에 오늘 정해둔 마을까지 도착해야지' 하는 생각에 마음속으로 시간을 계산하느라 바빴을 텐데, 와인 한잔에 마음이 나른해졌는지 그날은 별생각 없이 슬렁슬렁 길을 걸었다. 다시 길을 나선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꽤 큰 도시에 도착했다. 늘 나보다 더 멀리, 더 오래 걷고 싶어 하던 다비데가 웬일인지 오늘은 여기까지만 걷고 도시에서 멈추자고 했다. 그리고 오늘은 알베르게 대신 호텔에 묵자고 제안했다. 대학 시절 알바를 해서 돈을 모으고, 그 돈을 통장에 10만 원도 남기지 않고 긁어 모아 배낭여행을 떠나곤 했던 내가 선택할 수 있던 숙소는 늘 민박집이나 게스트하우스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도 가격이 제일 저렴한 공립 숙소 (알베르게)에서 묵는 게 당연했다. 호텔이란 건 생각지도 못 한 선택지였다.


나는 그게 지친 나를 위한 배려라는 걸 알았다. 익숙한 방식으로 자존심을 지키려다가, 그에게 그저 알았다고 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시내에 나가 우선 새 신발을 샀다. 산티아고에 도착하기까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혼자였다면 돈을 아끼려 샌들로 어떻게든 버텼을 테지만, 다비데는 나에게 꼭 신발을 사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 떠밀리듯이 신발가게에 들어가 새 신발을 샀다. 신발을 사고 나니 여행 끝까지 버티기엔 예산이 부족할 게 빤히 보였다. 그때부터 나는 더 이상 남은 돈을 계산하지 않기로 했다. 돈 아끼느라 매일 하루 종일 고생한 나를 챙겨주지 못하는 게 싫었다. 얼마 남지 않은 순례길을 행복하게 걷고 싶었다. 그날, 새 신발을 사고 나서 맛있는 밥을 챙겨 먹었다. 호텔에 돌아가 깨끗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낮잠을 잤다. 잠에서 깨어 밖에 나가 먹고 싶었던 과자와 간식을 사서 돌아오니 다비데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간식을 나눠 먹고, 둘이 베개싸움을 하며 장난을 쳤다. 오랜만에 걱정 없이 즐거웠다.     


저녁이 되자 다비데는 뜨거운 물을 욕조에 가득 받고, 바디 워시를 풀어 거품까지 한가득 채워 놓고는 나를 불렀다. 욕조 옆에는 내가 좋아하는 초코 바가 놓여 있었다. 그는 먼저 자러 가고, 나는 뜨거운 물속에서 초코바를 까먹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집을 떠나온 지 딱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한 달 동안 어깨에 배낭을 지고, 길을 걷고, 길 위에서 밥을 먹고, 샤워를 하고, 손빨래를 하고, 도미토리 이층 침대에서 몸을 뉘었던 날들. 나는 자주 행복했지만, 많이 지쳐있었다. 내겐 비난이 아니라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일 수 있는 휴식이 필요했다는 걸, 어려운 순간들에도 포기하지 않고 매일 성실히 길을 걸어온 내겐 그럴 자격이 있다는 걸, 욕조에 몸을 담그고 나서야 깨달았다. 다비데가 도시에 멈추고 호텔에서 묵자고 한 이유를 그때서야 완전히 이해했다. 그는 자신과 잘 지내는 법을 아는 어른이었다.


나는 늘 열심히 나를 채찍질해왔다. 작은 실패에도 쉽게 실망하고 나를 비난했다. 내 안에선 힘들다고 소리쳐도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무시했다. 쉴 새 없이 약속과 할 일을 만들어 놓고 이미 지친 나를 끌고 다니며 그 일정에 구겨 넣었다. 그러다 내 안의 내가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면 그때서야 어쩔 줄 모르고 우울 속에서 허우적댔다. 순례길 위에선 그게 통하지 않았다. 다른 누구의 바람도 아니었고, 남이 정해준 목표도 없었기에 이젠 더 이상 남의 핑계를 대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거나 내 고통을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매일 길 위에 한 발을 내딛기 위해선 내 마음과 몸을 내가 보듬어 가야 했다. 길 위에서 나는 매일 나를 직면했다. 습관처럼 스스로를 밀어붙이다가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는 용기를 내 멈춰 섰다. 내 무모함과 나약함에 실망하고 비난하면서도,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는 내가 안쓰러워져 함께 울고 위로하며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나는 길 위에서 스스로를 돌보고 존중하며 함께 길을 걷는 법을 배워나갔다. 그리고 그 곁엔 남에게도, 자신에게도 친절한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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