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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oresta Feb 14. 2022

19. 이 길의 끝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길




산티아고에 가까워질수록 다비데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도 늘어났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후, 다비데는 하루 더 산티아고에 묵고 그다음 날 마드리드로 떠날 예정이었다. 나는 그보다 하루 더 있다가 바르셀로나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순례길이 끝난다는 아쉬움과 함께 이틀 후면 다비데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겹쳐 길을 걷는 내내 수시로 마음이 울렁거렸다. 순례길 위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산티아고 도착을 앞둔 순례자들이 숙소 이곳저곳에 남긴 낙서 사이에 우리도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기록했다. 12일. 순례길 위에서 마주쳐, 도망치다가 친구가 되고, 매일 아침 어둠 속에 함께 길을 나서고, 장난치고 싸우고 화해하고, 빗속에서 노래 부르고, 옷과 음식을 나누고, 힘들 땐 서로의 배낭을 지며 함께 걸어온 시간들이었다. 다비데와 보내는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해서, 나는 아무것도 잊지 않기 위해 그와 함께 보낸 날들을 밤마다 머릿속에서 다시 되짚어보곤 했다.


낙서를 하다 마주친 다비데의 눈이, 웃고 있는데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눈이 너무 슬퍼 보여서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서프라이즈로 공개하려고 했던 비밀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그에게 핸드폰에 저장해 두었던 바르셀로나행 비행기 티켓을 보여주었다. 내가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날 때 미리 예약해둔 비행 편은 '50일 간격의 파리 인아웃' 뿐이었다. 산티아고까지 걷는데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었고, 평소처럼 마감을 정해놓고 일정에 쫓기며 걷고 싶지 않았기에 순례길 이후의 일정은 아무것도 정해놓지 않았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후에 바르셀로나와 파리를 둘러보고 돌아가겠다'라는 막연한 계획만 가지고 시작한 여행. 그러다 다비데를 만나 함께 걸으며 점차 생각이 많아졌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이후에도 그와 좀 더 함께하고 싶었다. 새 신발을 샀던 날, 고민 끝에 마드리드를 들러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내가 건넨 항공권에서 '마드리드 경유'를 발견한 다비데의 눈은 순식간에 기쁨으로 가득 찼다. 언제든 결국은 이별을 맞아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 길의 끝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라는 게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방금 전만 해도 울 것 같던 그가 금세 뛰어오를 듯 행복해하며 온 힘을 다해 나를 꼭 끌어안았다. 우린 더 이상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게 두렵지 않았다. 다비데는 내 손을 잡고 낙서하던 펜으로 내 손등에 하트를 그려 넣었다. 말없이도 서로의 마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우리는 한 번도 서로에게 말로 마음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산티아고에 도착함과 동시에 끝이 정해진 만남이었고, 누구도 그 이후를 기약할 수 없었기에 섣불리 마음을 말할 수 없었다. 진심을 모두 표현했다간 길 끝에 이르러 이별이 다가왔을 땐 서로가 더 슬퍼질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그린 하트의 의미가 '사랑'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저 말없이 다비데를 꼭 안아주었다. 


잠들기 전, 손에 그려진 하트 사진을 찍어두고, 그가 빌려준 옷들을 다시 그에게 돌려줄 준비를 했다. 재킷 주머니에 구멍이 나 있어 물집용으로 챙겨 온 실과 바늘로 열심히 구멍을 꿰매고, 잘 빨아서 말려놓은 나머지 옷들도 하나씩 가방에 잘 정리해 넣었다. 그에게 받은 것은 셀 수 없이 많은데,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고마움은 그 정도뿐이었다. 산티아고에 도착할 때가 다 되어서야 우리는 처음으로 함께 셀카를 찍었다. 다비데가 내게 특별해질수록 마음을 들킬까 그에게 사진을 찍자는 말을 하기가 더 쑥스러워서, 내 사진 속에는 늘 앞서 걷던 다비데의 뒷모습만이 가득했다. 그 모습 또한 내가 좋아하던 모습이었지만, 훗날 순례길을 돌아봤을 때 그의 얼굴을 꼭 기억하고 싶었다. 산티아고 도착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고, 우리는 도착과 이별을 함께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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