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어리더 친구 재니퍼 이야기
화폐라고 하면 비트코인 같은 가상 화폐를 종종 떠올리지만 요즘엔 화폐의 개념이 참 모호해졌다. 현금, 신용카드를 제외하고도 은행을 통하지 않는 앱을 통한 현금 거래 서비스도 많이 늘었고 상품권, 쿠폰등 대용화폐의 활용도 늘었다. 요즘은 아이들이나 부모님에게도 또 친구들끼리 주고받는 선물로 디지털 상품권을 많이 쓴다. 받는 사람은 사고 싶었던 물건을 살 수 있어서 좋고, 보내는 사람은 이것저것 신경 쓰지 않고 가격만 정해서 보내주면 끝나니 서로가 득이다.
가끔 마트에 가면 종이로 된 활인권이 눈에 띄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미국만큼 종이 '쿠폰' 문화가 자리를 잡지 않았다. 미국은 오래전부터 신문을 구독하면 따라오는 상점 쿠폰이 큰 영향력이 있었다. 아침마다 주부들은 신문을 기다렸다가 원하는 상점의 쿠폰을 가위로 잘라서 가져가면 그만큼 할인을 받는다. 요즘은 신문 구독자가 많이 줄었지만 이메일을 통한 디지털 쿠폰이나 가입 시 주는 할인 코드를 사용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흔하다.
우리에게 쿠폰이 낯설다면, 친근한 것은 "포인트" 사용이다. 항공사 마일리지, 올리브영 포인트등 상점을 이용하면 일정 가격에 따라 주는 포인트 점수는 나중에 현금으로 받을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다음번에 공짜 또는 할인등으로 소비자를 유혹한다.
신용카드 제휴 혜택도 현금처럼 쓸 수도 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나 한국만큼 신용카드 혜택이 많이 있는 곳은 없다. 제휴카드 할인은 특히 대기업이 문어발식 경영을 하는 우리나라에 최적이다. 외국은 큰 은행이 비자, 마스터카드와 손을 잡고 신용카드를 발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여러 회사와 계약을 맺고 이런 혜택을 중 수 있는 곳이 많지도 않고 흔하지도 않다. 미국은 대부분 한 회사에서 은행 신용카드를 발행해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 회사 밖에서의 혜택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렇게 여러 가지 우리에게 우리에게 익숙한 화폐와 대용화폐를 둘러봤으니 이제부터 소개해 드릴 이야기들은 약간 생소한 이야기일 것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2023년에 발행된 토큰 - 미래의 돈(Tokens: The Future of Money in the Age of the Platform)이라는 책에서 가져왔다.
우리가 인공지능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실리콘밸리 크고 멋진 사무실에서 엄청난 연봉을 받는 사람들만 떠올리는데 이들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다. 큰 회사들은 보통 하청 업자를 통해서 계약직 근로자도 많이 고용한다. 이들이 하는 일은 보통 데이터를 분류하는 일 또는 데이터의 정확성이나 유용성 또는 적절성등을 검토하는 일을 한다. 특히 이미지 인식이나 챗봇의 경우 이런 빅데이터 처리가 필수.
계약직원 중에는 하루에 몇 시간 데이터만 처리하는 알바생도 많다. 물론 시급도 고용 계약을 맺고 일하는 게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큰 인원을 짧은 시간 동안 채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은 보통 시급으로 상품권을 받는다. 이렇게 되면 복잡한 고용계약서를 쓸 필요도 없고 가끔은 비자가 없는 외국인들도 고용된다. 이들은 받은 상품권을 회사 사이트에서 직접 사용하기도 하고 또 페북이나 레딧등 인터넷을 통해서 현금화하기도 한다. 상품권으로 시급을 받으면 세금을 낼 필요도 없어서 양쪽이 편하다. 이런 고용과 급여의 형태가 최근 들어서 미국에서는 많이 늘어났고 계속해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성인 사이트에 가입비를 내거나 다른 조금 색다른? 서비스를 살 때도 상품권이 사용된다. 한국에서는 금지되어 있지만 성인 사이트로 가장 유명한 '폰허브'는 캐나다 회사로 아름다운 몬트리올에 있다. 프리미엄 이용자들 중 가끔 서비스비를 신용카드로 내고 나중에 신용카드 회사에 전화해서 신용카드가 해킹된 것 같다고 환불 요구를 하는 경우가 있어서 신용카드 회사들이 성인 사이트 거래를 참.. 싫어한단다.
그나마 큰 사이트는 신용카드로 거래가 가능하지만 작은 성인 사이트 중에는 아예 신용카드 대신 가상화폐나 현금 쿠폰 또는 상품권등으로 거래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신용카드 회사 거래내역서에 성인 사이트라고 나오는 게 아니라 상품권 구매 내역만 나오게 되니.. 참 머리가 좋다.
일본에서는 시간을 화폐단위로 쓰기도 한다. Fureai Kippu, 후레아이 키푸는 우리말로 '돌봄 화폐' 정도로 볼 수 있다. 운영방법은 간단하다. 우리 부모가 아프신데 나는 멀리 있거나 내가 현재 돌볼 상황이 아니면 다른 사람이 우리 부모님을 돌봐주고 그 시간을 '시간 화폐'로 받는다. 나도 나중에 여유가 되고 시간이 생기면 다른 분을 돌보고 빌린 돈, 즉 시간을 갚는 시스템이다.
일본에서 활성화된 이 제도는 몇 지역에서는 요양원사람이 줄어들 정도로 잘 운영되고 있단다. 여러 유럽 국가, 특히 독일에서는 현재 도입이 논의되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 우리 어머니를 담당하시던 간호사분도 친구들이랑 몇몇이 부모님들을 함께 모실 생각이라는 말을 듣고 모두가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 생각했었다. 특히 요양원이나 각종 시설에서 노인 학대 등의 문제가 뉴스에 나올 때면 이런 것을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내 동생도 엄마를 혼자 돌보지만 여럿이 함께 돌아가면서 부모님을 모시는 제도나 나처럼 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이런 제도를 통해서 본인의 앞날을 준비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본다.
미국에서 나와 가장 친한 친구 제니퍼는 대학을 졸업하고 의대를 준비하던 중 꽃다운 24살에 혈액암 말기 판정을 받았었다. 골수 이식 만이 살 길이었는데 가족 중에는 골수가 맞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때 가족이나 친구 등이 환자 이름으로 장기를 기증하면 교차 장기 기증 프로그램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기증자와 환자가 또 다른 기증자와 환자와 연결되어 네 사람 사이에서 적합한 짝을 찾는 것이다. 장기 기증자가 많을수록 맞는 짝을 찾을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이 시스템이 활성화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보게 된다.
이 덕에 내 친구는 극적으로 홍콩에 있는 사람과 연결돼서 골수를 이식받았다. 완치 후 이제 병원은 싫다며 의대를 박차고 나온 제니퍼는 개발자가 돼서 나와 함께 의료 앱을 만들고 몇 년 전까지 샌프란시스코의 대표 49ers의 치어리더로도 활약했었다. 제니퍼의 이야기는 여기서 자세히 볼 수 있다.
예쁘고 활력이 넘치는 제니퍼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수재다. 이렇게 밝게 웃고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그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때 기증자를 찾지 못했으면 어쩔 뻔했을까 하는 생각에 가끔 소름이 돋는다.
화폐, 돈은 우리에게는 항상 인간의 가장 어두운 면을 반영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에서 서로를 믿고 또 서로에게 의지하고 물물 교환대신에 좀 더 편리하게 살고자 만들어진 것이 화폐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가장 인간다운 도구가 될 수도 있고 가장 잔혹한 도구가 될 수 도 있다.
대문은 Photo by Omid Armi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