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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이해하기

금복이 무지개다리를 건너다

by coder

금복이가 처음 우리 집에 온 것은 8개월 전 - 2025년 1월.

아주 예쁘게 생긴 검정 시바였는데 주변 아파트단지에서 수개월간을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친절한 아가씨가 지역 동물 단체와 협동 작전으로 구조를 한 아이였다.

구조 후 동네 24시간 하는 동물병원에서 지내던 중 입양을 하기 전까지 임시보호자를 찾는다는 홍보를 보고 나와 동생이 선뜻 신청을 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1월, 그렇게 금복이는 우리 집에 왔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는 입양을 결정했다.

그리고 몇 주 후에 파킨슨으로 앓고 계시는 엄마가 폐렴 판정을 받고 병원에 오래 계시게 되었는데, 금복이는 그 과정에서 엄마가 좋지 않으실 때는 내 친구네 집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


엄마가 퇴원해서 집으로 오시는 날에 금복이도 친구네 집에서 우리 집으로 돌아왔고,

난 한 달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언젠가 금복이를 미국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동생에게 말하고 그동안 몇 달 간만 잘 돌봐달라고 아이를 맡겼다.


중증 엄마를 돌보는 동생에게 개를 맞기 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철없는 짓인지.


그러나 금복이는 참 착한 아이였다.

문제를 내지도 않았고, 대 소변도 가릴 줄 알았다. 사료도 잘 먹고, 산책을 좀 길게 가도, 짧게 가도 불만이 없이 잘 지냈단다. 내가 없는 동안 동생과 금복이는 정이 많이 들었었다.


미국 내에서 이민법과 비자에 관한 험한 이야기들이 오가면서 4월쯤 한국에 다시 나올 예정은 7월로 늦춰졌고, 4개월 만에 한국에 다시 오니 걱정했던 엄마는 많이 호전된 모습이었고, 금복이도 잘 지내고 있었다.


처음 한국에 온 날 금복이와 예전처럼 검단산으로 긴 산책을 가는 중 이 자식 더워서 그런지 숨을 가파르게 쉬고 조금만 오름길이면 가기 싫다고 버텼다. 그러다 그날 검단산 입구에서 이 녀석의 오줌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길로 병원에 가서 심장사상충 3기 판정을 받았다. 입양당시 분명히 심장 사상충 검사를 했다고 해서 검사를 하지 않았었는데, 너무 날벼락같은 소리에 정말 화가 많이 났었다. 의사 선생님은 1달 약 치료 후 주사치료를 권하셨다.

첫 주사 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일주일을 지켜본 후 난 미국으로 돌아왔다. 한 달 후 이차 치료 때 다시 돌아오겠다고 동생과 금복이에게 약속했다.


까만 털에 혀만 핑크색이라 우리가 블랙 핑크라고 불렀는데 녀석은 시골개처럼 고구마며 강냉이를 특히 좋아했었다.


내가 떠난 후 며칠 후부터 녀석의 핑크색 혀는 보라색으로 변했고

숨을 잘 쉬지 못해서 동생이 산소 호흡기를 껴주며 밤을 지새운 적도 많았다.


숨을 잘 쉬지 못하는 날에는 천식 환자처럼 기침과 헛 구역질도 했고, 아이는 금방 기력을 잃어갔다.

병원에서는 아이의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고, 치료를 중단하자고 하셨고 한 달 치 심장약을 쥐어주시며 아이가 편하게 살 수 있도록 이제부터 돌봐주시는 일 밖에는 없다고 하셨단다.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동생은 아픈 엄마, 아픈 개까지 거둬가며 이리저리 동동거리며 뛰어다녔었다.


그리고 그제 난 한국으로 왔다.

와서 보니 금복이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았다.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서서 힘들게 숨을 쉬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고통이 심해 보였다.

동생이 잠들고 미국시간으로 아침 9시(새벽 1시)에 일어나서 금복이를 쓰다듬고 쓰다듬고.

그래도 해줄 만한 것이라고는 숨을 편히 쉴 수 있게 앞다리를 베개에 올려 주는 정도 밖에는 없었다.


폐에 물이 많이 차서 그랬을 것이다.

아침 6시 45분.

힘들게 숨을 몰아쉬던 금복이는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듯이 한 두 발짝 걸어서 내가 펴놓은 요가매트에

털썩 누웠다.


그리고는 미세한 경련을 한두 번 하고는

편한 얼굴로 대 여섯 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기특한 녀석.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느라 힘들게 하루를 기다렸나 보다.

Cross the Rainbow bridge

우리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라고 하는 표현은 영어에서 왔다. 반려동물이 죽으면 이 표현을 쓴다.


슬픔의 과정

심리학에서는 애도(Grief)에는 단계가 있다는 말을 한다. 부정 denial, 분노 anger, 타협 bargaining, 우울 depression, and 수용 acceptance. 요즘 심리학에서는 이 단계는 사람마다 다 다르며 꼭 이런 법칙을 따라서 애도를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다고 한다.


모두 이해는 하지만, 실제로도 그럴까?

내 직장 동료가 2년 전쯤 대학생이던 첫째 아이를 사고로 떠나보냈다. 그는 장례식이 끝나고 2주일 만에 회사로 돌아왔다. 우리 모두는 은근히 걱정을 시작했다. 좀 더 쉬어도 괜찮다는 회사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바로 일을 시작했고, 그이가 참여하는 회의에 들어가면 어찌할 줄을 몰랐다. 한마디라도 해야 하나? 모른 척해야 할까? 이메일이라도 보내야 할까?


결국 여러 가지 고민 끝에 다수는 아무런 말없이 그냥 일상 업무로 돌아간다. 나도 그랬다. 그이가 없을 때는 가끔, 아마 '부정'의 단계에 있지 않을까? 이런 추측들을 했다. 집에서는 매일밤 술 마시고 울면서 회사에 와서 안 그런 척하는 거 아니야? 많은 이야기들이 몇 달 오가다, 사람들의 관심은 사라졌다.


Life on Purpose라는 책의 작가 Victor Strecher는 첫째 딸을 잃고 방황한 경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의미를 되묻는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법, 자신만의 방법으로 시련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시간과 공간을 허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한다. 이것은 때로는 힘든 일을 당한 사람들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중요하다.


우리가 흔히 자식 잃은 부부는 헤어지기 마련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통계적으로 돈을 잃거나, 사업에서 망한 배우자 또는 직장을 잃거나 한쪽이 병이 생긴 부부들의 이혼율과 실제로 비슷하다고 한다.


물론 아이를 잃는 것과 돈을 잃는 것을 비교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우리가 '애도'를 생각할 때, 본인이 끔찍이 애지중지하던 무엇을 잃고 그 과정을 극복하는 일, 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 힘든 일을 맞닥뜨렸을 때 서로에게 마음을 다스릴만한 시간과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관계를 망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제 극복해나가고 있는데 계속해서 분노하는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그 예다.


그뿐인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다스리는 방식을 평가한다.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슬퍼하거나 다른 양으로 슬퍼하는 것에는 꼭 비난이 따른다.


몇 달 정도밖에 돌보지 않은 금복이를 잃고 감히 애도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송구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다. 그러나 살면서 누구나 배당받은 양의 슬픔, 애도를 경험하게 된다.


누구는 마음의 문을 닫고 사랑하는 사람의 숫자를 제안해서 닥쳐올 슬픔을 최소화한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아주 많은 사랑을 해서 슬픔을 비율을 낮춘다. 하나를 잃으면 남겨진 다섯을 보고 희망을 얻는 것이다.


어떤 방법이 더 나은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긴 내 삶이니 남을 많이 사랑하던, 나만 사랑하던

다 각자의 선택이다.


금복이와 함께 걷던 산책길에서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기꺼이 맞으며 혼자 산행을 한다.


금복이도 이제 좋은 곳에서 가슴을 활짝 펴고 숨을 크게 쉬며 벌판을 마음껏 달리는 상상을 해본다.

대문사진은 Photo by Alex Jackma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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