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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현 Apr 24. 2024

악마를 보았다면 그 악마는 누구일까?

사회생활을 하면 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우리의 기억에 남는 사람은 특별한 기억을 심어준 사람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 후배가 새로운 부서로 옮기게 되었다. 평소 친하게 지낸 사이라 옮긴 부서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부서의 다른 팀장인 자꾸 자기네 팀에 시비를 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후배는 그 팀장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는데 ‘사회생활을 하며 안 만나도 되는 사람을 만났구나’라는 생각과 ‘왜 저런 일을 당했을 때 우리는 분노를 할까’ 생각하게 되었다.


나 역시 비슷한 상황을 많이 겪었고 아직도 회사에는 나의 존재를 껄끄러워하는 선배들이나 후배들, 심지어? 동기들도 있다. ‘참 유별나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회사를 다니며 내가 쏟은 열정의 대가만큼 보상을 받은 적이 없었다. 열심히 하면 ‘부족하다’라는 말을 들었고 만반의 준비를 하면 ‘이건 중요하지 않은데.’라고 무시를 당했다. 그리고 뭐 하나 실수를 하면 ‘넌 왜 가만있지를 못하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사회생활에 벽을 쌓아가고 있었는데 그 벽이 너무 높아 나를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떠나가게 만들었다. 입구 없는 성벽이 생겨서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 벽을 허물고 있는 중이지만 내가 그 벽을 허물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한 가지 질문이었다. ‘저 사람들은 벌을 받아도 누구도 동정하거나 마음 아파해 주지 않는 순수한 ‘악’ 일까?’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는 괴롭히는 사람을 만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천벌을 받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을 것이다. 한걸을 더 나아가 ‘왜 나를 이토록 괴롭게 하는 것일까?’ 생각해 본 적도 있을 것이다. 우선 나는 그 사람들이 정말 미웠고 어떻게 하면 복수할 수 있을까 생각도 해보았는데 내가 얻은 결론은 그들은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런 사람들이었다. 쉬운 사람은 쉽게 보고 어려운 사람은 어렵게 보는 그런 사람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나의 감정을 쏟지 않기로 다짐을 했고 이후 ‘절대 악’은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절대 악’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를 괴롭게 만든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가득 차 있는 시기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 책은 많은 경우를 바탕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마음속의 ‘정의’가 얼마나 편향적인지 보여주는데 ‘악’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선 나를 괴롭게 한 ‘절대 악’은 지금 당장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이라 나에게 있어서는 ‘절대 악’ 일 수 있으나 직장 상사의 입장에서는 조용하고 일처리 잘하는 직원일 수 있고 가정에서는 훌륭한 가장이고 부모일 수 있다. 즉 그 사람은 그냥 나를 괴롭히는 직장동료 일 뿐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자신과 다른 기준의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직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 의사표현의 방식이 서투르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해서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결국 매우 못난 사람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왜 나를 괴롭힐까? 내가 그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나? 내 일처리가 별론가? 등 수만 가지 질문으로 나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 괴로움은 그 사람들을 ‘절대 악’으로 정해 놓고 나의 분노를 표출하는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부족함으로 가득 찬 부족하다고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나의 감정을 쏟아 내는 것은 나의 쓸모없는 감정 소비였다.  그들은 그저 부족함이 너무 커서 나에게 불편함을 주는 존재였다.


우리는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행동은 악한 행동이 아닐 것이라 판단하는데 나 역시 누군가에겐 ‘절대 악’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 역시 모자란 면이 많고 누구도 모자란 면을 알려주지 않는다. 나의 무지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감정적으로 힘든 상황을 주고 있을지 모를 일이고 그 무지함으로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고 있을지 모른다. 나를 괴롭힌 동료들 기준으로 나는 ‘절대 악’이었을 수 있다. 그래서 그렇게 미움을 받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호의가 상대에게는 큰 상처로 다가올 수 있고 나의 섣부른 판단이 어떤 사람에게 큰 피해를 끼칠 수 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선’과 절대 ‘악’은 지극히 개인의 감정이다.


나는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중에서 절대 악으로 생각한 사람이 생각나는데 이 사람이 얼마나 미웠는지 아직도 그 감정을 다 떨쳐내지 못한다. 그 사람은 지독히 위선적이며 자기 위주의 스타일로 업무를 처리한다. 그래서 협업을 할 경우 수정도 많고 원하는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이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을 미워했지만 정작 상사들이나 주변의 동기들은 그 사람을 좋아했다. 난 그 사람을 관찰했다. 어쩜 저렇게 사람이 형편없을까. 그러던 중 다른 동료가(그 사람이 아끼는 후배) 그 사람의 가족이야기를 들었다면 해주었다. 이야기 속의 그 사람은 가족을 아끼고 가족 걱정이 가득한 그저 대한민국의 가장이었다. 그때 다시 느꼈다. 아 무식한 사람은 있어도 악인은 없구나.


우리는 살면서 ‘절대 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사람은 직장 내 상사이거나 동기, 후배 일 수 있다. 그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악인이다. 하지만 타인에게 악인의 낙인을 찍는 나 역시 타인의 악인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과 악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고 나 스스로를 경계하고 돌아보는 것 외에는 별 다는 방법이 없다. 선과 악은 없다. 다만 그 중간에서 왔다 갔다 하는 존재만 있을 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의 기준을 돌아봐야 하고 유연한 사고를 가져야 한다. 그동안 ‘악’이라는 존재로 스스로를 힘들게 만든 사람이 있다면 나의 말이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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