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겐 작은거라도 숨기지 말아줘
모처럼 평화로운 오후. 오전엔 모 브랜드 주관으로 아이들과 화보를 찍었다. 아침 9시 인천까지 가야 했고 3시간이란 아이들에게 다소 긴 촬영이었는데 우리 딸들이 생각보다 훨씬 잘해줬다. 매일 아침 카메라 보고 같이 사진을 담은 게 아무래도 몸에 익은 듯했다. 자연스레 잘 웃고 놀다 보니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 이 참에 이 길로 더 가볼까.
고생했으니 보상을 해줘야지. 큰 마트에 들려 장난감을 사줬다. 너희 덕분에 돈도 벌었잖아. 집에 와선 주말에만 허용되는 아이패드를 손에 쥐어줬다. 그러니 새벽부터 애들 깨워 입혀 먹여 태워 인천까지 달려갔던 나에게도 일말의 휴식이 주어진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집. 나도 잠깐 침대에 몸을 누인다.
화장실을 가려 몸을 일으키려는데 온유가 내 방 앞에서 두리번거리다 본인방 골목으로 쓱 돌아 들어간다. 아빠가 자는지 본건가? 무릎반사처럼 피어오르는 아빠 미소로 슬며시 뭐 하고 있나 방을 들여다보는데, 자기 책상 서랍 가장 아래칸에서 무언가 꺼내더니 입에 집어넣는다. 응? 조용히 다가가 온유야 뭐해? 불렀다. 일순간 얼어붙은 온유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쳐다본다.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던 콧노래도 멈췄다.
젤리였다. 칸막이가 있어 12칸쯤으로 나뉘어 있는 납작한 약통에 곰젤리를 하나씩 넣어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뒀던 것 같다. 남아있는 개수를 보니 하루 이틀 솜씨가 아니다. 이 녀석이 언제부터. 난 어이가 없어 웃음이 배실배실 나왔다. 꾹 참고 다시 묻는다. 온유야 뭐해? 여전히 얼음 그 상태. 굳어서 아무 말이 없다.
얘도 참 어지간히 먹고 싶었나 봐. 내가 그렇게까지 못 먹게 했나.(그렇긴 했다) 다만 그럼에도 우리 사이에 숨겨서 뒤에서 몰래 하는 무언가의 일들이 ‘벌써’ 시작되는 건(온유는 6살이다) 너무 슬픈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온유에게 이렇게 말해줬다.
온유야 젤리를 숨겨서 아빠 몰래 먹었잖아. 이제 온유가 다음에 똑같이 해도 아빠는 알 방법이 없을지 몰라. 그래서 또 이렇게 하는 건 이제 온유 마음이야. 그런데 그렇게 계속하면 아빠는 조금 슬플 것 같아. 온유도 젤리 먹는 게 떳떳하지 않으니까 숨겨서 먹은 거지? 아빠한테 들키니 놀랬고? (끄덕끄덕) 작은 거지만 아빠를 속이는 건데 그럼 언젠가는 양치기 소년과 마을 사람처럼 서로를 믿을 수 없게 될지도 몰라. 그건 아빠도 온유도 너무 속상한 일 일 것 같아. 그렇지? 그러니 젤리가 먹고 싶으면 아빠한테 솔직히 얘기해줄래? 아빠가 매번 다 준다고 약속은 못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주려고 노력해볼게
어떻게 보면 되게 사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엔 젤리가 아닌 생각지 못 할 무언가를 숨기고 있게 될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도 어릴 때 그랬다. 그리고 크면서 이런 일들은 당연히 더 생기겠지. 다만 그런 시기가 벌써 왔고 이럴 때 어떻게 온유를 대할지 같이 고민할 너의 빈자리도 새삼, 다가왔다.
이후 2-3일이 지났다. 온유는 이제 젤리가 먹고 싶으면 와서 이야기를 한다. 아빠 곰젤리 몇 개만 주면 안 돼? 나는 몇 개씩 쥐어준다. 그리고 알아서 몇 개 또 더 주기도 한다. 그거 좀 먹는다고 뭐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이빨 더 열심히 닦아주지 뭐. 그렇게 작은 거라도 니 얘길 아빠에게 터놓고 할 수 있었으면. 그런 너와 나로 자랄 수 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