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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승렬 Aug 01. 2021

가장 어려운 그 순간에도 그 분이 곁에 계셨다

시한부 통보를 받던 날부터 3일의 기록

*2020년 10월 29일에서 31일까지 썼던 일기와 묵상에, 지금의 기억을 더해 정리한 글입니다.


2020년 10월 29일(목)

병원에서 최종 검사 결과를 들었다.


'우리도 너무 놀랬는데요. 효진씨 병이 생각보다 많이 진행되었어요. 지금 밝게 보이는 부분이 진행된 곳들인데, 여기 보면 간, 폐, 림프, 임파, 그리고 뼈도 척추와 골반 근처까지 많이 전이됐어요. 이 정도 진행되면 음, 평균 1-2년을 이야기해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평균이에요. 신약이 계속 개발되니 10년 이상 더 오래 사실 수도 있고, 평균보다 더 짧을 수도 있어요. 제가 치료 계획을 잘 짜 볼 테니 치료 바로 시작해서 열심히 받기로 해요.'


온몸의 피가 거꾸로 끓어올랐다. 둥둥 심장 소리가 귀로 들렸다. 어지러웠다. 현실이 아니길 바랬다. 아무런 기도도 나오지 않았다. 절망스러웠다. 고통스러웠고. 최악의 상황만 자꾸 스쳤다. 눈물만 줄줄 쏟아진다.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너는 무너졌다. '나 엄마한테 미안해서 어떻게 해. 우리 엄마 어떻게 해.' 너는 가장 먼저 어머니 걱정부터 했다. 나는 미안하지만 내 걱정이 먼저 앞섰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 나는.


하나님 왜요. 원망의 한 마디만 계속 나왔다. 남아서 살 내가 너무 불쌍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나 가족에게 크게 의지 않고 살아왔다. 나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들이라 해도 진짜 나를 꺼내는 게 참 어려웠다. 그래서 오랜 기간 차곡차곡 벽을 쌓았다. 늘 젠틀한 척 가면을 썼다. 그러다 나를 온전히 나답게, 내 전부를 꺼내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그렇게 그녀는 내 우주이자 전부가 됐다. 어쩌면 하나님이었다. 그런 존재가 사라진다는 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삶의 모든 의미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겨우 의지 할 곳을 찾고 안정을 찾은 내게 왜 이러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기적이지만, 너에게 조차 미안했지만, 사실 늘 그랬지만, 정말 나는 나 말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처형과 처남이 소식을 듣고 한 달음에 달려왔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괴로움 속에서도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나였으면 누나가 아팠다면, 부모님이 아팠다면 그 순간 모든 걸 두고 달려왔을까.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채 그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가까스로 하루를 마감했다.



2020년 10월 30일(금)

밤에 잠은 오더라. 너무 힘들었다. 안 울던 눈물을 흘리려니 그게 그렇게 괴로울 수 없었다. 체력 소비가 너무 컸던 것 같다. 금요일 하루는 다시 돌이켜 봐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침 식탁에서부터 울기 시작해 방에 틀어 박혀 주저앉은 채 계속 울었다. 기도도 안 됐고 말씀도 들어오지 않았다. 하나님이 나에게서 왜 효진이를 빼앗아 가시려는 지에 대한 생각만 계속했다.


나에게 효진이는 온 우주였다. 하나님이었다. 우상이었다. 그녀만 있으면 내가 비천해도, 못 입어도,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도 우리 둘만 있으면 살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했다. 그러다 그것이 어쩌면 착각이고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였을지 모른단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걸 아는 것과 현실의 잔인함은 별개였다. 가까스로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냈으나 현실이 도저히 감당이 안됐다. 세상을 살아갈 내 안의 모든 온기를 한 사람에게 받고 살았는데 그 줄기가 갑자기 잘려 나간 처참한 심정이었다.


점심 무렵 효진이 큰고모님이 찾아와 기도를 해주셨다. 기도 중 우리에게 있는 우상이 너무나 많다는 말씀이 폐부를 찔렀다. 배우자, 아이들, 돈, 권력, 지위. 특히 나에겐 효진이가 우상이었음을, 오전 내내 생각한 하나님의 자리에 효진이가 있었음을 보여주셨다. 그럼에도 가혹하단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아내를 온전히 사랑한 게 죄인가요. 전 이 온기를 이제 어디서 찾아야 하나요.


몸과 마음이 다 지쳐 잠시 쓰러져 잠들었다. 꿈이길 바랬다. 이 모든 것들이. 겨우 일어나 아이들을 데리러 갈 시간이 되어 차를 가지고 나왔다. 온유를 먼저 태우고 유하가 있는 어린이집으로 가는데 핸드폰에 저장해 놓고 들려주던 동화가 차 오디오를 통해 나왔다. 평소 여러 번 듣던 동화인데 배경음악이 찬송가 멜로디였다. 그동안은 정말 몰랐다. 지금 생각해도 어떤 동화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멜로디는 분명 아는 건데 가사가 거의 생각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엎드려', '성령이여' 두 구절 정도가 맴돌아 바로 찾아보니 찬송가 366장이었다. 가사를 보니 눈물이 왈칵 솟았다.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진리의 열쇠 내게 주사 참빛을 찾게 하소서.


막혀진 내 귀 여시사 주님의 귀한 음성을

이 귀로 밝히 들을 때에 내 기쁨 한량 없겠네.


봉해진 내 입 여시사 복음을 널리 전하고

차가운 내 맘 녹여주사 사랑을 하게 하소서.


어쩜 이렇게 내 상황에 정확한 가사인지. 상황이 아닌 주의 진리를 보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닫혀 있던 귀를 열어 주의 음성을 기쁨으로 듣고, 봉해진 입을 열어 주의 복음을 전하돼 차가운 마음을 녹일 사랑으로 전하라는 말씀. 이전에 아내와 내 아이들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세상의 그리고 내 주변의 누구에게도, 그들의 삶에도 전혀 관심이 없던 나에게, 다시금 도전이 되고, 현재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하는 말씀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런 상황에도 처음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다시 눈물이 흘렀다. 하루 종일 흘린 눈물과는 조금 다른 온도였다. 그리고 스쳐보낼 수도 있던 멜로디와 찬양에 이런 묵상을 할 수 있음이 또한 감사했다.



2020년 10월 31일(토)

어제 찬양을 통한 말씀을 받았음에도 아침부터 주어진 현실이 너무나 가혹하고 어렵게만 느껴졌다. 눈을 뜨자마자 눈물이 계속 흘렀다. 너를 바라 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오늘도 내 신세가 너무 불쌍했다. 누군가에게 연락해 위로받고 싶었는데 마음을 의지 할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아침을 먹으려 식탁에 앉았는데 갑자기 누나가 생각났다. 나의 누나. 어릴 때부터 그다지 사이가 좋진 않았다. 난 누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누나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무시하는 마음도 한켠에 있었다. 그럼에도 누나는 동생인 나를 늘 사랑했다. 나는 때론 그 마음조차 싫었다. 순간 그게 그렇게 미안해져 왔다.


누나 내가 너무 힘들어. 근데 연락할 데가 누나밖에 안 떠오르더라. 미안해.


머릿속으로 카톡에 쓸 문장들을 만들어 놓으니 눈물만 났다. 하필 아침 메뉴가 고구마라 목이 더 메었다. 카톡을 보낼지 말지 결정도 못한 채 훌쩍거리는데, 거짓말처럼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너무 당황해서 전화를 받았는데 누나가 얘기 들었다며 오열을 한다. 나 또한 머리에 써둔 문장들을 힘겹게 울먹이며 얘기했다.


한편으로 내가 만약 매형이 아파 반대의 상황이었다 하면 난 누나에게 전화해 이렇게 진심으로 같이 울며 기도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봤다.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내 마음. 그게 현실의 나였다. 사람들에 대한 관심 없이 살아가는 내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너는 왜 내가 네게 준 많은 것들을 가지고 너의 아내만 바라보고 사니? 내게 소중한 수많은 생명들에 너도 같이 관심을 갖고 시선을 두고 살면 좋겠단다'


 _


이후 온유를 데리고 미리 예정되어 있던 집 근처 쿠키 만드는 클래스에 갔다. 온유를 데리고 나 혼자 걸어 다녀오려 했는데 효진이가 갑자기 산책을 원해 같이 걷게 됐다. 온유를 들여보내고 정말 우연히 처음 가보는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냅킨에 알 수 없는 불어 문장이 쓰여 있었는데 첫 단어가 JESUS로 시작하는 걸 우연히 보게 됐다. 어쩔까 잠시 고민하다 파파고로 번역을 돌렸다. 온전치 않은 번역 결과였지만 나오는 몇 개의 단어로 이 불어 문구가 마가복음 8장 25절이란 걸 알게 됐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막 8:25



예수님께서 벳새다 소경의 눈을 치료해주시는 말씀이었다. 특히 눈 위에 '다시' 안수하신다는 말씀이, 작년에 이은 두 번째 어려움을 겪게 된 우리에게 치료의 약속처럼 와닿았다. 아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시는구나, 우리에게 명확하게 주시는 말씀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큰 위로가 됐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마가복음 8장 25절 말씀은 아내의 두 번째 치료에 대한 게 아니라 나에게 주신 말씀이었음을. 전날 주신 찬양의 가사에서 '어두운 내 눈을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하셨던 것도, 전부 내게 주신 말씀이었다. 전 날의 찬양과 그 날의 말씀이 겹쳤다. 정말 치료가 필요했던 건 그녀의 몸이 아니라 사실은 나의 영과 마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세상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이 이 사건으로 인해 새롭게 보일 것에 대한, 지나고 보니 온전히 내게 주시는 말씀이었다.


진단을 받고 그렇게 3일의 시간이 지나갔다.


 

지난해 가을은 유독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이 나를 처절히 불안하게 만들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불렀던 찬양.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맹인과 진배없던 나의 시선. 여전히 때때로 잊고 살지만 진리를 보며 살자.



그리고 그날 쿠키 클래스에서의 예쁜 온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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