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감정이입의 힘
0. 콜센터 직원인 남편과 무명 만화가인 아내. 크게 내세울 건 없지만 부족할 것도 없던 그들의 일상에 금이 간다. 남편이 우울증에 걸린 것. 남편은 점점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고, 아내는 회사를 관두라고 말한다. 남편 대신 돈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아내는, 남편의 우울증 일기를 만화로 그리고 그 만화가 대박이 난다.
1. 위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나는 너무 나이브하다고 말할 것 같다. 영화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예측가능한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 일이 쉽나? 너무 판타지 아냐? 하지만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넷플릭스 <남편이 우울증에 걸렸어요>다.
2. 2011년 개봉작인 이 영화는 그 당시 일본 영화의 느낌을 한껏 가지고 있다. 어딘가 따뜻하고 잔잔하고, 일상적인. 도무지 큰 갈등과 영화적인 사건을 기대할 수 없는. 그러나 묘하게 사람의 눈길을 끄는. 그 힘이 뭘까? 아직 이야기를 공부 중인 나는 솔직히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에 폭풍과 소음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여백을 원하고, 여백이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이 영화는 여백의 미학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3. 여백은 무엇인가. 그것은 감정이입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남편 '츠레'는 매일같이 도시락을 싸고 요일마다 다른 색의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성실한 남자다. 직장에서도 고객 상담에 최선을 다하며 자신의 이름 철자에 집착을 보이는 예민한 남자기도 하다. 그는 매일같이 지옥철에 껴서 출근을 하고, 악성 고객의 집요한 민원에 시달린다. 평범한 일상이지만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스트레스가 비춰지고,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본다. 이를테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같은 것이다.
그는 여느 날처럼 도시락을 싸다가 전혀 도시락을 만들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는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그는 병원에 가서 우울증을 진단받는다. 그리고 영화는 우울증이 뭔지, 우울증의 증상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겨울밤의 일기처럼 그려낸다. 그 템포에는 자극이나 작위 따위는 없다. 가족과 이야기하고, 밥을 먹고, 길거리를 걷는 아주 평범한 일상들이 그려진다. 물론 영화적으로 미장센된 공간이 주는 아름다움과 평안이 담겨 있긴 하다. (이건 일본 영화들이 아주 잘하는 작업이고.) 그런데 이상하지. 별 일 없이 이 영화를 죽 보게 된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의 위안
4. 영화는 우울증에 걸린 남편을 위해 그를 편안하게 해주려는 아내의 노력으로도 채워진다. 아내는 깨지지 않았기 때문에 골동품 가게에서 살 수 있던 백 년된 유리병을 보며 '깨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교훈을 얻는다. 그러니까 '꼭 뭔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영화는 그 말을 반복한다.
그런 말은 언제 들어도 너무 달콤하다. 특히 요즘처럼 자기 착취적인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주식과 부동산 소득이 폭증하며 앉아서도 노동 소득이 추락하고, 가만히 있어도 거지가 된다는 말이 횡행하는 시대에, 코로나로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언제나 최선의 최대한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쓸모 없는 존재' 취급 당하는 시대에 말이다. 이미 '꼭 뭔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라는 말은 큰 인기를 얻은 바 있다. 벌써 수 년동안 베스트셀러 시장을 휩쓴 '~해도 괜찮아'류의 에세이들 말이다.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아, 열심히 살지 않아도 괜찮아... 영화는 우리보다 먼저 번아웃을 겪고, 우리보다 빨리 우울증을 사회적으로 받아들인 일본을 배경으로 이 메세지를 펼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현재진행중이다.
5. 그러니까 이 영화에는 공감할 여지가 다분히 있다. 우리는 이미 너무 지쳤고, 위로가 필요하므로. 우울증은 감기와 같은 거라서, 언제 어떻게 우리를 찾아올지 모르니까.
주인공은 호감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한편 주인공은 반드시 감정 이입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 감정이입이 될 만하다는 것은 대상이 '나와 같다'는 뜻이다. 관객은 주인공의 깊은 내면 속에서 자신과 주인공이 공유하고 있는 어떤 인간적인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관객이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관객과 이야기의 연결 관계가 단절된다.
-로버트 맥키 <STORY>
P.S 일본의 초대박 드라마인<한자와 나오키>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주인공으로 나오는 '사카이 마사토'가 우울증에 걸려 무기력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꽤나 새롭고 인상깊다. 너무 귀엽게만 보이는 미야자키 아오이와의 연기 합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 있는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