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로"가 없는 세상
단언하지 않는 어른, 그래서 뭐든 될 수 있는 어른
아빠가 다쳤다. 30년을 동고동락했던 피아노에 발등을 찍혔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틀린 말 하나 없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정말로 틀린 말 하나 없네.
68년생 원숭이띠 아빠를 보러 급하게 내려가던 버스 안에서 실없이 그런 생각들을 했다.
아빠는 30년차 조율사다. 첫 회사에서 만 3년을 꼬박 채우고 벌써 한 번의 이직을 한 나에게는 아주 먼 감각이다. 30년째 평생 같은 일을 한다는 것. 농부가 흙을 만진 만큼, 선생이 분필을 잡는 만큼, 의사가 사람 몸을 들여다 본 만큼, 아빠는 피아노를 만졌다. 베란다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피아노 부품들. 이따금 존재감을 풍기는 피아노 의자의 목재 냄새, 기름 냄새가 나는 연장들. 본가에서 자라는 동안 몇 번이고 만나던 풍경이다.
피아노를 열고 가르는 만큼, 그 안을 만져서 음을 맞추는 만큼, 피아노를 번쩍번쩍 드는 일도 조율사에겐 필요하다. 물론 전문 운반수 분들이 도와 주시긴 하지만. 가끔 아빠 일을 따라가서 구경할 때가 있었다. 무거운 피아노를 나르고 옮기는 것이 너무 위태로워서 걱정할 때마다,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아빠가 얼마나 프로인데, 아빠는 절대로 안 다쳐."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햇수로 독립 10년차, 사회생활 5년차. 흔히 말하는 아홉수의 골목에 선 올해,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한 질문이다.
"그러니까 절대로 같은 말 하지 말랬지."
수술 전 붕대에 칭칭 감긴 왼쪽 발을 번쩍 올려둔 채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아빠를 보자마자 대뜸 저렇게 소리를 질렀다. 예측할 수 없던 사고를 당한 아빠의 표정 역시 아직 황당하다. 30년차 운전사도 도로에선 사고를 당할 수 있다. 인생이란 그렇게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 그건 많은 것을 포함하겠고, 많은 것을 의미하겠고, 동시에 많은 것을 포함하지 않겠지만. 우선 지금 내가 생각하는 어른은 단언하지 않는 사람이다. 단정짓지 않는 사람.
불확실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삶에 이만한 확실은 없다. 이따금 문장 앞에 절대를 습관적으로 붙이던 스무살의 내가 부러워질 때가 있다. 그런 확신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아직 삶의 풍파를 겪기 전, 삶이 주는 허무한 수수께끼들을 풀기 전, 세상이 마법사가 손 안에 쥔 유리 구슬처럼 느껴지던 때에는, 그래 아주 배짱좋게 그런 말들을 했었다.
나는 절대로 그런 사람 안 만나. - 그 때 만나던 2년차 연인이 5년차 때 그런 남자가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하고.
우린 절대로 안 그래. - 관계의 끝이 처음과는 얼마나 다른 줄도 모르고, 새벽과 한낮 만큼이나.
그런 데를 왜 가? 그런 행동을 왜 해?절대 이해 못 해! - 삶이 내게 이렇게 굴 줄 모르고, 이렇게 예의없게 굴 줄 모르고.
그런 말들을 했었다. 빈도 부사에 불과한 절대를 수식어처럼 시도 때도 없이 했었다. 모든 말이 선언이 되고, 결연한 외침이 되어도 무서울 게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삶의 '풍파'는 청춘을 겸허하게 하고, 그 겸허는 "절대" 같은 말을 용납하지 않는다.
바람과 파도에는 어떠한 의도도 없다. 그저 불고 그저 친다. 예측할 수 있는 간격이나, 주기도 없다. 그저 불고, 그저 친다는 사실만이 확실하다. 인생의 풍파를 겪지 못 해서 그렇다는 꼰대들의 한줄평은 꽤나 인사이트 있는 것 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난 어른은 조금 시시해진다. 이 세상에서 주인공으로 써내려가겠다고 다짐했던 서사는 점점 줄어들고, 어디 엑스트라 자리로라도 서 있다면 용하다고 생각한다. 저 사람 왜 저래?분노 게이지가 차올랐다가도, 그래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기게 된다. 울고 웃게 하던 것도, 화나게 하고 발을 구르게 하던 것도, 또 다시 찾아오는 파도의 한 조각이 된다. 또 왔네, 또 가겠지. 확실한 자기 주장은 몸을 숨긴다. 점점 밋밋해진다. 목소리가 크지 않고, 표정이 없는 그런 어른. 겸허해진 건지, 체념한 건지 구분하기 힘든 어른.
"아빠 발이 나으면 가자, 싱가포르던 일본이던."
하지만 "절대로"가 없는 세상 속 어른이 재미없기만 한 건 아니다.
나는 아직 아빠와 해외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 처음엔 뭐라고 했었더라, 굳이 궁금하지 않다고 했나. 엄마와 나, 동생이 오사카 감상기를 잔뜩 늘어놨을 때에는, 비행기가 무섭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아빠는 국내여행으로도 충분한 사람이라 돈이 조금 아까울 것 같아, 라고 했다. 그래서 그 때는 아빠가 먼저 비행기 타자는 말을 할 일 같은 건 절대로 없을 줄 알았다.
절대로가 없는 세상 속 어른은 자유롭다.
난 곱창 절대 못 먹었어, 너네 아빠 만나서 변했지. 나 이런 데 절대 안 왔었는데, 나이 드니까 또 오게 되더라. 이런 옷을 입고 싶어질 줄 몰랐는데, 나 젊었을 적엔 꽃무늬 절대 쳐다도 안 봤어.
나보다 어른이 먼저 된 어른 선배들은 저런 감상평을 늘어놓는다. 그러니까, 너도 절대로 못 할 일 같은 건 없다고. 실제로 초보 어른으로 살아보니까 그렇다. 스무 살의 내가 상상도 못하던 나를 매일 만난다. 물론 그 와중에는 만나기 창피한 녀석도 있지만, 이게 나라고? 싶게 짜릿한 녀석도 있다.
더 수용적인 나, 더 받아들이는 나. 더 열린 나. 이해할 수 있는 삶이 많아져서 더 포용할 수 있는 나. 공감가는 생각이 많아져서 생각이 더 깊어진 나.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마음이 늘어나서 한층 성숙해진 나.
낯선 사람에게 쉽게 말을 거는 나, 생각보다 화끈한 도전도 해보는 나, 수영을 배우려는 나, 술을 곧잘 마시는 나, 너그러워진 나, 처음 가보는 곳이 많아지는 나, 때로는 경로를 이탈하는 나, 그래도 안 죽는다는 걸 아는 여유로워진 나.
세상일이 다 그렇듯 섭섭한 점이 있으면 좋은 점도 있다. 어른이 되는 일도 그런 것 같다. "절대로"가 없는 세상 속 나는 조금 시시해지고 밋밋해졌지만, 동시에 넓어지고 깊어졌다.
선배 어른이지만 여전히 아이 같은 원숭이 띠 남자와 개 띠 여자를 두고 다시 서울로 오는 길, 엄마 아빠의 건강만큼은 그래도 절대로 지키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