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하고 글을 쓴다는 것
나는 말을 하고 글을 쓴다.
나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내가 인식한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세상이 나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설명하고 싶어서, 내가 세상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기억하고 싶어서.
도구로서의 언어는 세상과 일대일 순서쌍을 이룬다. 물론 그 순서쌍이 완벽하진 못할지라도, 제법 정교하다.
마음을 표현하고, 생각을 전달하고, 중요한 발견을 기록하며 언어는 인류 문명 발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내왔다.
어려서부터 나는 이런 언어에 몰두하곤 했다. 표현하기 위한 순서쌍을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고, 더 적절하고 더 완벽한 대응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리고, 완벽한 대응을 넘어 일치를 이루는 것까지 가능하다고 믿었다.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안개 같은 감정이 단어 하나로 명료해질 때가 있으니까. 작가들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현실을, 세계보다 더 세계 같은 세계를 언어로 구축해내니까. 언어가 절대적인 <신>과 같은 존재로 느껴지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자라면서 이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여러 번 깨달았다. 우리는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다른 것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기본적인 사회적 합의가 있기에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합의를 바탕으로 한 추측일 뿐 완전한 이해는 아니었다.
내가 <너는 참 따뜻한 사람이야.>라고 말할 때와 그가 <너는 참 따뜻한 사람이야.>라고 말할 때 우리는 <따뜻함>이라는 단어에 공통적으로 내재되어있는 의미들을 읽는다. 하지만 나의 따뜻함과 그의 따뜻함은 같을 수 없다. 그 안에 흐르고 있는 추억, 느낌, 감정, 상황이 전부 다르니까.
언어가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또 있었다. 나는 거의 모든 것을 <언어>를 통해 기억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들은 언어로 기억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한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이름이 헷갈렸다. 성이 뭐였더라 -. 하지만 나는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고, 생생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녀와 우리에 관한 것들을. 그러나 나는 그 많은 것들을 제대로 명명할 수 없었다. 그녀의 이름, 우리가 함께 걸었던 길, 그녀의 어린 시절 별명같은 것들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언어>라고 착각했던 것이 우스웠다.
언어가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내가 우스워지는 순간은 때로는 벅차고 감동적이다.
그런 순간들을 이 곳, 대만에서 굉장히 많이 마주하고 있다. 모국어를 사용할 수 없는 이 곳에서는 더더욱 언어에 민감해진다. 모국어에 비해 순서쌍을 찾는 과정은 굉장히 어렵고 나의 자아는 한없이 축소된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세계가 제한되고, 나는 다시 유아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미묘하고 은근한 차이들을 표현하거나 이해할 수 없고, 답답해진다. 영어로 대화하던 친구와 중국어로 대화하는 순간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마주한 기분이고,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허상이 되는 것 같다. 이럴 때는 언어가 정말 다시 <신>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렇게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이일 때면 언어는 더욱 그 힘을 잃기도 한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눈빛이 있다. 말로는 표현 할 수 없는, 크게 다가오는 마음들이 있다. 사랑이 담뿍 담긴 감정들이 있고, 안심시켜주는 미소가 있다. 이런 순간은 정말 벅차고 감동적이다. 언어는 정말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사람과 세상이 진짜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낯선 나라에 살아보는 것은 이렇게 언어에 예민한 나에게 매일이 자극이다. (아주 재밌고 흥미로운 쪽으로)
그동안 기본적인 순서쌍을 공부하는데 급급했던 외국어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인 '시절'은 중국어 '时光'으로 가장 비슷하게 표현할 수 있는데, 이것이 가장 큰 예다. 시절보다 더욱 시절같지 않은가? 빛과 시간이 있던 순간들의 집합. 혹은 빛이 존재하지 않았던 순간들의 집합. 이것만큼 시절같은 단어가 또 어디 있을까.
또 요가 선생님께서 자신의 유연성에 관해 "时间给的", 직역하면 "시간이 준 것"이라고 표현하셨는데 그 순간 확 와닿았다. <꾸준한 연습을 오랜 시간 하다보면 누구나 할 수 있어요.>라는 설명보다 더 와닿았고, 더 문학적이었던 말!
마지막으로, 그동안 흔하게 써왔던 영어 인사. "My pleasure"
그간 그냥 흔한 인사치레, 형식적인 상투어, 외운 순서쌍 정도로 인식되던 문장이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상대를 돕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된다고 느낄 때, 이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기쁨인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에 저 말을 사용해보니 얼마나 느낌이 새롭던지!
이렇듯 언어 덕후, 텍스트 덕후인 나에게 대만 생활은 여러모로 참 행복한 시간이다.
언어가 쌓여 우리가 된 건지, 우리가 쌓여 언어가 된 건지.
우리가 쌓여 문학이 된 건지, 문학이 쌓여 우리가 된 건지.
하루에도 수백번, 언어가 <신>이라고 굳게 믿었다가 금새 한낱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