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산후조리하는 평범한 이야기
이전 회사를 다닐 때, 언니들과 금기시했던 말이 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내가 그거 아니라고 했잖아.”
“내가 말했었잖아.”
그놈의 아이 톨쥬. 우리는 그 말들이 주는 오만함에 치를 떨었다.
당시 즐겨 듣던 라디오에서 “그런 말은 법적으로 금지해야 한다.”라고 까지 하는 걸로 보아 우리만 싫어하는 말은 아니었던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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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을 한 후 조리원이 아닌 집에서 산후조리를 했다. 조리원을 안 가는 것이 이렇게나 주변을 시끄럽게 할 줄 몰랐다.
주변 지인들의 반대는 물론이고 친정, 시댁 어머니들로부터 출산 직전까지 돌아가며 설득 전화가 왔다. 친하지 않은 지인들 사이에서도 ‘산후조리원을 안 가는 이해가 안 되는 애’로 입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때도, 지금도
이게 이럴 일인가 싶다.
우리 부부는 지금 셰어하우스에 살며, 공동 육아를 하고 있다. 함께 사는 6명의 친구들을 비롯하여 가까운 동네에 사는 친구들 모두 산후조리원을 가지 않았다. 대신 그들도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산후조리를 했다. 그러니까 최대 어른 8명에 아이 2명까지 총 10명이 한 집에서 함께 지낸 적도 있었다.
우리 아이는 이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는 네 번째 아이다.
물론 네 번째 아이라고 해도 쉽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산모와 아이의 상태 모두 매번 같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같다고 해도…. 신생아를 돌보는 건 정말 엄청난 일이다.
(지금도 미쳐버릴 것 같아 오토바이 타고 뛰쳐나와 동네 카페에서 글을 쓴다.)
아이를 키워본 부모들, 특히 여자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조리원에 있는 기간이 천국이고 그때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때라고. 아이를 키워본 경험도 없으면서 그 힘든 시간을 어떻게 견딜 거냐고. 나중에 후회한다고.
그래서 실제로 어땠느냐면…….
나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신없이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씻겨주고 나니 50여 일이 지나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 선택지 중에서 우리 아이를 직접 돌보는 것을 선택했고, 집에서 할 수 있는 산후조리를 성실하게 했고, 그 덕에 조금 더 빨리 아이를 이해하고 더 많이 안아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애가 조금 더 건강하고, 차분하며 졸릴 때도 보채지 않고 스르륵 잠이 든다.
는 뻥이고, 그냥 똑같다. 똑같이 미친 듯이 힘들다. 졸리면 자면 되지 도대체 왜 자지러지게 우는지 모르겠고, 150ml를 먹고도 굶은 아이처럼 울 때는 나도 울고 싶어 진다.
가끔은 조리원을 갈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동시에 역시 닥치면 하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한다. 어쨌든 이런 유난스러운(사실 이게 유난스러운지도 모르겠지만) 결정을 하다 보면 주변 사람들이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 나랑 친해서 반대하는 사람들.
- 나랑 안 친하지만 반대하는 사람들.
- 나랑 친해서 응원하는 사람들.
사실 응원이든 반대든 의심이든 설득이든 애정의 형태를 한 모든 말들을 진심으로 경청하고 고맙게 생각한다. 어떤 말이든 쉽게 오지랖으로 치부하기엔 따뜻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우리의 우리의 신념을 방패 삼아 모두를 설득시키고 만족시킬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선택지 중에서 우리의 소신을 가지고 그 소신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다시 시간이 돌아와도 그렇게 할 것이고, 그 결정으로 인한 책임도 당연히 꾸역꾸역 질 수밖에. 후회되는 순간도 분명히 있고, 생각지 못한 어려움도 겪지만 그렇다고 ‘괜히 했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한 배움과 바꿀 수 없는 행복이 있고, 참고 하루하루 걷다 보면 보고자 했던 풍경을 기어이 보게 되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해서 나의 결정을 응원하는 사람들.
내가 아무리 유별난 결정을 해도 ‘응 그렇구나. 그것도 좋아 보인다.’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은 내가 후회를 해도 ‘거봐 내가 그럴 줄 알았어.’라고 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처럼 이 사람들을 곁에 오래 두고 싶다. 오래오래 두고 그들을 닮아가고 싶다.
그러면 내가 걸어가는 길을 같이 걷지 않아도 같이 걷는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