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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금술 스토리텔러 Dec 19. 2022

이렇게 멋진 메시의 '라스트 댄스'

아르헨티나는 축구의 신 메시와 에바(EVA), 그리고 탱고가 있는 나라

축알못(축구에 대해 알지 못하는)의 응원과 간절함은 통했다

2022.12. 19. 카타르 월드컵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Argentina)와 프랑스 경기는 3:3 동점골로 연장 전후반전이 끝났고 승부차기에서 4:2로 프랑스를 누르고 승리했다. 개인적으로 우승의 비결은 아르헨티나의 간절함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20년 전에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 진출 이후 사는 것에 치여서 축구에 대한 관심을 접으면서 '축알못 1인'에 합류했다. 하지만 유럽에 사는 덕분으로 아주 좋은 시간대에 경기를 시청하게 되면서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시작은 우리나라가 다시 16강에 들어갈 수 있는지 포르투갈과 경기를 하게 되면 누가 이길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선수들은 몸값 높은 유럽 선수들을 상대로 너무 잘 싸웠다.  


남은 월드컵 경기를 흥미롭게 보기 위해서 외국 선수들을 억지로라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다 파리의 생제르맹의 골키퍼 요리스도 알게 되었고 메시도 알게 되었다. 축구 전문가들은 결승전은 프랑스와 아르헨티나가 붙을 것이고, 메시의 '라스트 댄스'가 있을 예정이며, 음바페와 메시의 한판 승부를 점치는 것을 듣게 되었는데 더욱 흥미롭게 들렸다. 


사실 메시는 1년 전에 '바르셀로나 후니또 HUNITO' 채널에서 '메시'의 기자회견 영상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되었다. 멋진 슈트를 입은 영화배우처럼 생긴 사람이 축구선수라고 했다. 남자가 흘리는 눈물이라니! 마음이 쓰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참석한 사람들은 아주 오래도록 소리 없이 박수소리로만 그에 대한 존중과 감사를 표현을 하는 장면은 압도적인 감명을 주었다. 


Where is Messi?

그리고 이번에 메시가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반가워 그가 경기하는 날에는 TV 앞에 앉아서 "메시! 메시!"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 메시에 대한 관심으로 그의 기사를 찾아보다가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라는 사실과 함께 그의 팔에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것을 보고 좀 놀랐다. 아무리 좋아도 몸에 새기고 싶을 만큼이라는 것은 독실하다는 의미일 텐데 의아하기까지 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표정에는 집착이나 독점욕보다 자유롭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선하게 웃는 미소와 함께 그의 겸손한 태도는 좋은 인상을 갖게 했다. 경쟁적으로 뛰어야 하는 선수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소탈해 보였다. 물론 최우승에 대한 간절함만은 최고로 느껴졌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교체 선수들이 입장할 때 보인 조금 특이한 행동에 눈길이 갔다. 선수들은 교체될 때마다 하나같이 성호를 그으며 등장했는데 우승에 대한 간절함이 느껴졌다. 그 간절함이 승리를 가져올 것이라고 감히 우승을 예측해 보았었다. 그 간절함이 통했을까. 결국 최종 우승자는 아르헨티나가 되었다. 이 경기의 주인공인 주장 리오넬 메시는 아르헨티나에 36년 만에 월드컵 우승컵을 선물하면서 화려한 '라스트 댄스'를 장식했다.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아르헨티나가 첫 경기를 치른 후에 메시의 활약이 미미해서 모두들 "Where is Messi?"라며 조롱했던 기억이 있어서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한마음으로 응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4년 전 부에노스아이레스 산 텔모 거리를 행진하던 사람들에게서 느꼈던 감정이 오버랩되었다. 


응? 그런데 응원하는 저들과 북소리에 맞춰 거리를 걷고, 탱고를 추던 이들에게서 동일한 느낌이 느껴지네. 그래 맞아 저들은 단결심이 있어. 저들은 모두 그 아르헨티나 사람들이야. 아, 나는 저들을 좋아하고 있었던 거네. 묘하게 그날 그 밤의 경험이 마법처럼 생생히 느껴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기분 좋은 추억 덕분에 나는 아르헨티나를 향한 응원의 박수를 아낌없이 보냈다. 그리고 그들이 우승자가 되었으니 오늘은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은 밤이다.(이곳 포르투갈은 아직 밤) 


날 위해 울지 마, 아르헨티나 Don't cry for me, Argentina

이번 월드컵에서 최종 승자가 된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최남단부에 위치하며, 브라질에 버금가는 넓은 국토를 가진 남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이다. 수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인데, 스페인어로 좋은 공기라는 뜻이다. 나를 아르헨티나로 이끈 것은 "Don't cry for me, Argentina"라는 노래와 그 노래의 주인공 에바(EVA)때문이었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가끔씩 "돈 크라이 포 미 알젠티나~~ "를 흥얼거리며 부르곤 했었다. 그러다가 비행기에서 만난 남자와 함께 살기 위해 브라질로 가게 되었다. 워낙 한국에서 브라질은 먼 곳이라 도중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2주일가량을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참 좋은 느낌을 받았었다. 그 기억 몇 편은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냉정과 열정사이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탱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남미 아르헨티나의 활기찬 문화와 정서를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 바로 '산 텔모 거리(Feira de San Telmo)다. 이 거리에는 런던의 노팅힐처럼 스트릿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온갖 신기한 것들을 즐비하게 차려두고 여행자들의 호기심을 유도하고, 생동감 넘치는 자유로운 분위기는 그들을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들뜨게 만든다. 길가 한쪽에 자리를 잡은 악사의 손을 통해 터트려지는 소리는 무언가 스멀스멀 올라오게 만들었고, 이국적인 남미에 와 있다는 것을 단박에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나는 이곳에서 예기치 않게 특별한 경험을 했다. 어디선가 “툭툭 투두둑 툭툭 투두둑”. 스타카토의 힘찬 북소리가 들렸는데 "어! 이게 무슨 소리야?"라는 물음과 동시에 그 소리는 순식간에 길을 걷는 군중들을 집중시켰다. 누구 한 사람 목소리를 내지 않는데 그 리듬 안에는 어떤 메시지가 있는 것 같았다. 나를 제외한 군중들은 그것을 감지했고 그런 분위기가 익숙한 듯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심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앞에 선 한 사람이 독특한 리듬을 알리는 짧은 외마디를 했는데 그것만 듣고도 군중들은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며 행진했다. 모두 처음 만나는 것 같은데 이질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경험한 세상에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며 아무 말 대잔치를 하고 있는데, 그곳의 수준은 너무 높았고 환상적으로 다가왔다. 


침묵 속에 담긴 저 군중들의 외침은 무엇일까? 
무엇이 저들을 깊은 열망의 세계로 결집시키는가?
강한 의문이 들었다.

이번에는 길이 바뀌면서 조금 전에 타악기 소리와는 전혀 다른 곡선의 선율이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간 곳에는 상당히 넓은 공원이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거리에서 행진하던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주었다. 직선과 곡선처럼 서로 다른 개성이 한 공간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토요일 늦은 오후에 삼삼오오 모여드는 사람들은 족히 수백 명은 되어 보였다. 역시 이번에도 행사의 주체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자유로움 안에 질서가 존재했는데 탱고를 즐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흐름을 따라 ‘지금 여기’에  존재했고 휠체어를 탄 이도 섞여 있었는데 모두들 밤의 주인공들처럼 멋지고 근사하게 보였다. 싱글로 왔더라도 문제없어 보였고 즉석에서 세상에 온갖 커플이 탄생되었다. 

인상적인 것은 절대로 춤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을 것처럼 단호해 보이는 사람들, 탈무드를 공부할 것만 같은 랍비처럼 보이는 이들, 독일인처럼 약간 경직된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시작을 알리는 듯한 선율이 흐르자 사람들은 원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들의 춤 실력을 모두 가린 채로 약간 긴장한 모습으로 마주하며 선율이 시작되니 오래도록 사귄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둥근 원을 그리며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탱고의 유래는 1880년대 무렵에 이곳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하층민 지역에서 탄생했고 4분의 2박자 단순 비트에 악센트를 강조한 리듬과 끊어질 듯 이어지는 곡선의 절묘한 선율의 조화가 이색적이다. 탱고는 노동자들의 감추어두었던 밑바닥의 뜨겁고 깊은 열정에 불꽃을 끌어당기고 뜨겁게 타오르면서 신분과 현실의 고단함을 잊게 만들어주니 어찌 아니 환영받지 않을 수 있을까. 초창기 미국의 재즈음악처럼. 


탱고가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시시각각 변할 수 있는 내밀한 감정을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해 길을 따라 흐르는 물처럼 생생히 표현되기 때문일 것이다. 고정된 시선으로는 절대 예측할 수 없다. 마음을 달래주는가 하면 거리를 두어 스스로 선택하게 하거나, 절도 있는 동작으로 냉정함을 표현하는가 하면, 한 손으로 부드럽게 상대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으며 농축된 열정을 표현할 때는 "어쩌라고"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밀당을 하는 듯했다. 관능적이고 에로틱한 육체를 탐닉하는가 하면, 호흡을 마주하고 있는 상대에게 온전히 몰입하는 태도는 숭고함마저 들게 했다. 냉혹한 겨울과 뜨거운 여름이 교차하는 것처럼 무의식의 욕망과 억압된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은 애절하게 끊어질 듯 이어지고를 반복하면서 ‘기쁨, 분노, 사랑, 즐거움이라는 제 각기 다른 주제를 담은 채로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프레이즈’의 향연처럼 보였다.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좌절의 한숨이 빛나는 희망의 옷을 입고 춤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어져야 될 운명의 주인공들이 "나 여기에서 당신의 마음을 듣고 응답하기 위하여 오롯이 당신 앞에 서 있어요."라는 애절한 눈빛으로 상대를 응시하며 무언의 호흡을 읽으려는 진정 어린 태도는 열망의 혼연일체가 되어 환상적인 호흡을 이루어냈다. 지금 서로 맞잡은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고 애틋하게 여겨졌다. 때론 끈적이며 흐느적거리는 동작으로 밀고 들어오는 상대를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몸을 뒤로 젖혀 수용하지만, 돌아설 때는 절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포옹을 하더라도 중심을 잃지 않는 모습은 높은 음자리표의 중심에 선 직선처럼 보였고 부드러운 분위기는 곡선을 닮았다. 나는 탱고에 관해서 무지했고 용기가 없어 함께 어우러져 춤출 수 없었으나 지켜보는 내내 경탄했다. 예술적인 작품을 감상하는 듯 머리는 맑아졌고 복잡한 생각은 자동으로 정지되었으니 감정도 고요해졌다. 희롱이라곤 1도 없는 그들의 탱고를 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고 마침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탱고는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포용의 스토리를 그들만의 ‘특별한 공간’에서 확장시켜나갔다. 그것은 인간 안의 신성함을 일깨우고 존엄성을 배우는 수업시간처럼 느껴졌다. 그저 말초 감각의 유희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경솔함이 부끄러워졌다. 


둘이 하나가 되어 춤출 때는 누구보다 뜨겁지만, 헤어져야 할 때는 미련 없이 헤어진다. 한 사람의 짝을 지속적으로 고집할 수 없고, 임의로 선택할 수도 없다. 흐름대로 자기 앞에 오는 짝과 호흡을 맞춰야 한다. 차별적 선택은 없으며, 그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심이 없으면 함께 호흡할 수 없다. 편견으로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내 앞에 누가 서든 그는 고귀한 존재로 만나니 그들은  빠르게 하나가 되고, 단박에 평화를 이뤄내는 듯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여인의 다리'

비로소 그날 밤 나는 또 하나의 선입견을 깨고 더 큰 원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둘이 하나가 되고, 넷이 하나가 되고, 열명도 하나가 되고, 수십 명, 수 백 명 이어도 하나가 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각기 자신의 욕구에 충실해도 전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파괴란 없었다. 도대체 어떤 힘이 이렇게 수많은 사람을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일까? 혹시 그 원동력이 인간이 지닌 숭고한 사랑은 아닐지 오래도록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탱고는 정신과 감성 사이와 냉정과 열정사이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리미널리티(Liminality) 예술의 백미였다. 


탱고 파티의 감동을 한가득 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거리를 걷다가 만난 바이올렛의 '여인의 다리. 그것은 탱고만큼 신비롭게 보였다. 밤공기 탓일까.  더욱 매혹적으로 느끼게 만들어주었다.




소문과 기록을 넘어 진실을 만나다


EVA는 1919년 5월 7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마을에서 5남매 중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역의 영주였지만, 내연 관계에서 태어난 터라 빈민층의 삶을 숙명으로 알고 살았다. 그러나 그녀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어린 EVA는 지긋지긋하게 가난한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유명한 배우가 되기를 결심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탈출했고 무대, 라디오 및 영화배우로 경력을 쌓던 중에 산 후안에서 발생한 지진의 희생자(6천 명)를 돕기 위한 자선행사에서 후안 페론 대령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후안 대령의 나이는 마흔여덟 살로 두 사람은 24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1년 후, 페론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에바는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페론의 아버지는 유명한 의사였지만 어머니는 원주민이었던 관계로 그 역시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소외받는 계층으로 살았었다. 그들 부부는 자연스레 사각지대에 사람들을 향한 연민의 감정으로 공감대가 생겼다. 특히 에바는 부자들을 병적으로 싫어했고 노동자들의 삶을 대변했다. 그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었지만 기득권층과 보수주의자들은 노동자 계급을 자신들의 부를 축 낼 존재에 불과하다고 경계하고 있던 터, 페론 대통령 부부를 공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VA는 비난에 신경 쓰지 않고 새벽 일곱 시부터 업무를 시작해 밤늦게까지 사무실을 지켰으며 하루에 20시간 이상을 사무실에서 보내는 날들도 허다했다. 그녀는 한센 씨 병이나 매독으로 피부에 진물이 흐르는 사람들의 손을 직접 잡고 위로하면서 키스를 하는 등, 차별 없이 모두를 껴안으려고 했다. 점차 독실한 신앙과 맞물려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를 '성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악성 종양으로 1952년 7월 26일 33세의 나이로 세상과 이별하게 되었다. 그녀의 죽음은 일순간에 아르헨티나의 시간을 정지시켰고 큰 슬픔에 빠지게 했다. 크나큰 슬픔이었다. 


페론이 대통령으로 있던 10년 동안 잘살던 나라였는데 그녀의 죽음 이후,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독재정권(호르헤 비델라)이 들어서면서 경제가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했다. 군부독재정권은 페론 부부의 색깔을 지우기에 안간힘을 썼고, 온갖 누명을 씌웠다. 이들은 페론 부부가 수억 달러를 스위스 은행에 예치해 놓았다고 했고 그들의 포퓰리즘으로 인해 아르헨티나 경제가 망가지고 그녀를 모방한 남미 국가들이 모두 망가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제학적인 통계자료는 후안 페론이 집권했던 10년 동안 130퍼센트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고 적혀있다. 실질적인 평균 임금은 세 배 이상 올랐고 애당초 스위스 은행의 계좌 따위는 있지도 않았으며, 그저 그녀가 사망하기 전에 쓴 책의 인세 수입으로 망명 16년 동안 근근이 살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성난 군중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축구 정치를 했다는 얘기도 있다. 아르헨티나 경제를 망친 원흉은 페론 정권이 아니라 그 정권을 무너뜨린 군부 독재 정권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하루 밤에 완성된 신데렐라가 아니라, 어렵고 힘겨운 시간을 견뎌낸 인간승리의 주인공이었다. 그녀를 기념하는 박물관에서 장례식을 담은 영상을 보았다. 수많은 군중들은 끊임없이 환호하고 꽃을 던지고 함께 울며 그녀를 애도했다. 흑백 영상은 끝없이 돌아가고 있었는데 세상 어느 나라 대통령의 부인이 이렇게 존경을 받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아름답게 살다가 갈 수 있는 것인지 경탄하고 도전받았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에서 구입한 그녀의 전기가 실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직접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가보지 않았다면 나도 소문을 믿었을 것이다. 소문과 역사적 사실이 틀린 경우는 참 많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이야기에 끌리고 상업은 사람들의 관심사를 좇아가게 되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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