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여름 | 런던맑음
회사 입사 후 지난 4년간, 나의 꾸준한 소망은 바로 낮잠이었다. 거창하진 않다. 점심을 먹고 잠깐 눈을 붙이는 정도의 가벼운 낮잠. 언뜻 생각하면 참 소박하고 쉬운 소망 같지만, 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알 거다. 생각보다 어렵단 걸. 잠을 잘 시간도 없거니와 잘만한 공간도 마땅치 않다. 학생 때는 공강이나 점심시간에 짬짬이 눈을 붙이곤 했는데, 직장인이 되니 그게 참 어렵더라.
이제와 고백하건대, 정말 잠을 참기 힘들면 화장실로 갔다. 좌변기에 앉아서라도 자지 않으면 못 버틸 것 같은 순간이 몇 번 있었고, 겨우 10분을 자고 나와선 이마에 난 자국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갓 입사한 신입사원에겐 그나마 화장실 좌변기가 유일한 안식처였던 셈인데, 재밌는 건 가끔 옆 칸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다는 것! 나 말고도 어떤 불쌍한 어린 양이 화장실에서 자나 싶어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찌 보면 낮잠 자려고 런던에 왔나 싶을 정도로 나는 지금 낮잠을 실컷 즐기고 있다. 소망을 이루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유일한 일과인 오전 3시간 영어수업이 끝나면, 샌드위치를 사들고 근처 공원에 가기만 하면 되니까. 아무 데나 자리를 펼치고 점심을 천천히 먹고는 누워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다가 스르르 잠에 들면… 바로 소원 성취다!
사람들 시선은 신경 쓰지 말자. 모두가 하나같이 누워있으니까. 당신이 뭘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공원에 와서 잘 쉬다 가면 그걸로 된 거다. 이게 바로 런던의 공원 문화다.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런던이 자랑해마지 않는.
런던에는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공원들이 즐비하다. 제일 크다는 Hyde Park부터 시작해서 Green Park, St. James' Park, Regent Park, Hampstead Heath Park 같은 유명한 공원뿐만 아니라 동네 곳곳마다 이름 모를 공원들이 수두룩하다. 그것도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로 말이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이 정도 규모를 과연 '공원'이라는 소박한 이름으로 불러도 되나? 하지만 그건 땅덩어리 좁은 한국에서 서울 토박이로 자란 내 기준이었고, 영국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거였다. '크고 넓고 넉넉한 자연'이 이들에게는 공원이었다. 적어도 대도시는 이래야 한다. 나무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숨 쉴 공간이 필요하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곳, 쉬기 힘든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곳. 그게 바로 공원의 존재 이유다.
서울에 있는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서울은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 공원은커녕 작은 녹지도 비싼 땅값 때문에 넉넉하지 못한 서울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이곳 런던에 와서야 나는 비로소 제대로 숨 쉬고 있는듯하다. 나는 어제는 Hyde Park, 오늘은 Regent Park에서 평소의 소원대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낮잠, 정말 별 거 아닌데 왜 이리 행복하지?
자발적 백수로서 돈 한 푼 안 벌고 소득수준 하위 1%이겠지만, 이곳 런던에 와서 행복수준은 상위 1%라고 자신한다. 배 아파하지 마라. 당신도 할 수 있는 거다. 회사 그만두고 쉴 용기가 없다면 어떻게든 그곳에서 행복해져라. 남 신경쓰고 투정만 하기엔 시간이 없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그리스인 조르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묘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