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장.
우렁찬 벨소리와 함께 스마트폰이 울어댔다. 준영은 화면의 발신인을 확인했다.
‘최선경.’
‘무슨 일이지?’
전화를 받은 준영의 목소리는 그리 좋지 않았다.
“선경아, 무슨 일이냐?”
“오빠, 지금 당장 만나야겠어.”
선경의 목소리는 다급하기만 했다. 그 목소리에서 뭔가 절박함을 느낀 준영의 마음 속에 안 좋은 느낌이 물결쳤다.
“선경아, 말을 해야지 내가 알지. 무슨 일이야? 그리고 지금 몇 시냐?”
“지금 시간이 문제야. 당장 만나서 얘기해. 난 지금도 심장이 떨리니까.”
“뭐? 심장?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다 알면서 지금 딴소리 할 거야?”
선경은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고, 준영은 당황할대로 당황했다.
“너……. 무슨 일 있구나?”
“흑흑…….”
선경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준영은 선경의 울음 소리를 듣자, 혹시 진영과의 일인가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러나 그런 얘기를 전화로 할 수는 없었다.
“그래, 내가 지금 갈께.”
선경은 집 앞 빌라촌의 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눈이 빨간 채, 고개를 푹 숙였다가 다시 천장을 보았다가 하였으나, 놀란 가슴은 아직까지도 진정이 될 기미가 없었다.
카페의 문이 열리며 준영이 황급히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다가 선경을 발견하곤, 곧장 다가오더니, 선경의 앞에 앉았다.
선경은 고개를 들어 준영의 얼굴을 보다가, 다시 손목을 보았다. 역시 시계가 없다.
“오빠, 내가 준 시계 어떻게 했어?”
준영은 자신의 손목을 보더니, 이내 선경의 말을 알아차렸다.
“그 시계는 이제 세상에 없다.”
“왜?”
“내가 버렸거든.”
선경은 준영의 말에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시계는 진영이 가지고 있었고, 진영은 이 모든 내막에 대하여 준영도 알고 있다고 했었는데…….
“어디다?”
“빌라 쓰레기통. 아마 아줌마가 버렸을 거야. 근데 그거 물어볼라고 불렀냐?”
“오빠, 그 시계가 어떤 시곈줄 알아? 그거 우리 약속의 징표잖아.”
준영은 선경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선경아, 내 말 잘 들어. 그건 어릴 때 했던 약속이었어. 이제 우리는 어른이야.”
“오빠, 우리 절대 헤어지지 않기로 했잖아. 그 시계를 걸고.”
준영은 선경이 답답하기만 했다. 선경은 아직도 어릴 때의 꿈 속에 살고 있었다.
“선경아, 그래. 우리는 절대 안 헤어져.”
“우리, 결혼도 생각했잖아.”
선경은 막무가내로 준영을 몰아세웠고, 그럴수록 준영은 더욱 답답하기만 했다.
“선경아, 그건 말도 안 돼. 그건 너도 잘 알잖아. 헤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결혼한다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야.”
“어떻게 다른데?”
“아무리 그렇게 우겨도 안 되는 건 안 돼.”
“그래서 시계를 버렸어? 그런 거야? 말을 해 봐.”
“선경아, 너, 나한테 무슨 말을 듣고 싶냐?”
선경은 준영을 노려보았다.
“진실, 나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어.”
준영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나, 여자 생겼다.”
선경의 눈이 커지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갑자기 손가락을 입으로 꽉 물었다. 뭔가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참는 표정이다.
“누구야?”
“선경아, 나, 너를 좋아해. 그리고 절대 안 헤어져. 우리는 죽을 때까지 볼 거야. 남매니까.”
“누구냐니까?”
“너도 한 번 보았을 거야. 손혜정이라고…….”
선경은 어이가 없었다.
“오빠, 그 여자는 진영 오빠의……. 뭐? 그럼 둘이서 여자를 바꾼 거야?”
이번에는 준영이 깜짝 놀랐다.
“바꾸다니……. 너, 진영이하고 무슨 일 있었구나?”
선경은 진영이 거짓말한 것을 알아챘다. 준영은 아무 것도 모른다. 여기서 솔직히 진영과 호텔 방에 갔었다는, 그리고 거기서 뛰쳐 나왔다는 걸, 말하고도 싶은 선경이었으나, 그 후에 일어날 파장에 대해서는 감당이 안 되었다.
‘아무 얘기도 하지 말자.’
“오빤, 나를 정리하고 그 여자에게로 가는 거구나. 진영 오빠도 그 여자를 버렸고. 참 그 여자도 기구하다. 나도 참 불쌍한 년이고. 세상 남자들, 다 그렇고 그런 거구나.”
준영은 선경의 신랄한 비판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 *
손혜정은 폰이 울리자, 메시지를 열었다.
[지금 만날 수 있을까요? 최선경.]
“무슨 일이지? 지금 열 두 시가 넘어가는데…….”
혜정은 찍혀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자마자 바로 최선경이 받았다.
“선경 씨, 이 밤에 무슨 일이세요?”
“언니, 지금 당장 만나야겠어요.”
“왜요? 선경 씨.”
“이진영 씨 문제로…….”
“예? 진영 씨? 무슨 일 났어요?”
“예. 언니. 무슨 일이 났어요. 그것도 아주 큰 일이.”
혜정은 빌라 경비실 앞에 서 있었다. 저쪽 골목에서 택시 한 대가 빠르게 미끄러져 들어오더니, 경비실 앞에서 바로 멈춰 섰다. 택시 문이 열리며, 선경이 바쁘게 뛰쳐 나왔다.
“언니!”
선경이 혜정의 품에 들어오면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엉엉엉.”
혜정은 선경을 살짝 안으며, ‘이게 대관절 무슨 일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경은 손수건을 꺼내 연신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고, 혜정은 말없이 커피만 마셨다.
“그러니까, 진영 씨가 준영 씨 행세를 하면서, 선경 씨를 유혹했다 이거내요? 맞지요?’
선경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아직도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준영 씨가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이거내요. 맞지요?”
“언니, 나는 아무 것도 모르겠어요. 두 남자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종잡을 수가 없어요.”
혜정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선경 씨, 나는 요새 진영 씨는 만났지만, 준영 씨는 만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리고 왜 준영 씨가 나를 좋아한다고 그렇게 말했을까요? 참으로 이상하군요. 혹시 선경 씨를 떼어내기 위하여……. 아니. 미안. 선경 씨. 난 그럴 의도로 말한 것은 아닌데…….”
“언니, 괜찮아요.”
“준영 씨가 선경 씨의 마음을 정리하기 위하여, 일부러 나를 갔다 붙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에요.”
혜정의 말에 선경의 얼굴은 조금 펴지는듯 했다.
“그런데, 선경 씨.”
“왜요? 언니.”
“내가 생각해도 남매가 좋아한다는 것은 좀 이상해요. 난 뭐라 상관할 생각은 없지만, 그냥 그렇다는 거에요.”
“언니는 진영 오빠가 나한테 그랬다는 것에 대해서 화도 안 나요? 배신감 이런 거…….”
혜정은 선경의 말에 살며서 웃었다.
“선경 씨, 난 세상의 보통 여자들하고는 달라요. 의식적으로 다르게 생각하고 일부러 다르게 살아 왔어요. 남자들이 어떻게 하든, 난 눈 하나 깜짝 안 해요.”
선경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와! 언니는…….”
“난 남자들 위에 있고 싶지, 절대 밑에 있고 싶지는 않아요. 남자가 내 몸을 원하면, 까짓 거, 얼마든지 줄 수 있어요. 그 대신 난 더 큰 것을 뺐어오면 되니까.”
혜정의 얼굴에는 귀기마저 서려 있는 것 같았고, 마지막 말은 선경의 온 몸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이 언니는 대단하다. 아니 무섭다.’
“진영 씨가 선경 씨를 어떻게 하려고 한 것은 내가 사과할께요. 그래도 내 정혼자니까. 날 봐서 용서해줘요.”
혜정은 선경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고, 이런 혜정의 모습에 선경은 더 이상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준영 씨가 나를 거론한 것은 아마, 이건 내 생각이지만, 선경 씨의 마음을 정리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선경은 속으로, 혜정을 만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선경이 현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자, 거실에는 아직도 종환과 순화가 앉아 있었다.
“선경아, 지금 몇 시냐?”
순화가 벌떡 일어나더니 선경을 야단쳤다. 그러자 선경은 종환의 눈치만 살폈다.
“너, 준영이하고 있었냐?”
종환의 말소리가 무거웠다.
“아니요. 아빠.”
“그럼 누구와 있었냐?”
선경은 종환과 순화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동안 잘못했어요. 준영 오빠 얘기는 다시 안 할게요. 그리고 오늘은 진영 오빠와 결혼할 언니 만났어요. 예전에 한 번 봤던 사이라, 차 한 잔 했어요.”
그제야 종환의 얼굴이 펴졌고, 순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 진영이하고 결혼할 여자? 부자집 딸이라던데……. 괜찮더냐?”
“예. 아주 좋았어요. 부자 티도 안 내고, 저한테 잘해줘요.”
“그래, 다행이다. 준영이는 요새 뭐한다더냐?”
선경은 이제 생활의 달인에 나가도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거짓말의 달인.
“엄마도 참……. 그 언니는 준영 오빠를 잘 모르지……. 안 그래?”
종환은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방으로 들어가면서 한 마디를 했다.
“이제 자자. 내일이 아무리 휴일이어도 쉬어야지.”
“네, 아빠.”
순화는 선경을 눈으로 꾸짖으며, 주먹을 살짝 쥐더니,선경의 얼굴에 대고 흔들었다.
“빨리 빨리 다녀. 어떤 세상인데…….”
선경은 어제 밤부터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이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그만 온 몸에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그저 이불에 철퍼덕 쓰러지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앞으로 준영 오빠를 볼 수 있을까?’
* * *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진태는 신문을 접더니 병승의 얼굴을 보았다.
“뭐냐?”
“소희와 결혼하는 것이 어떨까요?”
옆에 있던 정화는 깜짝 놀랐다.
“너……. 너무 빠르잖아. 아직 그런 얘기는…….”
“나는 나쁘지 않다. 좋아.”
진태는 흔쾌히 승낙을 했으나, 정화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병승아, 더 만나봐야지……. 나는 아직 모르겠구나.”
그러나 병승의 얼굴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 엄마, 괜찮아요. 반대만 안한 것도 어디에요?”
“너……. 아주 완전히 빠졌구나.”
병승은 뒷머리를 긁적거렸고, 진태와 정화는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 * *
진영은 빌라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주방으로 갔다. 주방에서 양주 한 병을 꺼내든 진영은 그 자리에 서서 한 모금을 꿀꺽 마셨다. 가슴 속은 타들어갔지만, 그것은 결코 술 때문은 아니었다. 선경이 호텔 방을 뛰쳐나간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선경이 소리치던 그 말도 귓가에 메아리쳤다.
‘다 죽어 버려!’
진영은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알콜이 뇌로 올라오는 것만 같았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려 했다.
그 순간 다시 빌라 문이 열리며, 준영이 들어왔다. 준영은 주방에 선 채로 양주병을 입에 대는 진영을 보자, 얼른 뛰어와, 진영의 손에서 술병을 나꿔챘다.
“진영아! 뭐 하는 거야?”
진영의 눈이 준영의 얼굴을 보았으나, 준영의 눈에 제대로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진영의 눈동자가 흔들흔들거리고 있었다.
준영을 진영을 식탁 의자에 앉히고, 바로 옆 의자에 자기도 앉았다.
“진영아!”
진영은 준영의 품으로 무너지며, 울기 시작했다. 진영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제 술기운이 올라오면서,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마음이 눈물 방울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형! 혀엉!”
준영은 말없이 진영을 안았고, 그렇게 형제는 그렇게 쌍둥이 형제는 서로의 감정을 느끼고자 했다.
준영은 진영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읊조리듯이 말을 꺼냈다.
“진영아, 선경이 문제는 내가 도와주겠다. 내가 도와줄께.”
진영의 어깨가 들썩이기만 했다.
그때 빌라의 초인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준영은 진영을 부축하여, 소파로 데려갔고, 거기에 진영을 편하게 뉘었다. 그런 다음 빌라의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손혜정이 차가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얼려버릴 것만 같은 차가운 기운을 뿜으며 서 있었다.
혜정은 준영의 어깨 뒤로 소파에 누워 있는 진영을 보았다. 그대로 걸어 들어온 혜정은 진영에게로 가지 않고, 준영을 보았다.
“준영 씨, 나한테 관심 있어요?”
준영은 뜻밖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준영 씨, 내가 좋아요?”
“그게 무슨 말인지…….”
“준영 씨, 나, 진영 씨 아기 가졌어요. 이제 삼 주째에요.”
혜정의 말에, 준영의 얼굴에는 설마 하는 표정이 떠올랐고, 그걸 보는 혜정의 눈길에는 비웃음이 떠올랐다.
“준영 씨가 아무리 나를 좋아해도, 안 되는 거에요.”
“하하하! 하하하!”
갑자기 소파에 누워 있던 진영에게서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술에 취한 진영의 입에서 혀꼬부라진 소리가 튀어 나왔다.
“야! 손혜정! 네가 그렇게 잘 났냐? 세상 남자들이 그렇게 우습게 보이든? 뭐? 임신 삼 주? 웃기지 마라 그래!”
진영은 악을 바락바락 써댔고, 준영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혜정의 눈에 독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진영 씨, 아무리 어린애라지만, 자기 애한테는 그렇게 못 할 걸. 이제 철 좀 들지.”
“손혜정! 너 그 애가 누구 앤지 모르지? 넌 죽었다 깨도 모를 거다. 야! 손혜정!”
진영은 소파에서 낄낄거리면서 웃어대기 시작했다. 마치 적에게 통쾌한 일격을 퍼부은 사람처럼 마구마구 웃어댔다.
“진영 씨! 술 취했어?”
그러나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것을 혜정도 서서히 눈치채기 시작했다.
진영은 미친듯이 웃어대고 있고, 바로 옆에 서 있는 준영은 고개만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혜정은 진영을 보았고, 준영을 보았다. 그 다음 다시 진영을 보았다. 혜정의 눈 앞에 똑같이 생긴 두 개의 얼굴이 있었다. 둘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혜정의 머리 속에 퍼뜩 어떤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 캄캄한 방이었지. 불도 켜지 않았어. 아침에 깨니까, 메모만 한 장 달랑 있었지.’
혜정은 천천히 거실 바닥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소파까지 걸어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된 거였어. 그렇게 된 거……. 아기 아빠는…….’
혜정은 손을 들어 심장 부근을 지긋이 누르며,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