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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a Rosa Kwon Jun 21. 2018

[Camino] 2. 자유로움과 외로움 그 어딘가

프랑스와 스페인을 오가며 카미노의 맛을 보다

20170303. Day 2 생장피드포르 > 발까를로스


  이 이야기는 11시간 동안 몸을 뉘었던 침대열차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9개월 간 고시원에 살면서 적응했던 침대보다 훨씬 작은 더블엑스스몰(XXS) 사이즈의 3층짜리 침대가 두 개씩 한 방에 들어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을 찾자면, 한 침대마다 물과 귀마개를 비치했다는 것 정도랄까. 너무(x4) 좁은 침대와 아슬아슬한 사다리 때문에 14kg가 넘는 배낭을 도무지 가지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3층을 예약했던 것인지(...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배낭을 들고 오르내리다 자고 있는 다른 승객을 한 대 치기라도 할까봐 결국 방 바깥에 별도로 마련된 짐칸에 내놓고 묶어 두었다. 몸과 가방이 분리되어 있으니 불안감이 증폭했던 것도 잠시, 몸이 피곤해 어느 순간 깜빡 잠이 들었다.



기차에서 내리기 직전, 사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찍은 6인실 침대칸


  11시간 만에 도착한 바욘(Bayonne)은 예쁜 도시였다. 생장피드포르(Saint-Jean-Pied-de-Port, 이하 생장)까지 가는 버스의 시간을 알아보니 2시간이 남아서 잠깐동안 바욘 시내를 구경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문을 연 곳은 거의 없다는 것을 곧 깨닫고 결국 파리에서 방문하지 못한 성당에 들렀다. '제가 원하는 일을 찾아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줄 알았는데,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으며, 다치는 데 없이 무사히 돌아가게 해주세요'였다. 뭔가를 얻기보다는 내가 쥐고 있는 것(건강을 포함해)을 뜻하지 않게 잃어버리는 일만은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점심식사를 따로 챙길 여유가 없어 현지인들의 인기 맛집 타르트 가게(Tarte Julie)의 오픈 시간을 기다려서 시금치&치즈 타르트와 오렌지&초코 타르트 두 조각을 구매했다. 시금치&치즈 타르트는 아주 든든했고 왜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많은지 알 것 같은 맛이었다. 오렌지&초코 타르트는 간식으로 먹으려고 남겨두는 편을 택했다(이 타르트는 후에 13km를 걷는 동안 당보충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고 미친듯이 맛있었다. 한국에 들여오고 싶을 정도랄까..!) 바욘은 단위 면적 대비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이 가장 많은 도시라고 하니 나중에 미식 여행을 와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단위 면적 대비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이 가장 많은 도시, 바욘(프랑스 사람들에게도 휴양지다)



  생장을 가는 사람들의 90% 이상이 순례길을 걸으려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역시나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모두가 상당히 부피가 큰 배낭을 메고 있었다. '이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사연을 가지고 이 곳에 왔을까?' 조심스럽게 곁눈질을 하며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는 사이 좋아보이는 노부부, 스포티한 레깅스를 신은 젊은 백인 여자, 키가 무척 큰 북유럽 느낌의 남자, 왠지 한국인일 것 같은 동양인 남자 등이 타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 언덕길을 지나 무사히 생장에 도착해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으니 벌써 오후 1시였다. 같은 버스에서 내렸던 동양인 남자와 안면을 트고 인사를 하게 됐는데 알고보니 한국인이었다. 그는 하루 이 곳에서 쉬고 출발할 거라며 나에게 어떻게 할 계획인지 물었다. 잠시 고민을 했지만 길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걸어보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고, 먼저 출발했다. 일반적으로 순례자들은 하루에 25~30km를 걷는 편인데 다음 마을인 발까를로스(Valcarlos)까지만 가면 첫 날치고 괜찮을 것 같았다. 시속 4km 로 걷는다고 가정했을 때, 3시간 정도만 걸으면 되는 거리이니까!




  카미노의 성수기인 7,8월에 비교했을 때 3월은 정말 비수기다. 길 위에는 가장 붐빌 때에 비해 1/8 정도의 사람들 밖에 없어 광활한 자연 속에서 혼자 걷는 시간이 꽤 된다. 영하의 추위를 자랑하는 서울과 달리 이 곳의 기온은 벌써 17도인 터라 벚꽃이며 목련, 개나리가 이미 만개해있었고 덕분에 기대에 없던 꽃구경을 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초록 들판에서는 여태껏 본 것보다도 더 많은 양들을 만났다.

  

사진 속 양은 모두 몇 마리일까?(숨은 양 찾기)


  평소 하루에 6km도 안 걸었기 때문에 한 시간쯤 지나자 힘이 부쳤다. 혹시 몰라 로밍을 했지만 음악을 틀기에는 데이터 사용이 부담스러웠다. '이럴 때는 역시 노래를 불러야겠군!(자급자족)' 앞뒤에 아무도 없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흥을 불러일으키는 노래를 부르면서 걷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외국인 할아버지 순례자가 나타나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하고 지나가셨다. 아주 민망했지만 나도 웃으면서 인사할 수 밖에. 어찌나 잘 걸으시는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셨다. 그렇게 오늘의 도착지까지 걸으면서 몇 번을 마주치게 되었다. 각자 쉬어가는 타이밍이 다르다보니 걷다가 안면을 트며 인사를 하고 서로 괜찮은지 안부를 물어주었다. 카미노 위에서의 문화를 처음 경험할 수 있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계인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중이어서인지 내가 걷는 길은 때로 스페인이었다가 금방 프랑스가 되곤 했다. 동네 아이들과 마주치곤 하는데 30분 전에는 Bonjour!라고 했다가 30분 뒤에는 Hola!라고 하는 재미있는 경험. 이런 국경을 경험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이렇게 편히 왕래한다는 사실이 생소하고도 내심 부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나니 깔딱고개가 나타났고, 극한 힘듬과 순간적인 외로움이 느껴질 때쯤 바욘에서 샀던 오렌지&초코 타르트가 위력을 발휘했으며,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졌다. 덕분에 한국에서 야심차게 준비했던 형광 노란색 우비는 생각보다 빨리 배낭 밖으로 나오게 됐다.


  역시 비수기는 비수기인가 보다. 알베르게(Albergue, 순례자용 숙소)에 있는 14개 침대 중에 8개만 찼다. 독일인 4명, 오스트리아인 1명, 스위스인 1명, 프랑스인 1명이다보니 독일어가 차지하는 대화의 지분율이 엄청나게 높았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 같지 않은 이 따뜻하고 유쾌한 분위기는 뭐람? 독일어를 공부한 지가 워낙 오래되고 그들의 말이 너무 빨라서 몇몇 단어밖에 안들렸던 나는 어설프게 웃다가 배정된 2층 침대로 돌아왔다.  


  너무 피곤해서 샤워만 대충 끝낸 후 저녁도 안먹고 7시에 침낭 속에 누워버렸다. 내가 원해서 떠나온 길인데 조금 외로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인지. 한국에서 친구에게 선물 받은 휴족시간을 종아리에 붙여놓았더니 무척 시려서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는 딱 필요한 연락 외에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꾹꾹 참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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