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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a Rosa Kwon Jul 03. 2018

[Camino] 3. 오르막길이어도 괜찮아

3월, 피레네의 마지막 설경을 만끽하기 좋은 달

20170304. Day 3 발까를로스 > 론세스바예스


  발까를로스의 숙소가 정말 깨끗하고 쾌적해서 베드버그 걱정없이 푹 잤다. 그러다 너무 더워서 뒤척거리다가 잠이 깨버렸다. 밤에 난방이 어떨지 몰라 껴입고 잔데다가, 가지고 온 침낭이 꽤 보온이 잘되는 모양이었다. 새벽 4시쯤 잠에서 깼지만 아직 자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많아 움직일 엄두를 못내고 오늘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눈만 깜빡거리며 가만히 누워있는데 내 오른쪽 침대에 누워있는 아저씨와 먼 창가 쪽 침대에 누워있는 아줌마가 대화를 주고받듯 코를 골고 있었다. 이런 것도 모르고 푹 잤으니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 몸이 너무 피곤하니 시차에도 금방 적응을 해버렸나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나도 모르게 깜빡 잠들었다가 눈뜨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씻고 있었다. 아직 붐비지 않는 식당에 가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먼저 해결하고 있는데(붐빌 때, 나는 붐비지 않는 상황을 언제나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어제 숙소에 막 도착했을 때 다정하게 나에게 말을 붙여주던 스위스인 할아버지가 벌써 떠날 준비를 마치신 것 같았다. 스위스에 있는 본인의 집에서부터 출발해 이미 700km를 걸어오셨다(!)는 할아버지는 하루에 35km도 거뜬하다고 할만큼 엄청난 체력의 소유자였다.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독일어가 모두 가능한 능력자라 어젯밤 대화의 중심이셨는데 떠날 때도 모두에게 길 위의 안전과 행복을 빌어주셨다. 작은 동양인 여자애가 혼자 다닌다고 걱정을 하시다가, 어젯밤 눈이 와서 산길이 미끄러울테니 꼭 눈이 녹은 차도로 가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악수를 청하셨다. 마지막에야 여쭤본 그분의 성함은 '니노 페라리'였다. 이탈리아계 스위스인이라 내가 알고 있는 그 'Ferrari'라나(나중에 찾아보니 Blacksmith 에 해당하는 이탈리아계 성씨인 것 같다). 따뜻한 마음 고마워요, 부엔 까미노(Buen Camino)!




  씻고 준비를 마치니 내가 숙소의 마지막 출발자였다. 카미노를 걷는 일은 경주가 아니기에, 내 컨디션과 페이스를 잘 보고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하면 된다고 들었다. 덕분에 조급하거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속도를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속도가 중요한 사회에서 27년간 자라온 내게 상당히 큰 위안이 되었다.


  지난 밤 눈이 많이 왔다더니 온통 하얀 세상이다. 다행히 아침에는 눈비가 내리지 않아 걷기에 좋았고 피레네의 아침 공기는 정말 최고였다. 머릿속이 다 맑아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깨끗한 공기 덕분에 걷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짊어진 가방 역시 어제만큼 무겁지 않았다. 고작 하루 지났을 뿐인데 짐 싸는데 요령이 붙어서 무거운 짐을 위쪽에 놓고 가벼운 것을 아래쪽에 잘 정리했더니 배낭을 메는 일이 훨씬 수월했다.

  

  발까를로스는 피레네 산맥의 중턱에 있어서 오늘의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까지는 대부분 오르막이었다. 처음에는 저 멀리 피레네 산맥의 꼭대기를 덮은 눈이 보였다. 흐리지 않았지만 해를 적당히 구름이 가려주어서 그렇게 눈부시지도 않았기에 더할나위없는 트레킹이었다. 때로는 노래를 틀고 따라 부르다가, 때로는 노래를 끄고 한걸음씩 내딛었다. 걷다보면 몸에 골고루 통증이 오기 시작하는데, 어느 순간엔 허벅지가 아프다가 발바닥이 아픈가하면 종아리 뒤가 뻐근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멋진 풍경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이 찾아오면 신기하게도 마치 쇼핑할 때처럼 그 아픔이 순식간에 잊혀졌다.


     

  계속 주변이 초록초록하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잔디 위에 눈이 가득 덮여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산맥 꼭대기에 보이던 눈이 이제 눈높이, 혹은 그 아래에 있었다. 점점 눈송이 쌓인 나무들이 주위에 더 많아지고, 설산의 한복판에서 설경을 만끽했다. 정말 아름다웠다.


  3시간 가까이 오르막길을 걸으면서도 내가 대체 이 고생을 왜 하고있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내 체력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서만은 아닐 것이다(물론 괜찮은 체력을 갖게 해준 언덕 많은 캠퍼스의 혁혁한 공도 인정...). 완전한 낯선 곳, 그리고 카미노여야만 했던 정신적인 이유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적으로 힘이 들 때는 계속해서 작은 목표를 세웠다. 저기 있는 세모난 표지판까지, 저 앞에 있는 속도제한 표지판까지, 저기 코너까지만 가자고 다독이니까 어떻게든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걷다가 뒤돌아보면 힘들다고 느꼈던 그 지점은 어느새 눈에 안보였고 스스로 놀라울 정도로 잘 걸어 왔다.


4시간만에 만난 내리막길

  한참을 올라오다가 마지막 3km 정도 남았을 때쯤 국도의 최정상을 찍고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는데 양 옆이 정말 장관이었다. 앞으로 남은 여정에서 이런 풍경은 다신 없을 것 같아 오늘의 대표사진으로 남겼다. 콧노래를 부르며 내리막길을 내려오다가 론세스바예스 수도원을 만났을 때는 눈물이 왈칵했다(At last!!!!!). 정확히 3시간 30분 걸려 도착했고, 그제야 긴장했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렇게 날마다 목표한 것을 이루어내고 작은 성공들이 모인다면 자존감이 높아지지 않을 수 없을 듯 하다.


많아보이지만 다 먹었던 유일한 한 끼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러 그 곳을 지키는 청년의 환대를 받았다. 지도를 받으며 그의 따뜻한 설명을 듣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론세스바예스는 원래 수도원만 있는 곳이라 딱히 둘러볼게 없고, 순례자들을 위한 식당이 하나 있단다. 그 말을 듣자마자 군침이 돌면서 점심을 거하게 먹고싶어서 카사 사비나(Casa Sabina)라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계란프라이와 돼지고기, 감자튀김, 바게트가 엄청나게 특별한 음식이 아닌데도, 입에 넣는 순간 세상 행복했다(음~~~ 소리가 절로 나는 맛). 카페콘레체(Cafe con leche, 카페라떼)까지 한 잔 마시니까 몸이 노곤해졌다. 한국에서는 거의 마시지 않는 라떼인데 여기에선 얼마나 고소한지.


  알베르게 여는 시간이 보통 세시 이후인데 오늘은 무려 네시다. 점심을 한껏 여유있게 먹었는데도 두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실내에서 기다릴 수 있어서 오늘은 이렇게 길게 기록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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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행기는 2017년에 인스타그램에 작성했던 것을 바탕으로, 약간의 퇴고를 거쳐 다시 브런치에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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