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스위스!??
어느덧 미국에서 스위스로 이사 온 지 2달이 넘어간다. 우리는 그동안 이사하고, 짐 나르고, 집 정리하고, 집 찾고, 이사하고, 짐 나르고, 집 정리하고를 무지하게 많이 반복했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보았을 때에는 미국이나 스위스나 둘 다 하얀 피부 파란 눈의 서양인들이 사는 외국이라 비슷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경험한 바로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달라서 나 또한 많이 놀랐다.
내가 미국에서 살던 곳은 실리콘 밸리였다. 실리콘밸리는 미국의 서부,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샌프란시스코에서부터 산호세 근방까지 쭉 이르는, 누구나 아는 IT회사들의 집합장소(?)라고 보면 된다. 그러한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서 실리콘밸리에는 미국인들만큼이나 미국인이 아닌 외국인들을 찾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어쩌면 더 쉬울 수도 있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 먹거리, 식료품들이 한데 어우러져 또 그 지역만의 특별한 특징이 있는 곳이다.
아쉽게도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해 보지 않았으므로 소위 말하는 워라밸(Work & life balance)이 한국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대신 주부로서의 미국의 삶은 충분히 이해하고 배웠던 시간이었다. 특히 요리할 때 어떤 마켓에서 어떤 식재료를 사야 할 지에 대해서는 거의 준 전문가가 되었고, 외식과 집밥의 비중을 어떤 식으로 매니징 할지도 빠삭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주부의 생활을 너무 믿었던 탓일까. 서양문물이 다 그게 그거겠지라고 생각하며 스위스로 이사 왔는데 두 달 동안 나는 당최 어떤 음식을 어떻게 해 먹어야 할지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다.
첫째로, 없는 식재료가 너무나 많다. (내가 못 찾는 것일 수도 있다.) 스위스에 도착한 이래로 아시안 마켓이라고 하는 곳은 다 찾아다니고, 현지 마켓도 종류별로 서너 가지 이상 가보아도 콩나물은 보이지 않는다. 깻잎도 그렇고, 시금치는 어딘가 분명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여태껏 못 찾았다. 두부는 아시안 마켓에서만 파는데 파는 그것도 내 성에는 차지 않는 중국 두부던지 아니면 너무나 비싼 한국 두부다. 한 모에 거짓말 조금 보태서 거의 만원 가까이 되는 두부라니... 그래도 아쉬울 때마다 한 번씩 사서 먹긴 하는데 된장국에 넣을 때면 이 한 조각에 천 원, 그다음 조각에 천 원, 이러다 두부 먹다 체할 판국이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콩나물국도 못 끓이고, 두부조림은 너무 아까워서 못하겠고, 잡채 재료를 사놓았어도 제대로 된 시금치를 찾기 전까지 당면은 꺼내지도 못했고 말이다. 이런 식으로 내가 할 수 있으면서 우리 가족이 즐겨 먹었던 음식들이 한 두 개씩 빠지면서 어느새 된장국, 계란국, 미역국, 소고기 뭇국, 김치찌개의 무한 반복이고 독일 옆 나라라서 많이 찾을 수 있는 소시지 반찬이 더 이상 물려서 먹기 싫을 정도다.
둘째로는, 너무 물가가 비싸다. 미국에서 내가 살던 곳인 샌프란시스코 주변은 living cost가 비싼 편이었다. 그중에 제일은 집값이긴 했지만 한국과 비교한다면 특히 외식비가 비쌌다. 한국에서는 쉽게 사 먹었던 순대국밥을 먹기 위해서는 2만 원 가까이 되는 돈을 내면서 팁도 함께 내야 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그중에 비싸지 않지만 충분히 맛있게 즐길 수 있었던 음식들을 몇 개 찾아서 일주일에 두 번은 외식을 했다. 서브웨이, 인 앤 아웃 버거, 할랄 가이즈, 치폴레, 한인 마트 안에 있는 한국식 자장면과 탕수육, 냉면과 설렁탕 등. 그 정도면 한국에 살지 않아도 가끔 찾아오는 향수를 극복하기에는 충분했다. 한 끼 식사로 이삼만 원을 내도 아깝지 않았달까?
그런데 스위스는 한 끼 식사로 1인당 2,3만 원이다. 근데 중요한 것은 맛이 없다. 남들은 뭐래도 나는 이곳을 음식의 불모지라고 부르련다. 스위스에 오기 전에 식재료가 상대적으로 싸다고 들어서 걱정이 없었는데, 정말 말 그대로 외식비에 비해 '상대적으로' 싼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 물가에 익숙해졌던 나에게는 식재료도 비쌌다. 새송이 버섯이 손바닥 반만 한 사이즈 3개 든 것이 한국 돈으로 6,7천 원이고, 방울토마토 묶음이 5천 원이 넘었다. 고기가 저렴했던 미국에 비해서 고깃값도 비싸고 말이다. 도대체 여기 사람들은 뭘 먹고 사는 걸까. 스위스에 다니면서 길고 늘씬한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그중에 3할은 비싼 음식값 때문일 거라고 호언장담하겠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 남편과 나는 매일 식사 때마다 '뭘 먹지..' 하는 고민에 휩싸인다. 이 고민은 사실 한국에서 살 때도, 내가 요리를 하지 않고 사 먹을 때도 통용되었던 고민인데 스위스에 산 이후부터는 진심으로, 씨리어슬리, 고민하면서 머리를 굴린다. 그러다가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채소밖에 없다. 주키니(호박), 양파, 감자, 그리고 종류가 다른 치즈 조각들.. 나와 남편만 있다면 대충 해 먹을 텐데 17개월짜리 딸을 함께 먹여야 하기 때문에 '맛있지만 영양소가 풍부한' 오늘의 메뉴를 위해서 말 그대로 30분 이상 고민하다 보면 결국 남편이 말한다.
"내가 파스타 해줄까?"
다행히도 이 유럽 땅에도 굶어 죽지 말란 법은 없나 보다. 미식의 나라인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붙어있는 이유로 스위스에서 사는 파스타 소스는 정말 다 맛있다. 토마토소스에 다진 고기와 바질을 섞은 볼로네제 소스, 시도한 지 몇 번 되지 않은 바질 페스토, 고소한 우유와 다양한 치즈로 다양하게 해 볼 수 있는 크림소스에다가 별 것 안 넣고 만든 알리오 올리오까지. 미국에서 2년 동안 살면서 가장 찾기 힘든 것이 맛있는 파스타 소스였는데, 여기는 완전 반대였다. 어떤 소스든지 사면 실패한 적이 없었고 그로 인해 파스타를 할 때마다 나와 아기의 칭찬을 듬뿍 받는 남편은 아주 파스타 만들기에 재미를 붙여서 저녁마다 유튜브를 보면서 여러 가지 레시피를 익히는 지경에 도달했다!
안 그래도 어떤 것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끼니때마다 골머리를 앓는 나에게 손 까딱하지 않고도 엄청나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남편의 파스타는 정말 구원자나 다름없다, 언제나 말이다!
그래서 요즘 우리는 간식으로 마늘과 페퍼론치노를 듬뿍 넣은 알리오 올리오를 (내가 아니라 남편이) 만들어 먹고, 저녁식사로도 관자를 넣은 바질 향 나는 토마토 파스타를 만들어 먹고, 스파게티면을 샀다가 그보다 조금 더 납작한 페투치니 면을 사고, 오늘은 짧고 나사못 같이 생긴 푸실리 파스타를 구입했다. 물론, 그 모든 파스타 관련한 결정은 내가 아니라 남편이 한다.
그렇게 파스타를 만들어 먹는 날에는 삼사십 분 동안 남편이 열심히 요리를 하고 난 뒤에도 우리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 설거지까지 말끔하게 끝내는 때가 많다. 평소에도 다른 요리도 함께 하는 우리 부부지만 파스타만큼은 시간이 갈수록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남편이 전담하게 되니, 남편이 만든 모든 파스타를 하나도 남김없이 맛있게 먹는 내 입맛이 스스로 뿌듯(?)하기까지 한다.
요즘 우리 가족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파스타로 식사를 하는 것 같다. 언제까지 이 파스타 사랑이 계속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것을 사도 실패하지 않는 파스타 소스를 마트에서 팔아주니, 남편은 요리에 재미를 붙여서 날이 갈수록 더 맛있는 파스타를 사랑으로 만들며 아빠, 남편으로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으니 좋고, 나는 계속되는 집안일의 반복에서 벗어나 쉴 수 있는 시간과 '내가 만들지 않은'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좋고, 더불어 남편의 봉사로 표현되는 사랑을 느낄 수 있어서 좋고, 아기는 맛없고 영양만 따지는 음식들에서 맛있는 특별식을 먹어서 좋으니. 스위스에게 고마워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