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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욕의왕 Feb 16. 2016

여자와 남자가 두 번 만난 이야기

남자는 여자와의 세 번째 만남을 기다렸다.

오늘은 드디어 여자를 만나는 날이다. 약속 장소는 신촌역 삼 번 출구 근처 맥도날드 앞으로 정했다. 여자와 첫 만남의 약속장소를 정하는 일은 참 어렵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머리를 긁적이며 신촌역 맥도날드 앞으로 하라고 말해줬다. 나도 오다가다 신촌역 근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역시 사람들이 그 장소를 정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겠지. 친구는 덧붙여 이대 앞 노리타에서 밥을 먹으라고 가르쳐줬다. 신촌에서 출발해 여자와 걸으면서 얘기하기에 딱 적당한 거리라고. 그리고 역시 소개팅에서는 진부하지만 파스타를 먹는 것이 딱 아니겠냐며. 그 말을 듣는데 참 친구가 다르게 보였다.

여자가 저 멀리 보인다. 가슴이 두근거리지만 남자니까 나는 쇼윈도에 비치는 내 모습을 정리하며 심호흡을 했다. 으음 멋있다. 사실 친구가 골라 준 자켓을 입고 나오려다가 그냥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사람을 처음 만날 때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 학교 후드가 최고다.

 ‘안녕하세요’. 여자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 어깨를 바라보았다. 역시 남자는 어깨다. 갑자기 군인시절이 떠올랐다. 작업을 시키던 행보관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괜히 으쓱한 기분이 들었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짧은 머리에 얼굴이 매우 작았다. 예뻤지만 머리가 길었으면 더 예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남자는 어깨고 여자는 긴 생머리지. 하지만 치마를 입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여자가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했다.

여자는 ‘탐탐’에 가자고 했다. 가서 ‘아메리카노’를 두 잔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그렇지만 역시 커피는 자판기 커피다. 그러면서 열심히 이야기를 했다. 여자는 재미있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대학 내일’에서 읽었다. 그리고 취미나 취향이 같으면 좋으니까 여자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들을 막 꺼냈다. 만나기 전 카톡을 주고 받으며 ‘미드’를 좋아한다고 얘기했다. 좋아하는 것은 브레이킹 베드랑 빅뱅이론이지만 너무 공대생 같은 말은 하지 말라고 한 친구의 말을 고려해 섹스앤더시티나 가십걸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다. 역시 여자의 눈이 반짝인다. 내가 친구 하나는 참 잘 뒀다.

그러던 찰나 여자가 ‘오빠, 혹시 빅뱅이론 보셨어요?’ 라고 물었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오빠라고 불러서 가슴이 뛰었는지 ‘Our whole universe was in a hot dense state…’ 하는 빅뱅이론 오프닝 테마송이 머릿속에 떠올라 가슴이 뛰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내 취향을 이해해주는 어린 여자아이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역시 세상은 살 만하다. 나는 얼른 대답했다. 아, 빅뱅이론 ‘존나’ 재밌어요.    

그러자 여자는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어… 이게 아닌가? 갑자기 웃어서 당황스러웠지만 내가 ‘대학 내일’이 얘기해주던 재미있는 남자가 된 것 같아서 잠깐 기분이 좋았다가 여자가 ‘아, 그 정도로 재미있으셨어요?’ 라고 말했다. 아차 ‘존나’ 짜증나네. ‘존나’가 뭐야. 그나저나 실수 할 수도 있지, 역시 여자는 머리가 길어야 아량도 넓다. 얼른 고쳐서 말했다. ‘아 진짜 재밌어요, 진짜, 재미있어요.’ 그래도 여자는 자꾸 까르르 까르르 웃었다. 아 이래서 여자를 재미있게 만들어야 하는구나 싶었다. 실수였지만 웃는 여자의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이 뿌듯했다.   

그 여자와 두 번째 만났다. 소개팅의 정석을 잘 따르고 싶었기에 영화를 보러가기로 했다. 처음 만났을 때 편한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두 번째에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인터넷을 뒤져 빛나는 자켓을 골랐다. 나는 한 번도 이런 옷을 입어본 적이 없지만 역시 사람들이 이런 옷을 입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겠지. 어깨가 으쓱했다.

여자와 나란히 앉았다. 영화 예고편에 트렌치코트를 입은 탕웨이가 나왔다. 아, 탕웨이 역시 여자는 머리가 길어야 한다. 여자가 말했다. ‘탕웨이 예쁘죠?’ 나를 시험하는 것인가 마음이 복잡해졌다. 나는 지조가 있는 남자니까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아, 나는 별로야.’ 그러자 여자는 또 물었다. ‘오빠, 색계 봤죠?’ 아, 색,계 보았다. 물론 다 보지는 않았지만. 지루한 영화라는 네이버 별점 평을 보고는 주요장면만 보았다. 학과 공부로 매우 바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에게 ‘액기스’만 보았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전체를 다 본 건 아닌데…’라고 얘기를 시작했다. 아… 앗차 싶었다. 나는 지조가 있는 남자니까 탕웨이도 별로라고 말했는데, 여자가 오해는 안 했으면 좋겠다. 덧붙여 나는 ‘오빠는 뭐 여자가 겨드랑이 털 정도는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해.’ 하며 너그러운 모습도 보였다. 내가 생각해도 참 잘한 멘트다. 연애를 못하고 있는 친구놈에게 나중에 알려줘야지. 여자의 표정은 알쏭달쏭했지만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싶었다.     

여자와 세 번째 만남을 기대했다. 하지만 여자는 연락이 없었다. 짧은 머리도 이제 마음에 들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다. 카톡창에 떠있는 숫자 1이 나를 이렇게 괴롭힐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영화 티켓은 내가 샀으니까 팝콘은 니가 사라고 해서 화가 났나? 아, 마음이 몹시 괴롭다. 그래서 내 마음을 담은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여자가 꼭 확인했으면 좋겠다. 왜냐면 그 메시지에 진심을 담았으니까 그녀는 아마 감동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나에게 돌아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화는 하지 말라는 친구의 말은 아직도 이해가 안 가지만 어쨌든 따르기로 했다.   

전화를 하는 대신에 여자가 좋아한다던 섹스앤더시티와 가십걸을 보았다. 역시 여자는 긴 생머리지. 내가 틀린 것이 아니다. 화면 속의 그녀들을 화면 속의 남자들은 능숙하게 리드하고 연애도 했다. 갑자기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도 빠지는 학벌이 아니고 생긴 것도 이만하면 괜찮다고 엄마가 항상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래 연락이 안 오는 게 다행일지도 몰라.' 긴 머리를 휘날리는 여자와의 연애가 머리에 그려졌다. 친구에게 소개팅 좀 해달라고 부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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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 라이블리에게 바칩니다. 라이블리를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그 구역의 미친년도 역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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