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iece of Namhae
회사 전용 리조트 목록에 남해 아난티가 뉴페이스로 등장했다. 힐튼 시절부터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어지간히 큰마음 먹지 않으면 가기 어려운 곳이다. 짧게 머무르기엔 왕복 거리가 만만치 않고, 긴 시간을 확보하면 좀 더 낯선 곳이 끌린다.
2박 3일 일정으로 괜찮은 날짜를 골라 신청하면, 매번 탈락. 꽤 경쟁률이 높은 곳이어서, 이번에도 떨어지겠지 싶었는데 이게 웬걸. 덜컥 당첨이 됐다. 가족 단톡방에 이 뜬금포 소식을 알리고, 다들 달력을 뜯어보기 시작. 엄마 아빠 콜, 동생 내외도 콜. 연말을 해외에서 보낼 예정인데, 마침 잘 됐다. 우리 남해에서 가족 송년회를 하자.
11월의 어느 금요일 아침. 지난밤 창원에 내려온 난 엄마와 함께 버스를 타고 남해로 향했다. 아빤 회사에 일이 있어, 저녁에 합류할 계획이다. 운전을 할 줄 알면 운신의 폭이 넓어지겠다 싶으면서도, 내가 떠올리는 여행의 이미지는 항상 가벼운 차림으로 두 다리를 놀리는 것이다. 결국 자동차도 내가 이고 가야만 하는 짐 아닐까, 차가 있으면 주차한 곳으로 돌아와야만 하잖아. 뚜벅이의 제한된 경험에서 비롯된 빈곤한 사고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름 자유롭고 가벼운 마음으로 남해에 도착했다. 3시간쯤 후엔 서울에서 출발한 동생 내외가, 그로부터 2시간쯤 지나면 아빠까지 완전체 예정.
제일 먼저 도착한 특권으로, 깨끗하게 정돈된 리조트를 구경하고 방을 골랐다. 일단 문을 열고 들어서자 환한 햇살과 멋진 바다에 3초간 환호성 발사! 2층 구조로, 1층에 방 하나 거실 둘, 2층에 방 세 개. 방마다 들어가서 창밖을 내다보니, 다시 한번 탄성이 와아.
11월의 마지막 주말인데, 햇살이 어찌나 따스한지 꼭 봄날 같다. 테라스에 앉아 커피와 일광욕을 즐기다가, 리조트를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리조트가 전체적으로 한적하다.
부산 아난티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이터널저니 서점이 있다. 부산보다 규모는 작지만, 좀 더 여유로운 분위기라 책을 좀 더 찬찬히 둘러보게 된다. 세상엔 왜 이렇게 매력적인 책이 많을까. 그런데 난 왜 이리도 책을 많이 못 읽는 걸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해." 이 문장이 좋아, 몇 번을 소리 내 읽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해."
깜박 안 챙겨온 치약과 생필품 몇 개를 사들고 다시 숙소로 걸어오는 길. 잔잔한 바다 너머로 해가 기울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점점 붉어지고, 바람이 조금씩 온기를 잃어간다. 그리고 주위엔 아무도 없다. 뭐야, 세계 3대 노을이라는 코타키나발루보다 여기 노을이 더 멋지잖아. 지금 이 풍경을, 이 시간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해가 넘어가니 춥고 캄캄해졌다. 잠시 꿈을 꾼 것만 같다. 그새 우리 가족 완전체 성공! 낮에 챙겨둔 전복죽 등등으로 저녁을 챙겨 먹고 와인도 짠짠. 이대로 잠들긴 아쉬워, 밖에 나가보니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아니다. 파도 소리보단 물소리가 좀 더 어울린다. 동해의 처얼석하는 파도 소리와 다르게, 물이 잔잔하고 단단하게 흘러가는 소리다. 하늘엔 별도 반짝, 바다 건너 저 편은 휘황찬란. 저기가 대체 어딘가 살펴보니, 여수다. 여수 엠블호텔 형체도 어렴풋이 보인다. 아, 버스커버스커가 빠질 수 없지. 이래서 그렇게 노래를 불렀구나. 여수 밤바다~
다음날, 오늘도 남해 하늘은 하루 종일 맑음. 밤에 도착해 리조트를 돌아보지 못한 아빠와 아침 산책길. 햇빛은 반짝, 바다 물결도 반짝, 나뭇잎도 반짝. 온통 반짝인다.
가볍게 드라이브 삼아 향한 곳은 섬이정원. 개인 소유의 수목원인데, 사진 찍기 좋아 요새 인스타 핫플레이스란다. 개인 소유의 산비탈을 이리 가꾸고 저리 가꾸다 보니 수목원이 된 것 같다. 산 중턱까지 올라가는 길이 어찌나 좁고 꼬불꼬불한지, 창가를 내다보니 이건 흡사 롤러코스터 느낌. 길은 좁은데 수목원은 규모가 꽤 넓다. 무엇보다 이 식물들이 어찌나 사랑받은 티를 뿜뿜 뿜어내는지, '좋아서 하는 일'의 에너지가 가득해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정성스레 좋아하는 일 해주신 덕분에, 저도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고맙습니다.
리조트로 돌아갈까 어쩔까 잠시 고민하다가, 보리암으로 향했다. 보리암에 가본 적 없다는 새 식구에게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은 부모님의 마음, 그리고 어릴 때부터 3~4번 찾은 기억들이 쌓여 괜스레 한 번 더 가보고 싶은 마음.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차에서 내려 얼마 안 걸었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오늘은 길이 멀지. 바튼 숨을 내쉬다 보면, 어느새 눈앞에 장관이 펼쳐진다. 3~4번 왔던 곳이지만, 또 오길 잘했다. 산에 단풍이 남아있는 이 계절엔 이런 모습이구나. 답답하던 마음 한 구석이 확 뚫리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루도 자알 놀았다. 와인잔을 챙겨 2층으로 먼저 올라와 책을 펼쳐든다. 리조트에서 종일 뒹굴뒹굴하며 책이나 볼까 싶어 챙겨왔는데, 돌아다니느라 이제야 책장을 넘긴다. 500쪽이 넘는 책인데(가벼운 차림으로 나오면서도, 이 두꺼운 책을 용케 챙겨왔다.), 이번 여행에서 다 읽긴 글렀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읽는데, 마침 시작이 여행에 대한 글이다.
일상으로 다시 돌아올 힘을 얻고자 떠나는 여행. 현장이 가진 진실을 목도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 그 여행의 모습이 너무도 궁금한데, 눈꺼풀이 자꾸 내려앉는다. 문을 열어놨더니, 1층에서 가족들의 이야기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린다. 내일은 창원을 들렀다 다시 서울로 향해야 하니, 무리하지 말고 오늘은 여기서 후퇴다. 2박 3일, 짧았지만 다시 돌아갈 힘을 충분히 얻은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