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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우뚝 Mar 18. 2020

안녕, 동티모르

 비행기 창문 덮개를 열자 마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단 듯이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부심을 견딘 끝에 푸른 바다가 펼쳐졌고, 그 끝자락에 자리 잡은 아담한 도시는 낯설지 않았다. 안녕 동티모르,라고 나는 낮게 읊조렸다. 다시는 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곳을 향해 가까워지던 그 순간 오만가지 감정들이 교차했다. 설렘과 두려움, 익숙함과 새로움, 기쁨과 허탈함, 운명인가, 우연인가 하는 의구심 등 서로 어울리지 않는 양가감정들이 손을 잡고 다가와 내게 인사했다. 꼬박 만 3년을 함께 한 팀을 떠나 동티모르 사무소라는 새로운 팀이자 첫 해외 파견지로 간다는 설렘과, 낮이고 밤이고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일하고, 막내로 시작한 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잘 보듬어준 유독 끈끈했던 우리 팀을 떠나 이제는 팀원이 아닌 중간관리자로서 기대한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먼저 내게 인사했다. 잘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코이카 동티모르 사무소 인턴이라는 비정규직의 길을 손수 선택해 들어섰던 불안하게 빛나던 스물다섯의 내가 나타나 이제는 직원으로, 사무소의 중간 책임자로 오게 되었음을 환영하자 잠시 금의환향한다는 생각에 빠져 즐거웠다가도, 당초 희망했던 큰 사무소로 가지 못하고 5년 전에 비해 달라진 바 없이 여전히 작고 미약한 동티모르에 다시 오게 되었음에 마음이 헛헛하기도 했다. 또, 비록 가장 희망하던 곳으로 가진 못했지만, 각자의 사연에 따라 이곳을 희망하는 사람이 있었음에도 내가 여기에 오게 되었음이 신의 계획인지 아니면 장난일는지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제 동티모르에 정착한 지 1년 8개월, 2년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나는 잠시 한국에 다녀왔다 동티모르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금 동티모르에 안녕하냐고 질문을 해본다. 안부를 여쭙는 자식의 말에 오히려 자식의 안부를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처럼 동티모르는 도리어 내게 안녕하냐고 되묻는다. 그 되물음에 생각해보니 동티모르를 위한다는 크고 작은 많은 일이 나를 거쳐 갔음에도 여전히 내가 동티모르를 변화시킨 것보다는 동티모르가 나를 변화시켰음을 새삼 깨닫는다. 먼저, 동티모르는 내게 용기를 선물해주었다. 물 공포증을 가지고 있던 나는 지난 9월 스쿠버 다이빙을 시작했다. 줄곧 바닷가에 살았지만 바다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았던 나도 동티모르의 아름다운 바다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용기 내 다가간 나를 바다는 두 팔로 환영하며, 품  속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을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던 산호와 그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인사하던 호기심 많은 물고기들, 선녀의 날갯짓을 연상케 하던 가오리와 용궁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듯 손짓하던 거북이, 아이들처럼 첨벙거리며 해맑게 놀던 고래들, 그리고 마치 은하수를 거니는 것만 같았던 밤바다까지 내어주며 동화 속 세상을 경험하는 행운을 선사했다.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웠던 바다에서의 경험은 나를 더욱 자연 앞에 겸손하게 만들었고,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모니터라는 우물만 들여다보며 살던 나를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두 번째로 내게 평화를 선물해주었다. 무신론자는 아니었지만 사실상 종교 없이 30년을 살아온 내게 신이란 구복을 할 때만 찾던 존재였다. 특히 시험을 칠 때, 중요한 일을 치를 때, 바라는 것이 있을 때 들인 노력보다 더 나은 결과를 주기를 뻔뻔하게 요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티모르에서 호되게 말로만 듣던 아홉수를 지내게 되었고,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바람에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힘없이 흔들리며 괴로워하던 나는 구복 프레임에서 벗어나, 그저 세상 풍파 속에서 기댈 수 있는 곳을 찾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다는 생각에 동티모르에서 가장 보편적인 성당을 자연스럽게 찾게 되었다. 처음 성당에 간 날 신부님께서 남을 위해 기도하자는 너무나 원론적인 말씀을 하셨는데, 속세에 찌든 나에게는 그 말씀이 획기적이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평생을 나의 일신을 위해서만 기도해왔는데, 남을 위해서도 기도라는 것을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에 잊고 있던 이타심이 기지개를 켰다. 미사가 끝나고 집에 가던 길, 항상 공격적으로 돈을 요구해와 무서워만 했던 꼬마가 나타났다. 10살 남짓한 나이에 세상의 모든 적개심을 다 담고 있던 그 눈을 바라보며, 더는 두렵지 않았고, 어린 나이에 날 선 세상에 맨발로 나온 그 아이가 많이 상처 받지 않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인도해달라고 처음으로 남을 위해 신께 기도했다. 이 첫 경험은 지속적으로 나를 타인을 위한 기도로 이끌었고, 나의 안녕을 소원하지 않았음에도 신기하게도 내 마음은 빠르게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누군가도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서로가 서로의 평화를 소원할 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을, 나를 버릴 때 비로소 참된 나를 만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한국인은 삼세번, 알라딘 램프 요정 지니의 소원도 세 가지인지라 내심 동티모르가 내게 줄 세 번째 선물도 기대해본다. 그렇다고 염치없이 받기만 하는 건 아니고, 그 사이 나도 동티모르를 위해 보답을 했다. 용기와 아름다운 바다를 선물해준 동티모르를 위해 플라스틱 재활용을 통한 환경 개선 사업을 정부 기관, 기업, 시민사회를 모아 시작했고, 지금은 오랜 식민지배와 내전으로 얼룩진 상처를 어루만지고 뿌리 깊은 평화의 정착을 위해 평화 구축(Peacebuilding) 사업을 준비 중이다.

혹자는 언어에 온도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는 한편, “안녕”이라는 단어는 온도에 따라 색을 바꾸는 변온동물인 카멜레온 같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 만난 이에게 건네는 안녕에는 설렘이, 떠나는 이가 건네는 안녕에는 차가움이, 떠나는 이에게 건네는 안녕에는 그리움이, 다시 만난 이에게 건네는 안녕에는 따뜻한 반가움이 묻어난다. 처음 동티모르를 만났을 때 나는 설렜고, 다시 동티모르를 만났을 땐 반가웠다. 언젠가 그리워질 동티모르를 생각하며, 반가움과 그리움의 온도 그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동티모르에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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