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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옥 Apr 18. 2024

미출간 산문집 서문

 몇 년 전, 앞 동에서 왔다는 누군가가 내 방 창문을 두드린 적이 있었다. 한여름이었고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그때 난 아마도 소설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창문 앞으로 난데없이 중년 남자의 얼굴이 떠올라 무척 놀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자는 방충망을 사이에 두고 복도에 선 채로 내게 형광등을 꺼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거실에서 잠을 자려는데 내 방 불빛이 앞 동의 자기 집까지 닿아 도무지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도저히 안 돼서 직접 왔습니다, 부탁 좀 드릴게요. 아내와 함께 불빛의 진원지를 한참 동안 찾았다고, 아무리 따져봐도 여기가 맞는 것 같으니 부디 양해해달라는 남자의 말에 나는 말없이 창문을 닫았다. 당시엔 난데없는 상황에 놀란 마음이 더 컸으나 이후엔 불쾌감을 동반한 호기심이 동했다. 고작 이 불빛 때문에 앞 동 사람이 잠을 못 잔다는 게 말이 되나? 깜짝 놀랐네. 거듭 생각해봐도 기이하고 황당했다. 그날 이후로도 나는 늦은 시간까지 방 불을 켜둔 적이 많았으나 남자가 나를 다시금 찾아온 적은 없었다.     


 나는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는데(심지어는 조기축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동료에게 말한 적도 있었다), 특히 소설을 어떻게 쓰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으레 이 일을 예시로 꺼낸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대개 이런 것들이다. 나는 이 일을 소설로 써보려는 시도를 여러 번 했으나 어째선지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고, 그건 내가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이상하고 특별한 사건으로 이 일을 재구성하려 들기 때문인데, 정작 소설 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이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이며, 그게 바로 소설 쓰기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그렇더라도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열에 아홉은 내 방 창문을 두드린 남자에 대해 무척 흥미로워한다. 그러면 나는 참지 못하고 또 몇 마디를 덧붙이고 만다.


 “지금 당신이 제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은 것 역시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적당하고 평범한 상황에서 기인하는 겁니다.”


 거기까지 떠들고 나면 또 나댔다는 생각에 이내 부끄러운 기분이 되고 만다. 뭐 대단한 얘기라고. 하여튼, 말을 줄이고 글을 많이 써야 하는데…… 돌이켜 보면 재미 삼아 사주를 보러 갈 때마다 글보단 말로 성공한다는 말을 듣곤 했는데, 어쩌면 그건 말을 잘한다기보단 글을 못 쓴다는 쪽에 가까운 게 아닐까. 그러면 정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잘 알지도 못하는 소설 작법에 대해 말하려던 건 아니고, 나는 다만 소설 쓰기에 있어 가장 필요한 재능은 ‘평범한 일상’을 상상하고 재구성해내는 능력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주제로 쓸 법한 그럴싸한 이야기는 누구나 하나쯤 떠올릴 수 있겠지만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광어회를 안주로 놓고 두 사람이 소주를 마시는 장면을 만들어내는 일은, 그걸 또 유의미한 분량으로 써내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고. 어쩌면 그건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일과도 일견 비슷하지 않을까. 잘 안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떠올리자니 생각처럼 되지 않는 것.


 그래서인가, 나는 술자리에서 먹고 사는 이야기를 무척 재미있게 들려주는 사람이 부럽고,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소설가의 재능을 타고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그러질 못해서 부럽고 한편으론 질투도 느낀다. 다행히 내 주위의 재담꾼들은 먹고사느라 바빠 소설 같은 건 읽지도 쓰지도 않는다. 그저 나를 불러내 자기 얘기를 들려줄 뿐이다. 그러면 나는 기꺼이 술자리에 나가 그들의 평범한 이야기를 듣고 온다. 집에 돌아오면 술기운을 빌려 몇 줄 적어보는데,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술에 취해 쓴 글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 적은 것들은 노트북 아주 깊숙한 곳에 묻혀 있다.


 비슷한(?) 의미에서 나는 아파트 게시판에 붙은 유인물을 읽는 것도 좋아한다. 단수나 난방 공급 중단, 화단 제초 작업이 언제 이뤄지는지 제때 알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동네에서 일어나는 잡다하고 시시콜콜한 일들을 궁금해하는 마음이 더 크다. 이번 입주자대표회의 안건은 뭔지, 산책로 옆에 있는 시멘트공장은 언제 철거되며 경비용역업체 재계약은 어떻게 되어가는지, 윗집 인테리어 공사는 도대체 언제쯤 끝나는 건지…… 그런 대단치 않은 것들을 잘 엮어보면 그럭저럭 읽을만한 이야기가 한 편쯤은 완성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정작 나는 내가 알아낸 것들을 일상생활에서만 유용하게 써먹는 편이다. 경비실에서 나눠주는 계량기함 커버를 얼른 붙여 때 이른 한파를 대비하고, 수목 소독이 있는 날엔 미리 창문을 꼭 닫고 외출한다. 내 생활은 잡스럽게 풍요로워지는데, 오직 내가 쓰는 소설만 여전히 빈곤한 채로 남겨져 있다. ‘소설적인’ 것에 머물러 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이런 사람인 셈이다. 카페에 가면 듣고 있던 노래를 멈추고 슬그머니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사람, 비가 온 뒤 천변을 산책하다 말고 길가로 기어 나온 참게를 한참 구경하는 사람, 한여름밤에 내 방 창문을 두드렸던 앞 동 남자가 또 찾아오기를 막연히 기다리는 사람, 그러나 그런 것들을 좀처럼 소설로 쓰지 못한 채 괴로워하는 사람. 이 모든 건 나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보고 듣고 기억하는 것. 어쩌면 내 등단작 제목이 「듣는 사람」이 된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언젠가 이런 것들에 대해 적어보고 싶었다.

 한때 소설이라고 믿었으나 (아직) 그렇지 못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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