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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지 Aug 12. 2020

과감히 침범하겠어! 그게 털일지라도.

거참 프라이버시 존중하기 쉽지 않구만

H 종아리를 처음 보았을 , 나는 눈을   없었다. 그의 다리는 마치 우거진 수풀 같았다. 집에 남자라곤 아빠밖에 없었던 내게 H 다리털은 신선한 충격이었고(우리 아빠는 다리가 매끈하다), 나는 H 다리를 매생이라고 불렀다.

“헤이, 매생쓰! 종아리에 모기 물려본 경험 있나?”

“당연히 있지.”

“오 몰랐어. 모기가 그 우거진 숲을 헤치고 피를 빨다니!”

“하, 지금 적립하는 거지? 마일리지 모아놨다가 한 번에 호되게 당하려고?”




한 번은 동생이 우리 집에 놀러 와서 한창 수다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때 얼큰하게 취한 H가 집에 돌아왔다. 반바지 차림에 나른한 눈을 하고 침대에 누워있는 H를 보자 문득 얄궂은 생각이 들었다.
 ‘저 무성한 다리가 매끈해지면 어떨까?’

그때 갑자기 동생이 ‘히익!!!!’하고 놀란 소리를 냈다. 동생의 휘둥그레진 눈은 H의 다리를 향해 있었다. 나와 동생의 뇌 구조 유전자가 소름 끼치게 닮은 걸까, 아니면 H의 다리털이 비범한 걸까.

“형부, 나 형부 다리털 왜 이제야 봤지? 대박.”

H가 깔깔 웃으며 취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장난 아이제. 현지는 그래서 내 다리 보고 매생이라고 한다이가.”

그 순간, 집 어딘가에서 봤던 제모크림이 번뜩 떠올랐다. 오늘이 H의 매끈한 다리를 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았다.

“H, 오늘 다리 제모 한번 해볼래?”

내가 동생에게 슬쩍 눈빛을 보내자, 동생이 분위기에 합세한다.
 “형부, 해봐요! 완전 깔끔해질 듯! 요즘 제모하러 가면 남자들도 진짜 많다고.”

잠깐 고민을 하던 H는 취기 덕분에 평소보다 살짝 개방적인 텐션을 취한다.

“하 참…. 너희 깔끔하게 잘해줘야 된다. 알았지?”
 나는 (이게 대체 왜 신나는지 모르겠지만) 한껏 신이 나서 제모 크림을 꺼내왔다. 그리고 동생과 나는 H의 다리를 하나씩 맡았다. 하얗고 알싸한 냄새가 나는 제모 크림을 종아리에 펴 바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크림을 바르면서도 ‘와, 대박.’ ‘털이 너무 많아서 피부까지 크림이 안 발라지는 느낌이야!’을 연발했다.

“내가 살다 살다 형부 종아리에 제모 크림을 바르는 날이 오네. 참내.”
 “우리 10년 뒤에 지금 상황 떠올려 보면 진짜 웃길 것 같다. 맞제.”

15분이 지나고 H는 다리를 헹궈냈다. 아마추어들의 손길 덕에 깔끔하게 제모가 안된 다리는 털이 뭉텅뭉텅 남아 있었고, 시간이 흐르며 털이 새로 자라니까 H의 다리는 삐죽한 잔디밭이 되었다. 덕분에 그 날을 마지막으로 H의 다리털에 다시는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렇게 털에 대한 간섭(?)은 소소한 에피소드로 마무리되는 듯했으나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았고, 나는 H에게 좀 더 과감하게 침범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H의 가슴에 자리 잡은 아이들(털)이 눈에 들어왔다. 깨끗하고 뽀얀 가슴에 자라 있는 3가닥의 털을 보니, 이를 뽑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왔고, 내 눈은 본능적으로 반짝였다. H는 몇번 튕기다가 이내 족집게를 허락해주었다. 내 몸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기분이 시원한 건지 모르겠다. 예전에 어느 웹툰에서 ‘남편 몸에서 나오는 것들은 와이프가 수확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는 글을 읽고 빵 터진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밑에 달린 댓글엔 나같은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다행이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라서.) 이건 100% 내 쾌감을 위해 하는 일이라는 걸 이 자리를 빌려 이실직고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H도 나의 침범력에 전염되었다. H는 내 눈썹을 다듬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유난히 똥손이다. 미술에도 소질이 없었고, 과일을 예쁘게 깎는 것도 잘 못했다. 당연히 내 눈썹을 다듬는 것조차 서툴렀기에 머털이 같은 눈썹은 자유분방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처음 H가 내 눈썹을 다듬어 주겠다고 했을 땐 혹시나 눈썹으로 장난을 칠까봐 질색팔색을 했지만, 막상 다듬어진 눈썹을 보니 꽤나 만족스러웠다. (평소 H는 자신의 눈썹도 꽤나 잘 다듬는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1-2주에 한 번씩 H눈썹샵을 찾아가 내 얼굴을 맡기고 있다.




우리 부부는 생각보다 많은 분야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있다. 하다못해 서로의 털(?)까지 침범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쓸데없는 짓들을 계속해서 주고받을수록 묘한 안정감이 생기는 건 왤까. 상대방의 몸에서 나의 고유 권한을 찾으며 우리가 서로에게 소속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고 해야 하나.

내가 눈썹을 혼자 다듬어보겠다고 말하면 서운해하는 H를 보니, 상대방도 나랑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다 말고 거울을 보니 마침 눈썹이 제법 자랐다. 오늘은 집에 가서 H 눈썹샵을 찾아야겠다. 그리고 현지의 3가닥 뽑기샵을 이어서 오픈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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