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현지 Jun 17. 2020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행복할까?

나의 연애 오답노트

 “눈 썩었냐? 좋은 사람인지 잘 좀 보고 만나라고.”

 “아오 씨! 나도 잘 보고 싶거든?”

나는 발끈해서 수민의 말을 받아쳤다.

 “네 눈에 그 사람이 멋있어 보이는 걸 떠나서, 동성친구들 사이에서 그 사람 소문이 어떤지도 잘 봐봐. 그게 중요해.”

평소 수민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던 나였지만, 왠지 이 조언만큼은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져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나는 수민의 묵직한 조언을 새기며, 지난 n회차 연애를 회상했다. 아, 강렬한 기억의 두 남자가 떠오른다. 내 연애사의 큰 방점을 찍은 두 남자는 유독 동성 친구들의 평판이 안 좋았다. 훗날 내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하면 그들은 ‘소문이 얼마나 별로였길래?’하고 물었다. 나는 이럴 때 두 사람의 별명과 그 의미를 설명해 주곤 했다.


먼저 일본 유학을 준비하던 고등학교 선배 A. A는 일본 아이돌 그룹 ‘아라시’의 니노미야 카즈나리를 닮아, 웃는 모습이 유독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내 인생 유일하게 첫눈에 반했던 사람이었고, 100% 외모만 보고 A에게 이끌린 나는 연락처를 수소문해 문자를 보냈다. (카톡이 없던 그 시절) 그 문자를 시작으로 우리는 3번 정도 만나고, 연애를 시작했다.

A선배는 친구들 사이에서 ‘소말리아 쓰레기’라고 불렸다. 처음 별명을 듣고 충격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단어의 조합만으로도 충격적인 별명. 그 의미는 이러했다. 180센티미터의 키에도 불구하고 몸무게가 58킬로그램 밖에 안 나가서 ‘소말리아’. 하도 성격이 더러워서 ‘쓰레기’…. 내 친구들은 A의 별명을 들은 후, 처음에 내가 그랬듯 ‘아…….’라고 탄식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콩깍지라는 건 이런 충격적인 별명도 금세 잊을 만큼 무서운 존재다. (이걸 기억하시길 바란다) 나에게 A는 좋은 사람이었고, 나는 그런 평판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다. 게다가 유학을 앞둔 남자 친구라니. 생각만 해도 설레지 않는가. 나는 훗날 A와 공항에서 작별할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낭만적인 청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느껴져 가슴이 저렸다. (심지어 실제로 영화 같은 연애이기도 했다. 비 오는 여름, 소나기를 잔뜩 맞은 채 버스 정류장 아래에서 내게 ‘지금 만나러 갑니다’ 소설책을 선물하며 고백하는 낭만이 있었던 사람이니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제대로 주인공이 되어보기도 전에 A와 헤어졌다. 방학 중간 무렵, A가 돌연 연락을 두절한 것이다. 당시 내 짧은 18년의 인생 중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A의 연락을 기다리다 지쳐 체념하고, ‘헤어지자’는 내용의 메시지를 남기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감정은 쉽사리 정리되지 않았고, 나는 이별의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그래서 며칠에 걸쳐 전화 5통, 문자 3통을 남겼다. 연락을 받지 않던 A는 내가 마지막 전화를 걸던 날, 짧은 메시지 하나를 보내왔다.

 ‘경고한다. 연락하지 마라.’

응...? 경고..라니... 그의 황당하고 짧은 메시지는 행복했던 여름의 기억까지 무참히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소쓰(별명의 줄인 말) 이 나쁜 새끼…. 예의도 없는 새끼.


 뜬금없는 이별로 적잖이 충격을 받은 나는, 그 후 나만의 연애 오답노트를 설계했다. '이런 사람은 피해야지, 저런 성격은 나랑 안 맞지.' 그리고 나름 의도 하에 A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B를 만났다. B는 꼭 지점토로 빚은 것처럼 귀엽고 작은 이목구비에 잡티 하나 없는 뽀얀 피부를 가진 ‘동생’이었다. B는 A처럼 무게를 잡거나 아는 체하지 않았고, 내가 문자를 여러 번 씹어도 계산 없이 마음을 내어주는 강아지처럼 나를 좋아했다. 귀여운 남자한테 매력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오빠’같이 어른스럽고 분위기 있는 사람에 목을 매는 일관성 있는 사람이었지만, 내게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B에게는 예외적으로 마음이 끌렸다.


B의 별명은 ‘워리’였다. 소쓰(A의 별명)에 비하면 뭔가 귀여운 별명이지 않은가. 그러나 B와 만난 지 한참 지나 알게 된 그 별명에는 무시무시한 의미가 감추어져 있었다. ‘워리'는 바로 개들이 ‘월! 월!’하고 짖는 소리에서 착안된 별명이었다. 성격이 개 같아서 친구들이 ‘월이야’하고 부르다가 ‘워리’가 됐다는 것이다. 나라는 멍청한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구나. 오 마이 갓….


 B와는 3년을 만났고, 그는 듣던 대로 괜히 워리가 아니었다. 귀여운 댕댕이 뒤에는 맹렬한 사냥개가 숨겨져 있었다. B는 내가 좋을 때도 '싫을 때도' 있는 그대로 기분을 드러냈다. 나는 그의 본의 아닌 밀당에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겨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그때의 나는 내 인생에 연애가 함께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인생 전체가 연애에 속해버린 작은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나는 B와 다툰 다음날이면 감정의 소용돌이에 지배당해 학교를 빠지기 일쑤였고, 그런 날은 신입생 내내 반복됐다. 결국 나는 1학년 첫 학기의 학점을 0.6이라는 숫자로 기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는 자아가 소멸될 것만 같았고, 나는 원치 않았지만 B에게 떠밀리듯 이별을 고했다.

열정을 바친 상흔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나는 B와 헤어진 후, ‘지난날의 아픔에서 영영 벗어나지도 못하고, 평생 추억만 곱씹으며 살면 어떡하지?’라고 걱정했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봄은 다시 찾아온다. 나는 4계절이 세 번쯤 지난 어느 날, 현 남편 구 남친 H를 만났다. H와 연인이 되기 전까지를 떠올려 보면, 늘 친한 친구처럼 즐겁고 편안했다. 우리의 만남은 내 일상에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그러다 보니 잘 보이려고 나의 일부를 숨기지도 않았고, H에게 나를 다 맞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H는 나의 보잘 것 없는 자취방 이사를 도와주거나, 집 앞 곰장어나 곱창 같은 친근한 메뉴를 함께 먹자며 나를 불러냈다. 나는 늘 알겠다고 했다. (알겠다던 나의 대답이 하트 시그널이었다는 사실을, 결혼 후 장범준의 ‘꽃송이가’라는 노래 가사를 곱씹으며 알게 된다. ‘넌 한 번도 그게 안된다는 말이 없었지~’) 그렇게 우리는 친구처럼, 때론 연인처럼 5년을 투닥거리다가 끝내 결혼했다.


H와 결혼 준비를 시작할 무렵, 나는 문득 수민의 조언이 떠올랐다.  “네 눈에 그 사람이 멋있어 보이는 걸 떠나서, 동성친구들 사이에서 그 사람 소문이 어떤지도 잘 봐봐. 그게 중요해.”

다행히도 H는 여러 동성 친구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H가 정이 많고 세심해서, 행여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더 배려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H는 9년을 꽉 채운 기간동안 나에게도 변함없이 다정하고 세심했다. 이쯤되면 수민의 조언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느껴진다.

나의 연애 오답노트를 통해 깨달은 중요한 점은 잘 보이려고 나를 꾸며내지 않는 것, 상대방을 배려하느라 무리해서 다 맞추지 않는 것이 아니었을까. 서로의 솔직한 민낯을 사랑할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사실은 좀 더 바랄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결혼, 확신따윈 없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