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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먼 Dec 28. 2020

이렇게 된 이상 IT업계로 간다

문송한 김 사원이 IT회사에서 일하게 된 이유

나는 택배 받는 것도 너무 좋아하고
식당에서 메뉴판 보는 것도 너무너무 좋아하는데
그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이 일을 좋아해요.
- 드라마 <멜로가 체질> 중에서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더라?


김 사원은 O2O 스타트업에서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마케팅 대행사를 다니다 이직한 지 만 일 년이 지났다. 회사를 옮긴다고 했을 때 그를 알던 이들은 신기해했다. 대학시절 그는 문송(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의 정석 같은 사람이었다. 인류학을 전공한 걸로 모자랐는지 부전공으로 정치학을 골랐다. 문과생이면 한 번쯤 기웃거린다는 경영대 수업에 발도 들인 적이 없다. 프로그래밍에 대해서는 더더욱 문외한이었다. 멋쟁이 사자처럼이나 생활코딩처럼 쉽게 코딩을 배울 수 있는 채널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다큐멘터리 동아리의 열성 회원이었던 김 사원은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었다.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고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참 멋져 보였다. 졸업학기에 신문사에서 인턴 기자로 일하면서 알게 되었다. 언론인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나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소명의식을 정말로 갖고 있는가? 그냥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호기심만 많았던 것 아닐까? 스스로 의구심이 들었다. 덜컥 겁이 났다. 졸업까지 세 달 밖에 남지 않았다. 일반 기업들이 상반기 공개 채용을 시작하던 참이었다. 취업은 해야 하는데 갑자기 지원 직무를 바꾸려니 똥줄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어떤 일을 재밌게 잘할 수 있을까? 급히 고민을 다시 시작했다. 글 쓰고 영상 만드는 걸 좋아하니 광고 제작과 잘 맞지 않을까? 콘텐츠를 기획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저널리스트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몇몇 마케팅 대행사에서 신입 사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기획 직군으로 지원해서 운 좋게 합격했다. 아니나 다를까 입사 동기들 중에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이 많았다. 광고 대행사의 업무 방식이 겉에서 보는 것과 다르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은 터였다. 그래도 TV나 유튜브에 올라오는 멋진 광고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다들 들떠 있었다.


부서 배치를 받는 날, 김 사원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자, 웹서비스 운영팀으로 갑시다
 

웹서비스 운영팀이라니. 그런 팀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이 회사는 클라이언트의 웹사이트 운영 업무도 대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브랜드 사이트 운영도 중요한 마케팅 활동의 일환이다. 그러나 김 사원이 맡게 될 업무는 마케팅 기획보다는 웹 기획에 가까운 일이었다. 처음 맡은 업무는 디자인 가이드와 웹 접근성 준수 여부를 검수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기획자로서의 커리어가 시작되어 버렸다. (계속)


제너럴리스트의 생존에 대한 고민


세상은 누구에게나 자신만이 들어갈 수 있는 아주 작은 틈 하나쯤은 주는 것 같다.
- 고재형 지음, <문과 생존 원정대> 중에서


IT업계에서 일하는 문과생 이야기는 이미 많다. 인문학을 전공했지만 코딩을 배워 프로그래머로 취업한 친구들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리콘 밸리를 그리다>의 저자로 유명한 에어비앤비 개발자 유호현 씨도 문과 출신이다. 그러나 같은 IT 회사를 다니더라도 문과 출신 개발자와 기획자의 고민은 많이 다를 것이다.


한때 <문과 생존 원정대>라는 이름의 페이스북 채널이 인기였다. 인문학을 공부했지만 전공과 관계없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 혹은 전공을 살려보려 애쓰는 이들의 이야기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다. '어차피 문과는 백수'라는 헤드카피에는 인문학의 쓸모 혹은 전문성에 대한 자조 어린 푸념이 담겨 있었다. 기계공학의 쓸모, 신소재공학의 쓸모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학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면 예비 프로그래머로서의 전문성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역사학 또는 심리학을 공부했다고 하면 그저 재밌는 걸 배웠겠구나, 하는 이야기를 듣기 마련이다.


이곳에서 나의 쓸모는 무엇인가


졸업 후 기획자로 일하면서 비슷한 고민을 계속하게 됐다. 기획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디자이너나 개발자에 비해서 기획자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불분명해 보인다. 마케팅 대행사에서 AE(Account Executive)라는 직책으로 일할 때 콘텐츠 기획, 서비스 기획보다 클라이언트 대응이나 비용 청구, 정산 업무가 더 많았다. 하루는 선배에게 AE의 역할이 뭐냐고 물어보았다. 늘 사과하는 사람(Alwayse Excuse me). 클라이언트와 제작팀 사이에서 커뮤니케이션의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을 테다. 하지만 종종 스스로 끝없는 문송함의 연장선 위에 서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전문성에 대한 고민도 계속됐다. 직함이 자주 바뀌었다. AE에서 프로젝트 매니저(Project Manger)가 되기도 하고, 서비스 기획자라고 불리다가 제품 관리자(Product Manager)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누구든지 나를 쉽게 대체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기소개서에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라는 말을 많이 쓰곤 했다. 여러 분야에 대해 넓게 이해하고 있다는 건 반대로 그 어떤 분야에 대해서도 전문성이 없다는 뜻 아닐까? 문과 출신으로 수년 간 곱씹어온 질문이지만 아직 경력이 짧은 주니어라서 걱정이 더 컸다.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을까?


이렇게 된 이상 IT업계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첫 이직이라 두려움이 컸다. 이 회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다행히 일 년을 무사히 넘겼다. 좋은 동료들을 만난 덕분에 서비스 기획자 혹은 제품 관리자라고 하는 직무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배울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주니어 기획자로 일하면서 느낀 점을 함께 나누고 싶다. 반대로 비슷한 연차의 동료 기획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나는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무엇보다 소중한 이 일을 -
함께 하고 싶다는 거예요.
막 아니고 잘!
- 드라마 <멜로가 체질> 중에서


잘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분명한 건 지금 하는 이 일이 재미있다는 거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내가 만든 서비스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폴짝폴짝 뛴다. 책임감도 그만큼 커졌다. 저널리스트 못지않게 서비스 기획자에게도 소명 의식은 필수다. 좋아하는 일이니까 잘하고 싶다. 언젠가는 고객들에게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나 한 번, 믿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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