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데이먼 Dec 30. 2022

2022년 회고

묵묵하게 하루를 쌓아 올리는 즐거움에 관하여

당신보다 일찍 잠에서 깨면 / 당신은 돌아 누워 / 얼굴을 배게 쪽으로 돌리고 / 머리카락이 흩트러진다
당신을 보고 있노라면 / 사랑에 놀란다 / 행여 눈을 떠 / 햇빛이 당신을 놀라게 할까 두렵다
하지만 햇빛이 사라지면 / 내 가슴과 머리가 / 당신을 위해 얼마나 / 무너져 내릴 것인가
태아처럼 안에 갇힌 목소리들은 /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거란 / 두려움에 떤다
벽 속의 틈이 희미하게 빛난다
비가 우울하게 내린다
나는 신발 끈을 묶고 / 아래층으로 내려가
커피를 올려놓는다
- 영화 <패터슨>의 패터슨의 시(詩) <Glow>


삶의 리듬에 대해 생각할 때 두 편의 영화를 떠올린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해안가로의 여행>에서 미즈키가 소녀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장면. 소녀의 어머니는 더 경쾌하고 빠르게 연주할 수 없냐고 아이를 다그친다. 그러나 이 영화는 헤어짐의 속도에 관한 이야기다.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지나서야 대낮의 유령이 되어 돌아온 미즈키의 남편. 왜 이제야 나타났냐며 반문할 수도 있으나 적절한 삶의 리듬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세상이 정한 기준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속도로 가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 이제 미즈키는 피아노를 치는 소녀에게 말한다. 다시 처음부터, 너의 템포로 연주하렴.


실제로 원래의 빠르기로(A tempo)라는 음악 기호가 있다고 한다. 짐 자무시의 <패터슨>이 바로 세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속도대로 살아가는 영화다. 별다를 것 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패터슨은 새로운 시상(詩想)을 찾아낸다. 반복되는 패턴이 오히려 패터슨 특유의 리듬감을 만들어 낸다. 패터슨에 사는 패터슨.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패터슨. 느린 운율이 조성하는 시간의 여백 사이로 꿈과 말이 개입하기도 한다. 쌍둥이들에 대한 꿈과 쌍둥이들에 대한 시. 나의 눈이 관찰하는 세계와 나의 글이 만들어내는 심상이 조응하며 새로운 선율을 지어낸다.


2022년은 원래의 빠르기로 돌아오는 훈련의 연속이었다. 스프린트를 멈추고 잠깐, 이게 맞아요?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 많았다. 일상에서는 작은 루틴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커리어에 대한 생각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모든 것은 결국 내가 소중한 사람이며, 내 존재의 의미는 나와 관계 맺는 사람들로부터 온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었다. 내 삶의 리듬에 집중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소홀해진 것 같아 미안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메트로놈이 안정감을 찾아야 밖으로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내면에 집중하고 침잠하며 한 해를 보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 나의 속도는 적절한가. 너무 빠르거나 느리진 않은가 돌아보며 글을 쓴다.


One Two Three Four


나를 해치면서 해야 할 일은 없다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리더십 상담을 받은 일이 있다. 선생님이 첫 회차만에 나를 완전히 꿰뚫어 보시는 바람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도움이 많이 됐다. 필요 이상의 것을 책임지려 하는 성향이 있는데 잘못하면 큰 독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가족 관계든 회사 문제든 책임져야 하는 일만 고민하라는 조언이었다. 예컨대 팀의 문제들을 고민하다 보면 더 큰 문제들을 같이 생각하게 된다. 실이나 부문 단위의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팀이 겪는 어려움도 해결이 어렵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책임의 타래를 내가 맡은 수준에서 끊어 내는 게 개인과 조직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했다. 생각을 잘 매듭짓지 못하자 극약 처방을 내리시기도 했다.


돈 받은 만큼만 일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돈 받은 만큼만 일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예컨대 팀장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팀장 연봉을 받고 있을 것이다) 실장이나 부문장의 연봉을 받고 있는 게 아니라면 팀장은 팀 단위의 문제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뜻이다. 실이나 부문 단위의 문제가 생겼을 때 조언은 할 수 있지만 그 역할을 대신 책임지려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반대로 팀원들 월급까지 모두 빼앗아 받을 게 아니면 팀원의 일은 팀원에게 맡긴다. 팀원이 하면 100점 만점에 40점, 내가 하면 80점일 것 같아도 믿고 맡기고 필요할 때 코칭한다. 선 긋고 일하지 말라는 건 1~2년 차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라고 하셨다. 성장과 성과에 대한 조급함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주어진 책임의 한계 안에서만 일하는 건 너무 안전지대(Comfort Zone)에 머무는 것 아닌가? 상담 회기가 다 끝나고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 이다혜 기자님의 <퇴근길의 마음>을 읽어 참 다행이다. 20년을 기자로 롱런할 수 있었던 이유가 참 단순했다. 재밌는 일, 해야 할 일을 찾는 게 아니라 그저 하기로 한 일들을 하는 데 집중할 때 오래 즐겁게 일할 수 있다고 했다. 하기로 한 일을 한다. 매일 아침 떡을 빚는 떡집 사장님, 정해진 시간에 약속한 양의 글을 쓰는 무라카미 하루키. 묵묵하게 하기로 한 일을 하다 보면 솜씨 좋은 장인이 되고 희대의 작가가 탄생하는 것이다. 단순 명료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일상을 단조롭게 만들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출근하기. 퇴근 후에는 무조건 헬스장 들렀다 집에 가기. 명상은 꾸준히 하지 못했지만 애인과의 티타임이 좋았다. 하루를 함께 돌아보면서 감정을 나누고 바라보는 시간이 올해 내게 가장 소중했다. 남들이 보기에 특별할 일 없어 보이는 일상이지만 묵묵하게 하기로 한 일을 하다 보니 시간과 에너지에 대한 통제력이 조금씩 생겼다. 고정된 시간 블록들을 잘 관리하면 더 창조적인 일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에너지를 베풀 여유가 생기리라 기대한다. 커뮤니티를 새로 만들어보거나, 글을 쓰거나, 봉사활동을 하거나. 물론 이 또한 나의 템포로.


올해 동료 평가를 할 때마다 이다혜 기자님의 글의 한 문장을 인용하여 적곤 했다. 나를 해치면서 해야 하는 일은 없다. 우리 사회에서는 버티는 게 미덕이다. 삶이란 게 원래 고달픈 거고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믿는다. 특히 체력이 좋은 20대, 30대에 열심히 참고 달리는데 이다혜 기자님이 그러다 40대에 중환자실에서 꽤 고생하셨다고 한다. 결국 일을 하는 이유는 지속가능한 삶과 나의 행복을 위한 거니까. 10년, 20년 오래 즐겁게 일을 계속하려면 속도 조절이 중요하다. 동종업계 종사자인 내 짝꿍과 팀의 신뢰하는 동료들이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주어 참 감사하다.


다정함이 내가 싸우는 전략이다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사람들의 작은 그물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대단하지 않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물망 안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다.
-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데이비드 브룩스의 <두 번째 산>은 삶에 대한 생각을 크게 바꿔놓은 책이다. 룰루 밀러의 질문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중요성에 대한 회의로부터 출발한다. 억겁의 시간, 거대한 우주에서 우리의 존재는 왜 중요한가. 신으로부터 그 의미를 부여받기를 원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과학자의 삶을 경유하여 룰루 밀러는 연대하는 삶 속에서 비로소 서로의 존재가 서로에게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삶의 의미는 일방적으로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촘촘히 연결된 인연의 그물 안에서 스스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오직 연대와 사랑만이 우리의 존재를 빛나게 한다.


데이비드 브룩스 또한 더 큰 행복은 개인보다는 관계 속에 있다고 말한다. 개인의 성공을 위해 오르는 첫 번째 산보다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두 번째 산> 오르기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른 새벽에 사원을 오르고 기도하던 발리 사람들이 떠오른다. 나를 내려놓고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삶. 가족, 연인, 친구, 내가 속한 커뮤니티를 위하는 삶이 가져다 주는 영속적인 즐거움. 효율과 성과와는 거리가 먼 일인 것 같다. 고양이나 화초를 키우면서 효율과 성과를 말하지 않는 것처럼. 카타르 월드컵 16강 진출이라는 결과보다는 선수들의 노력과 투혼이 더 빛나는 것처럼.


30대는 야심을 가지고 달려야 하는 시기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이 때 바짝 달리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거라는 부담감이 컸다. 큰 일을 달성하기에 체력과 역량이 뒷받침이 되는 좋은 시기이기는 하지만 효율이 모든 선택의 기준이 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파친코>를 쓴 이민진 작가는 초고를 쓴 후 전체 아우트라인을 끊임없이 바꾸는 본인의 창작 방식이 비효율적이며 야심있는 자들에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본인은 버티는 힘이 있으니 재능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할 일을 한다고 했다. 처음 쓴 글이 쓰레기가 되고 3년, 5년의 시간이 걸려도 온전한 소설을 위해 비효율을 감수한다.


버티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잠시 주제를 우회해보자. 4년을 만나도 어떻게 계속 연인과 설렐 수 있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뉴욕타임즈의 <He Saved His Last Lesson for Me>라는 칼럼을 추천한다. 화상 영어 수업을 하는 미국인 선생과 한국인 학생이 장거리 연애를 시작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핵심은 사랑은 옥수수를 키우는 것과 같아서 매일 물을 주고 가꿔주지 않으면 시들어버린다는 것이다.


Love is like corn. Making love grow requires farming.
- Mackenzie Scibetta, <He Saved His Last Lesson for Me>


관계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억지로 하는 노력은 오래갈 수 없다. 고양이를 키우는 일도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고양이들이 사랑스럽지 않다면 귀찮은 일이 될 뿐이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종종 동기부여의 원천에 대해 물어보곤 했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게는 버티는 힘이 되었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동료들이 좀 더 편하게 즐겁게 일할까? 단순히 성과를 내는 데만 집중했다면 올 한 해를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같이 보고 나와 웨이먼드와 비슷한 사람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백하자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메타버스의 웨이먼드가 "다정함이 내가 싸우는 전략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가장 많이 울었다. 다정하면 물러 터지고 유약한 거라고, 좀 더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스스로 채찍질하며 보낸 시기도 있었다. 이제는 다정함이 가장 강한 힘이라는 단단한 믿음이 생겼다. 시간은 조금 더 오래걸리고 남들보다 덜 빛날지라도 결국 우리가 가꾸는 옥수수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거라고. 옥수수를 생각하면 많은 것들의 우선순위가 뒤바뀐다.


Jazz or Not : 순간에 충실한 삶


재즈에 빠졌다고 하면 주호민으로 입문했냐는 말을 많이 듣는데 <소울>과 <한여름밤의 재즈>가 입문서 역할을 해주었다. 김혜리의 필름클럽에서 최다은 PD님이 인용한 글이 재즈에 대한 완벽한 설명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나를 주장하면서도 상대와 맞추는 텐션과 균형감을 즐기면서 다양한 재즈 음악을 들었던 것 같다.


상대에게 맞추면서도 자신의 우선권을 주장하며, 끼어들 여지를 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공간을 요구한다.
- Ted Gioia, <How to Listen to Jazz>


나의 속도대로 가면서도 상대방의 발걸음에 맞추는 것. 모순되는 일인 것 같지만 - 재즈보다 쉬운 예시를 들어 보자면 - 운전 또한 균형이 중요하다. 내 페이스에 맞게 운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변 차량의 흐름에 맞춰 달리지 않으면 사고가 날 수 있다. 두 개의 변수가 균형을 이뤄야 하는 일이기에 순간의 판단이 중요하다.


공교롭게도 에릭 리스의 <린 스타트업>에서도 스타트업을 운전에 비유한 바 있는데 로켓 발사와 달리 운전이 어려운 이유는 공식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내 연습장에서 수업을 듣고 운전 면허 시험을 본 적이 있다. 좌회전을 하려면 핸들을 두 바퀴 반을 꺾으라고 배웠는데 실전에서 그렇게 했다가 엉망진창이 됐다.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에 어렵다. 얼마나 핸들을 꺾어야 하는지, 지금 멈춰야 할지 가야 할지 머리로 외울 수 있는 게 아니라 몸이 체득해야 한다. 감각의 영역이기에 많은 반복과 훈련이 필요하다.


아직 초보운전이라 순간의 선택이 틀릴까봐, 잘못될까봐 겁날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럴 때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 단단한 감촉을 느껴본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도 여전히 핸들은 내가 쥐고 있다. 좀 돌아가더라도 다시 방향을 꺾어 목적지를 찾으면 된다. 길치라고 모두가 손가락질해도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잘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 대신 운전해줄 수는 없어도 조수석에서 지도를 함께 봐주고 응원해줄 사람만 있어도 우리는 즐거운 드라이브를 계속할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컬렉션 - 감정의 물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