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작.
"11월 27일 9시까지 로비로 와서 인사 담당자를 만나시면 됩니다."
새로운 직장에서의 첫날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딱히 옷차림에 크게 신경을 쓴것도 아니였고, 아침에 왁스를 발랐던 머리도 썩 맘에 들게 되지는 않았던것 같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나 자신을 신경 쓰게 되는지 몰랐다. 내 인식의 존재가 이처럼 선명하게 느껴지는지, 하는 말도 하는 행동도 내가 하고 싶은 말, 내가 하고 싶은 행동보다도 타인들의 인식의 영역에 있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할 것 만 같았다. "Be yourself"라는 말은 참이나 어려운 말이였다.
씨애틀 다운타운 한가운데 위치한 으리으리한 빌딩은 친숙하지만은 않았다. 레드몬드의 평화로운 마이크로소프트 캠퍼스의 생활이 익숙해진걸까. 로비에서의 짤막한 기다림 후에 인사 담당자를 만났다. 인사를 나누고, 몇개의 절차적인 서류를 작성하고 난 다음에 나는 바로 디자인팀이 있는 오피스로 안내되었다. 내 책상에는 새 맥북과 모니터와 몇가지 웰컴 서류들이 놓여져 있었고, 디자인 팀은 아침 미팅을 준비하고 있었다. 15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규모의 디자인 팀이라서 많이 반겨주고 많이 신경 써주는 느낌이였다. 몇 명의 사람들과 농담 따먹기 혹은 신상을 알기 위한 몇개의 질문들이 오가면서, 내가 관심을 받고 있다는 느낌은 사실 꽤나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과 인사를 마치고 나는 자리에서 컴퓨터 셋업을 하기 시작했다. 아웃룩을 깔고서 메일 계정 셋팅을 하는데, 텅 비어 있는 캘린더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전 직장에서 그렇게 치여 다니던 미팅들 때문에 빈틈 없이 꽉 차여 있는 캘린더가 생각 나기도 했었고, 이 '빈 캘린더가 앞으로 얼마나 채워질까'라는 생각이 또 들기도 했다.
그렇게 컴퓨터 셋업을 하고 사내 시스템과 관련된 부분을 보다가 그렇게 첫날을 보냈다.
두번째날 교통 체증이 어느정도 있는 40분 정도 되는 출근길에서 생각해 봤다. 이제 들어온 사람으로써 내 역할은 무엇일까. 나는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가치 있게 변환 시킬 것인가. 회사는, 특히나 큰 회사일 수록,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 처럼 파악하기 힘든 구조와 관계들로 엮어져 있다. 그 구조와 관계와 일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고, 지금 내 역할은 이런 기존의 시스템을 내 몸에 체득화 시키는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가지 트랙으로 나눠서 이 트랙들을 파악 혹은 준비 하기로 해본다.
1. Design track
이 트랙은 내가 이곳에서 더 디자인을 잘 하기 위한 트랙이다. 직접적으로 내가 혼자서 작업을 하고 디자인과 관련된 사항들이다. 디자인 툴은 무엇을 쓰는지, 디자인 프로세스는 무엇인지, 현재의 디자인 워크 아이템과 조직이 가고 있는 방향은 어느 방향인지 등등이다.
2. People track
대기업은 특히나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 보다는 같이 해야 하는 일이 많고,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내 디자인은 디벨로퍼의 도움 없이는 출시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팀 사람 뿐만이 아니라 업무와 관련된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어떤 분야에 일을 하는 사람인지, 디자이너라면 어떤 성향의 (Pure visual, interaction or motion etc.,) 디자이너인지 등등을 파악하는 일이다.
첫 매니저와의 면담. 첫 2주동안은 실제 업무를 할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을꺼라는 말을 들었다. 첫 2주는 '파악' 혹은 '학습'에 매진하고 현업에 뛰어들 준비를 하는 기간이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Acclimatization"이라는 단어를 매니저가 이야기 했는데 모르는 단어라 나중에 끝나고 나서 찾아봤다. 그래서 2주동안 무엇을 해야 하나 매니저와 이야기 하다가 사람들을 좀 알아야 겠으니, 앞으로 내가 할일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 리스트를 작성해 줄 수 없겠냐고 부탁했다. 그 사람들과 1대1 미팅을 잡아야 겠다 말했다.
몇 시간 후에 매니저한테 이메일이 왔고 그 이메일엔 약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적혀 있었다. "뭐? 30명?" 30명과 1대1 면담을 하는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매니저한테 해논 말도 있어서 안할수도 없었다. 스켸쥴을 잡고 거의 30개가 넘는 캘린더 인바잇을 보내는데만 거의 한 두시간이 걸린것 같다. 뭐 힘들긴 해도 잘된 일이였다. 이런 김에 내 소개도 하고 상대방도 좀 알아야 겠다 싶었다.
내가 2주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좀 많이 돌아오긴 했다. 맞다. 30명의 사람들과 1대1 면담이 내가 한 일의 전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외에 다른 업무들과 디자인 리뷰 미팅 등 몇몇 다른 곁가지 업무도 있긴 했지만, 주요 업무는 '사람 만나기' 였다.
많이 배웠고, 많은 지식들을 들었다. 디자인 프로세스에 대한 지식도 많이 쌓이게 되었고, 조직에 대한 이해, 일에 대한 이해도 많이 늘었다. 그런데 이 외에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한 질문이 있었다.
"새로 온 사람한테 조언이 있다면 무엇을 말해주고 싶으신가요?"
이 질문들에 대해 다른 대답과 공통적인 대답들을 들으면서 공통적인 묶음 같은걸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디즈니에서 일하는 방식이고,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여기에 정리를 좀 해두려 한다. 비난 디즈니 뿐만이 아니라 다른 조직에서도 충분히 가치 있는 포인트들 일수도 있겠다.
특히나 디즈니 안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무척이나 중요시 한다. 일을 진행하면서 서로를 도우는 분위기가 활성화 되어 있는것 같았고, 같이 업무를 진행하는 사람들로부터 신뢰가 무척이나 중요하다 생각이 들었다. 타인으로부터 얻는 신뢰, 내가 필요할때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 아는것, 그리고 내 업무를 다른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등이 이 범주 안에 포함 될테다.
미국에서 일을 하면서 전반적인 Theme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오지랖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본인이 일을 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게 중요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아, 길버트는 이 일을 잘 했었고 이런거 물어보면 바로 바로 대답할 수 있어' 라는 인상을 남기는게 중요하다. 일을 했으면 다른사람들에게 알려야 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 보다 조금 더 나아감이 중요하다.
디즈니도 큰 기업이고, 하나의 프로덕트가 출시 되기 위해서는 많은 레이어와 리뷰를 거쳐야 한다. 이 상황들을 거쳐 가면서 디자인에 대한 비판도 많이 들을 것이고, 말도 안되는 의견들도 많이 들을 것이다. 그래도, 모두가 지금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공통된 목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고, 본인의 디자인을 설파 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내 디자인이 내일 당장 출시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참을성을 가지고 한걸음 한걸음 출시에 다가설 수 있어야 하겠다.
Subject matter expert는 어떤 도메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을 이야기 한다. 내가 하고 있는 분아야 대해서는 내 매니져 보다도, 혹은 부사장 보다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사실 이건 어떤 이미지 같은거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내가 어떤 도메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인정되기 시작하면, 그 분야에 대해서는 내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건 어떻게 보면 100미터 달리기를 할때 스파이크가 달려 있는 신발을 신고 뛰느냐, 구두를 신고 뛰느냐의 차이만큼 강력하다.
디자인 프로세스를 보아하니 디자인 리뷰가 상당히 많아 보였다. 이 리뷰들을 다 소화해 내려면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양이 꽤나 많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디즈니에서는 프로토타입이 디자인 프로세스 안에 녹아 들어가 있다. 항상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움직이는 모션까지 보여줘야 하는게 문화로 자리 잡은듯 했다. 특히나 디즈니는 전통적으로 스토리 텔링을 강조하는 회사라서 실제 실물과 함께 보여 주는게 기본적인것 처럼 보였다.
글을 쓰다보니 자기 개발서 따위에나 나와 있는 항목들이 열거 되어 버렸다. 이런것들을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는게 필요하다 싶었다. 내가 디즈니로 이직을 한 이유는 더 나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함이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위 다섯가지 이야기들은 큰 도움이 될꺼라 믿는다.
앞으로의 생활에 약간의 익숙해짐과 낮섬이 공존하는 가운데 나는 괜찮은 디자이너라고 외칠 수 있기를 바란다.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