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aphorism
사실 알고 보면 실제 생활에서 써먹지 못하는 지식은 하등 쓸모가 없는 지식들이다. 강연에 참석하여 강연자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힐링 되는 느낌을 잠시 받고서는 강연장 문을 열고 나오면 제자리다. 그래서 지식을 습득할때면, 공감 보다는 본인의 삶에 어떻게 써먹을지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해야 한다.
지식과 실천은 한쪽 다리 같다. 지식만 배우고 실천을 하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다리가 찢어질 것이며, 지식 없이 실천만 한다면 역시나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다리가 찢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지식을 배우고 그 지식을 실천해야 하며, 실천을 하면 무슨 지식을 배웠는지 회고해야 한다.
우리는 돈을 주고 하는 행위를 놀이라고 하며, 돈을 받고 하는 행위를 일이라고 한다. 돈을 주고 가죽 공예를 배우고 있다면, 그것은 놀이 이고, 돈을 받고 가죽 공예를 한다면 그것은 일이다. 같은 행위인데 돈을 받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본질이 달라진다. 하고 싶은것과 하기 싫은것의 그 얇은 차이.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인 삶과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 —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이성복, 2001
내 안에 항상 남아 있는 이성복 시인의 글귀. 우리네 삶은 항상 느끼기보다는 사실로 인정하려고 하며, 안전으로 가려고 한다. 그래서 직장을 가지고 안정적인 월급을 받으려 하고, '의사, 판사' 같은 타이틀을 붙여서 느낌에서 사실로 정의되길 원한다. 이게 뭐 전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나도 그러고 있기 때문에. 그래도 나는 여전히 삶에서 느끼고 싶어하고 위험해지고 싶어 한다.
UX디자인에서 Iteration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Iteration이 진행 되면 될수록 디자인이 구려지는 경향이 있다. 그때마다 큰 믿음과 희망이 필요하다. 이 구려짐이 일시적이고, 우리는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 이 뒤에 더 나은 디자인이 존재한다는 믿음 같은거.
우리가 쓰는 모든 형용사는 비교급이다. '이쁘다', '좋다', '맛있다' 라는 등등의 모든 형용사는 '무엇보다' 혹은 '이제까지 내가 알던, 경험했던 것들보다' 라는 말이 생략 되어 있다. 즉, 경험은 수준을 만들고, 기준을 형성한다. 그런데 그 수준과 기준이 진짜 내것인지, 다른 누군가의 수준과 기준의 짬뽕인지는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서양 사람이건 동양 사람이건 모두 같은 사람이지만 다르다.
나는 이전의 나와 같기도 하지만 다르다.
옛 친구와의 관계는 예전과 같기도 하지만 다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모든것은 같으면서 동시에 다르다.
그래서 바로 지금 당장이 소중하다.
무언가를 잘 하는 사람들을 가많히 보다보면 이상하게 나도 그걸 하고 싶어진다. 그만큼 무언가를 '잘'하는 경지에 오르는 사람들을 보면 쉽게 쉽게 척척 해내곤 한다. 그림을 그리는 밥 아저씨 처럼. 그런 사람들을 보면 상당히 매력적이다. 아마 어려운 것들을 쉽게 하는 사람들은 그런 기술들이 몸 안에 들어와 체득화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술의 또 다른 감각화 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