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리 Feb 19. 2018

대기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한다는 것.

주니어 디자이너에서 시니어 디자이너로.

나는 2009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까지 3개의 회사를 거쳤다. 공교롭게도 그 3개의 회사는 모두 대기업이었다. 모든 회사는 그만의 특성을 지니고 있듯이, 대기업에서 일하는 디자이너 역시 그만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오늘의 글에서는 대기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 한다. 내 혼자의 작업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협업이 필수적이고, 어떤 시스템 안에 속해서 하는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대기업에서 일하다 보면 항상 재밌는것만 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난 그냥 회사원이지 뭐’ 이러다가도 가끔 재밌는 것 혹은 이쁜 것들을 디자인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 ‘그래, 난 역시 디자이너였지’라고 문득 정신 차리며 약간의 위안 같은 것을 얻게 된다.


첫 마음. 

이제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딛은 지 거진 10년이 다 되어간다. UX디자인이라는게 세상에서 큰 역할을 하기 시작한게 오래되지 않은만큼, 'UX디자이너란 누구인가'에 대한 관점과 정의는 달라졌다. 물론, 전반적인 산업계에서도 디자이너에 대한 대우도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엔지니어들과 비슷하게 대우를 받고, 회사 안에서 꽤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중요한 의사결정들을 내리는 축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산업계에서 바라보는 디자이너에 대한 관점 변화는 역시 내가 일하는 방식, 관점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물론 연차가 쌓였다고, 대기업의 큰 의사결정권자가 되었다거나 대단한 디자인 구루가 된 것도 아니지만, 내가 바라보는 디자이너의 정의 혹은 자세는 조금씩 변형되어 갔다. 오늘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좀 생각해보려고 한다. 


맨 처음,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달고 사회로 나왔을 때로 한번 돌아가 보자. 학교에서 ‘우리는 유저의 대변자야, 유저를 위해야 해’라는 생각이 훈련된 후에 처음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UX 디자이너는 어떤 신성한 영역 같은 곳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PM도, 개발자도, 정작 사용자에게 진정으로 공감하고 위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종종 그들과 꽤나 긴 토론과 싸움 같은 것들도 일어나곤 했었다. 개발의 효율이나 프로젝트 예산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나는 유저를 위하는 사람이었고, 그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내가 디자인한 것과 똑같이, 아주 똑같이, 개발이 되어 있지 않으면 종종 가서 따지곤 했었고, Dark theme을 넣어야만 한다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었다. 이상향을 추구했고, 완벽함을 추구하고 싶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유저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내 역할에 충실히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럴 때면 종종 PM이나 개발자들은 자기가 디자이너인 양 직접 디자인을 뜯고 크리틱을 해대기 시작했다. 현실적인 이유를 들면서 개발 예산이 되지 않는다, 리더십의 생각은 너의 디자인과 다르다, 이 디자인 별로인 것 같다 등등 마치 그들은 ‘디자이너가 대단한 거야? 나도 디자인 보는 눈 있다고’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대기업에서 연차가 쌓인다는 것.

그때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고, 디자이너는 지금은 업계에서 혹은 사내에서 꽤나 존중을 받는 위치가 되었다. (예전에 비해서) 꽤나 괜찮은 연봉을 받으며 이제는 ‘그래, 디자이너가 말하는데, 뭔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겠지’라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꽤나 기분 좋은 일이다. 이런 변화는 기분 좋은 인정받는 변화였지만, 그만큼 중요한 의사결정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이상 사용자를 대변하는 일보다는 ''을 실현해 나가는데 힘써야 할 때가 많이 생기게 되었다. 디자이너도 이젠 이상향을 추구하기보다는 실용주의적 입장을 견지한 채, 회사의 목표를 달성하는 일원이 되어 버리는 변화를 가지고 왔다. 시니어가 되어감에 따라서 회사와 조직의 전체적인 콘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향상되었으며, 어떤 이상적 디자인을 펼치는 일 보다도 사내에서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시장에서 빛을 받을 수 있도록 통찰하고 끌고 나가는 현실주의적 능력이 향상되었다. 대기업에서 내가 디자인 한 제품이 출시된다는 건, 디자인이 중요할 뿐만이 아니라 윗사람들을 설득하고, 예산을 따 내고,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는 등 많은 보이지 않는 일들이 필요하다. 


이 정도로 주니어와 시니어의 차이점을 정리하면 좋겠다. 

주니어 디자이너:
이상주의적 디자인을 만들어 내며, 항상 디자인적 완벽함을 추구한다. 그 이상적 디자인은 종종 실현가능성에 약점을 보이곤 한다.

시니어 디자이너:
회사의 조직적 콘텍스트 및 이해 관계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출시 가능한, 실현 가능한 디자인을 만들어 낸다.


이런 입장의 변화는 과연 경력이 쌓인 결과라고 볼 수 있는가? 이제 유저를 보는 시각은 희미해지고, 이제는 회사에서 성공 가능한 디자인을 만들어내는데 더 우선순위가 생긴 것인가? 이상적이고 내가 추구하는 디자인을 선보이는 것 보다도, 리더십의 생각과 비즈니스 골에 맞춰서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 경력이 쌓인 결과인가? 만약 이상적이고 완벽한 디자인을 선보인다 한들, 그 디자인이 출시되지 못한다면 그 디자인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균형.

물론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건 출시 가능한 디자인은 이상적이지 않거나 추구하지 않는 디자인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극명하게도 이건 균형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상적인 디자인과 실현 가능한 디자인 사이의 균형. 실현 가능한 디자인이란, 기술적 구현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목표, 리더십의 생각, 비즈니스 골, 조직의 콘텍스트와 얼마나 맞춰져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실현 가능한 디자인을 한다고 해서 사용자를 생각 선상에서 제외시켜 논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아직도 사용자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내 관점은 조금 변경되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디자인이 어떻게 하면 출시될 수 있을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디자인 프로세스 중에 사용자를 생각함과 동시에 이해 관계자들, PM, Engineer들과 어떻게 하면 협업을 더 효율적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추가 되었다. 


최근에 이런 내 디자인적 입장 변화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았다. 연차가 쌓인다는 건 사용자에 대해서 덜 생각한다는 의미인가? 회사 내에서 디자인의 목소리는 큰 의사결정을 내리는데 더욱 커졌고, 그 큰 의사결정 안에 사용자 보다도 회사의 목표가 더 크게 들어와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디자인의 임팩트와 영향력은 더욱 커졌음이 분명하다. 좋은 디자인은 회사에 돈을 가져다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커진 디자인의 임팩트와 영향력이 부정적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사용자가 아닌 비즈니스에 초점을 둔 디자인의 예를 보자. ‘시간이 돈이다’라는 말은 현대 사회에 와서 ‘사람들의 관심이 돈이다’라는 말로 바뀌었다. 그래서 회사들은 사용자의 경험을 위한 디자인 보다도 사람들의 관심을 최대한 끌기 위한 디자인들을 선보인다. 그래서 아래 그림과 같은 이런 디자인이 출시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페이지를 디자인한 디자이너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디자인했을까 궁금하다. 이 디자인이 사용자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는가? 


난 순진한 어떤 사용자를 순수하게 위하는 이상주의자는 아니다. 만약 사용자를 위한다면, 공짜로 모든걸 풀면 된다. 그러면 사용자 경험은 극대화로 올라간다. 그러나 회사는 지극히 현실주의적 공간이고, 회사는 사용자의 골이 회사의 골과 맞춰지지 않는 이상 제품을 개발할 예산을 할당하지 않는다. 즉, 손해가 되는 사용자 경험은 출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경력이 쌓여갈수록 사용자의 골보다는 회사의 골을 더 생각해야 한다면 그것은 맞는 이야기 일까? 회사가 가끔 내리는, 비즈니스 골 중심적 바보 같은 의사결정을 사용자의 입장은 견지하고서는 바로 잡아줄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요즈음 우리가 출시하는 디지털 프로덕트들은 사람들에게 장기적으로, 단기적으로 꽤나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 영향은 가끔은 사람들이 필요한 이상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편리하게 시청할 수 있는 수동적 콘텐츠 소비 형태 덕분에 더 이상 책을 읽거나 긴 글을 읽기를 부담스러워하고, 사용자의 끊임없는 관심을 요하는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때문에 사람들과 만나는 동안에서 휴대폰을 들여다 보기에 바빠졌다. 그만큼 우리의 어깨는 무겁다. 장기적으로든 단기적으로든 우리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리처드 부캐넌의 말처럼 우리가 출시하는 프로덕트는 우리가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선명한 논증이다. 본인의 디자인이 전달하고 있는 '좋은 삶'의 비전은 무엇인가. 


예전으로 돌아갈 때도 되었다. 조직의 콘텍스트를 읽는 것도 중요하다.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 하지만, 우리는 애초부터 사용자의 대변인이었다. 회사의 사장님보다도, PM보다도, 개발자보다도 가장 중요한 고객은 사용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그래야 한다. 회사에서 뭐라고 하던, 중요한 핵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그러니, 


F**k it. Let’s do i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