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Theatergoer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애할 권리 Nov 03. 2017

연극 <라빠르트망>

질 미무니 영화를 본 고선웅의 해설

*이 글에는 <라빠르트망>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c) LG ARTCENTER


연극 <라빠르트망>의 표면적인 내용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글을 쓰는 앨리스와 연기를 하는 리자는 친구 사이입니다. 앨리스는 우연히 만난 막스라는 남자를 좋아하게 되죠. 그래서 막스에게 접근할 기회를 노립니다. 하지만 막스는 우연히 앨리스가 찍은 비디오 속 아름다운 여자, 리자를 보고 사랑에 빠져요. 자, 이제 엇갈린 사랑의 짝대기가 시작됩니다. 막스는 리자에 대해 수소문해 그녀를 따라다닙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자가 막스와 막스의 친구인 루시앙이 있는 구두 가게를 방문합니다. 막스에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인데 놓칠 순 없었겠죠. 마침 리자가 주문하려던 37 사이즈의 빨간 구두의 재고가 없자, 막스는 리자의 연락처를 받고 적극적으로 다가갑니다. 호감과 호기심의 감정이 사랑으로 흡수되는 순간, 리자의 아파트에서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눕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앨리스가 목격합니다. 내가 먼저 찜한 사람인데, 어찌 이런... 하는 눈빛으로 앨리스는 속이 타들어갑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로맨스도 잠시, 리자는 자신에게 찾아온 직업적 기회를 따라 해외로 떠나게 됩니다. 리자는 엘리스에게 자기 대신에 막스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리자는 앨리스의 감정을 몰랐던 거죠. 앨리스는 편지를 찢어버립니다. 그렇게 막스와 리자는 이별하고 시간이 흘러요. 그 사이 막스는 돈 많고 참한 약혼자를 만나 성공길에 들어섰고, 리자는 유부남과 복잡한 사랑을 정리하는데 골머리를 썩고 있습니다. 그리고 앨리스는 배우로 활동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죠. 그리고 또다시, 세 사람은 운명의 장난에 휘말립니다. 중요한 건, 여기서부터 일어나는 사건은 앨리스의 각본에 따라 전개된다고 볼 수 있는 거죠. 앨리스는 자신의 정체를 속여 막스에게 접근하고, 막스는 과거의 리자를 잊지 못하면서도 앨리스의 묘한 모습에 호기심을 갖습니다. 이때 앨리스는 막스의 친구인 루시앙과 사귀고 있었습니다. 루시앙을 통해 막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거죠. 앨리스는 두 남자를 속이고, 게다가 리자에게도 이 상황을 숨깁니다. 하지만 거짓말도 한계에 다다르게 되어 결국 막스에게 거짓말을 들키고 말죠. 앨리스는 막스에게 자신이 그동안 써놓은 일기를 건네고 사라집니다. 맨 처음 만난 그날부터 좇아온 흔적을. "누가 먼저 당신을 사랑했는지 아냐"는 말을 남긴 채.




(c) LG ARTCENTER

이 작품은 인물별로 서로 다른 사랑의 가치와 열망을 보여줍니다. 막스의 시점으로 보면 <신데렐라> 속 왕자처럼 유리 구두(여기서는 빨간 구두겠죠)의 주인을 찾는 이야기가 됩니다. 막스는 리자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에게 구두를 신겨주며 감정이 불타올라요. 리자의 발에 딱 맞는 빨간 구두는 막스에게 운명의 상대를 찾았다는 신호이자 열쇠가 됩니다. 그토록 뜨겁게 사랑하던 여자가 갑자기 홀연히 떠나니, 영문도 모른 채 이별한 막스는 그녀를 마음 한 켠에 꾹꾹 담아뒀겠죠.


리자는 자기감정에 솔직하고, 현실적이며, 자기애가 강해 보여요. 막스처럼 순정파라기보다는 사랑보다 자신의 삶이 더 중요하고, 기회가 있는 곳을 향해 망설임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죠. 리자의 자유분방하고 정착하지 않는 성향이 이 이야기의 윤활유처럼 작용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앨리스는 열망이 강한 인물입니다. 감정을 나누는 사랑보다 소유로서의 사랑을 하죠.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그녀가 있어요. 그러니까, 엘리스가 바라본 상황. 어쩌면 이 영화 전체는 그녀가 쓴 일기일지도 모르죠. 리자에 대한 전사가 잘 그려지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c) LG ARTCENTER

연극 <라빠르트망>은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적 서사는 그대로, 꽤나 충실히 옮겼습니다. 가장 큰 차이를 말한다면, 영화가 관객을 오해하도록 이끄는 반면 연극은 관객을 이해하도록 이끈다는 거죠. 영화가 가진 오독의 서사를 연극은 다시 순서대로 재배치해 보여줍니다. 어찌 보면, 영화를 친절하게 해설해준 것도 같네요. 때문에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과 긴장은 덜해졌죠. 영화에서 던지는 단서들- 숏컷, 시점, 클로즈업, 플래시백 등등-을 연극에서는 사용하기 어려우니까요. 지극히 영화적이어서 흥미로운 작품을, 영화적인 요소를 전부 거둬냈으니... 이야기가 심심 해지는 건 피할 수 없다고 봅니다. 원형 회전 무대를 만든 연출은 다양한 장소에서 진행되는 서사를 물 흐르듯 이어 내세웠습니다. 대신 음악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상황 변화에 힘을 실었죠. 고선웅 연출의 연극 중, 가장 음악을 많이 쓴 작품이 아닐까 생각도 드네요. 무대와 조명의 색감은 도시적이면서도 회화적이어서 아름다웠습니다. 넓은 대극장 무대에서의 연극인데, 이질적이거나 비어 보이는 느낌 없도록 채웠다고 생각해요.


막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은 리자는 발레리나 출신의 김주원 배우가 연기합니다. 말보다는 행동, 그러니까 시각적으로 동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택한 셈이죠. 영화에서도 막스와 리자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꽤나 음악적이고 무용적인 감각이 묻어났는데, 연극에서 그 점을 더욱 부각하였죠. 이야기의 중요한 오브제인 빨간 구두도 그런 측면에서는 잘 어울렸어요.

(c) LG ARTCENTER

오히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캐스팅은 앨리스였습니다. 앨리스는 김소진 배우가 분했는데, 아주 예전부터 그녀의 연기를 봤었던 지라 이번 연극에서는 아무래도 영화와 다른 캐릭터 색을 가져가려는 게 아닐까 싶었죠. 김소진 배우는 신뢰감 있는 보이스와 명확한 딕션, 설득력 있는 어조와 눈빛을 가졌습니다. 단단하다고 해야 할까요? 슬퍼도 밝게 포장하고, 기뻐도 내색하지 않고, 화가 나도 분노를 억누르는... 그런 양가적인 감정 속에 흔들리지 않고 상황에 맞게 정확한 표정과 대사를 전하는 배우입니다. 하지만, 영화 속 앨리스는 불안한 캐릭터라 생각했거든요. 포커페이스가 잘 안 되는, 불안과 초조가 깃든 인물이요. 열등감도 강하고, 그래서 열망이 더 극한으로 치닫았던 것 같습니다. 배우의 차이라 생각되지만, 이번 연극에서 본 앨리스는 다르게 해석된 듯하여 흥미로웠습니다. 자아가 강해 보였어요.


정리하자면, 연극 <라빠르트망>은 영화 라빠르망을 본 고선웅 연출의 해설판 연극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선웅 연출의 직관적이고 유머러스한 연극적 연희가 이번 작품에도 어김없이 반영돼 있었습니다. 강한 뚝심과 확고한 개성을 가진, 그런 면에서 국내에서 보기 드문 귀한 연출이라는 생각이 이번 공연을 보면서도 다시금 스쳤네요.

매거진의 이전글 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