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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애할 권리 Mar 24. 2018

연극 <성>

프란츠 카프카가 만든 절대 권력의 미메시스

* 연극 <성>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c) 국립극단

연극 <성>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카프카의 유작이자, 미완성인 채로 끝났지만 그 자체로도 훌륭한 평가를 받는 작품이죠.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성으로부터 일을 의뢰받은 토지 측량사 K가 성으로 가기 위해 일주일간 마을에 머물면서 벌어지는 일이에요. 이 작품은 성이라는 공간을 모두가 믿고 있지만 아무도 본 적 없는 분명하지만 불명확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어요. 그 자체로 부조리고 '카프카적'인 설정이죠.


눈보라가 치고 매서운 추위가 엄습한 어느 날, K는 베스트 베스트라는 요상한 이름의 백작을 찾아 성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성으로 가는 길이 녹록지 않아요. 결국 가던 길을 돌아 마을에서 잠시 머물기 위해 여관을 찾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K를 경계하고, 달갑지 않아하며, 위협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K는 자신이 성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고 간신히 입증해 여관에 머뭅니다. 다음 날, K는 성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눈 앞에 뚜렷하게 보이는 성은 가도 가도 다다를 기미가 안보입니다. 성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계속 그를 부르고 있지만 K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죠. 그러는 와중에 조수와 심부름꾼이라는 사람들이 K를 도와주겠다고 찾아옵니다. 하지만 별 도움은 안되고 방해만 될 뿐이에요. K는 성에 사는 관리자 클람을 만나기 위해 헤렌 호프라는 주점을 찾아갑니다. 이곳에서 프리다라는 여자를 만나요. 프리다는 클람의 애인입니다. K는 클람을 만날 핑계로 프리다에게 접근하고, 프리다도 K에게 끌려 두 사람은 연인이 됩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K와 프리다에 집중됩니다. 결혼을 약속하고 프리다는 주점을 그만두고 K의 곁에 머물지만 떠돌이 신세죠. K는 학교 관리인 일을 맡아 교실에서 숙식하며 지내보지만, 그러는 사이에 프리다와의 오해와 갈등이 계속됩니다. 결국 프리다와의 관계는 끝나고 혼자가 된 K는 성을 향해 길을 나섭니다.

(c) 국립극단

성은 조직적이고 관료주의가 팽배한 곳으로 그려집니다. 낯선 땅에서 온 이방인 K는 내내 찬밥신세인데, 성의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 인정받았을 때 비로소 대접을 받습니다. 절대 권력 앞에서 나약해지는 이들의 모습을 자조적이고 풍자적으로, 한편으로는 그로테스트하게 그리고 있어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정상이 아닌 것 같거든요. 누더기 옷을 입고, 생기 없는 퀭한 얼굴이에요. 이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상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성의 억압과 권력자들에게 피로한 사람들이죠. 전체적으로 무대나 의상이 모노톤인데, 유일하게 K만 푸른색 옷을 입고 있어 튀는 것도 그가 동화될 수 없는 이방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대본은 이미경 작가가 각색을 맡았습니다. 전작 <그게 아닌데>와 <맘모스해동>을 인상 깊게 봤어요. 욕망에 흔들리는 나약한 인물들을 가지고 비극과 희극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들며 경쾌하게 표현했죠. 이번 작품에서도 그런 장점을 잘 보여준 것 같습니다. 일상적인 짧은 대사를 캐릭터의 특징으로 잘 녹여내기도 하는데, 몇몇 인물들을 통해 웃음 포인트로 자리합니다.


개인적으로 박동우 디자이너의 무대와 김태근 작곡가의 음악이 좋았습니다. 무대와 음악이 황량하면서도 처연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큰 몫을 합니다. 무대는 5층짜리 건물과 같습니다. 낮은 층에서 높은 층으로, 층마다 권력을 상징하는 것처럼 종횡으로 활용됩니다. 만들어지지 않은 저 꼭대기에 있을 절대 권력의 존재가 궁금해지는 형상이었어요. 어찌 보면 모두가 성에 갇혀 있는 것 같이 보여서, 꼭 감옥 같기도 했고요. 어딘 지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불특정 세계로도 보입니다. 공간 변화가 많은데, 무대가 효과적으로 반응합니다.


주인공 K는 박윤희 배우가 맡았어요. 개인적으로 박윤희 배우의 현대극 연기를 좋아해요. 특히 여자 캐릭터가 중심인 극에서 주연 같은 조연으로 나올 때가 많은데, 그럴 때 든든한 지지대 같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일상적인 연기를 잘하는데 튀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보조를 맞춰주는, 그러면서도 상대 배우와 좋은 케미를 보여주죠. 평범해 보이지만 상처와 외로움이 큰 인물, 찌질하고 촐삭대지만 정직하고 정 많은 인물을 잘 표현한다고 봅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전자에 해당하는 캐릭터였죠. K 자체의 표현은 좋았습니다.


다만, 해석에 있어서 다소 의문감은 듭니다. 특히 K의 애정문제에 관한 건데요. K가 프리다, 올가, 아말리아, 페피 등의 여자들에게 느끼는 감정이 명확하지 않아서 헷갈립니다. 프리다의 해석 역시 마찬가지예요. 두 사람이 만나서 관계를 시작했을 때부터, 과연 진심을 다한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서로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것인지가 애매합니다. 처음에 연극을 따라가면서는 K가 진짜 프리다에게 빠졌다고 생각했어요. 이후 다른 여자들을 만났을 때도 감정이 동하는데, 이는 (몹쓸 버릇이긴 하지만) K의 원초적인 외로움에서 비롯한 성적 행동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될 경우 프리다가 이상해집니다. 프리다는 K가 자신을 이용했다고 생각하며 배신감을 느껴서 그와 갈라지는데, K는 처음부터 감정적으로는 솔직해 보였거든요. 그리고 페피의 말을 빌려 보면 프리다는 계획적으로 K를 이용하고 내다 버렸는데, 그게 맞다고 하면 프리다의 헌신적인 행동들이 이상합니다. (페피의 말이 다 진실이 아닐 수도 있고요) 인물들의 감정선이 대본만으로는 명확하지 않은데, 연기에서도 그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물음표가 많이 남았네요.


연출에 있어서 아쉬운 점이 하나 크게 있었는데요. 바로 헤렌 주점을 문란하고 외설적으로 그린 장면입니다. 1막 중간지점쯤 있는 이 장면을 아주 길고 강하게 그려내요. 붉은 조명과 노골적인 몸짓, 강한 사운드. 뭐, 그렇게 그릴 수도 있죠. 하지만 이게 맥락 없이 이 작품에서 가장 세게 그려진 장면이 되어 버렸어요. <성>이 Castle이지 sex는 아닌 것 같은데... 왜 힘을 여기서 뺐는지 의문입니다. (원작 소설을 안 읽어봐서 그 부분이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연극 전체를 봐도 그렇게 까지 힘주어 그릴 장면은 아닌 거 같네요)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K가 다가갈 수 없는 미지의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그 치열함을 더 강하게 그려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에요.


전반적으로 <성>은 대사도 어렵지 않고 긴 시간이지만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연극입니다. (그러고 보니 각색을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흔히들 소설을 각색할 때 남용하는 내레이션을 안 쓴 것도 좋았고요) 특히 1막의 체감이 꽤 빠르면서도 천천히 단단하게 흘러간다는 느낌을 주어서 좋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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