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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애할 권리 May 12. 2018

연극 <피와 씨앗>

다수를 위한 희생은 정당한 것인가?


두산인문극장 '이타주의자' 기획의 두 번째 작품은 스코틀랜드 작가 롭 드러먼드 Rob Drummond의 <피와 씨앗> Grain in the blood입니다. 2016년에 발표된 비교적 최신작이네요. 드러먼드는 <퀴즈쇼> <불렛 캐치> 등 꽤 많은 대표작을 가진 작가이자, 활발하게 활동하는 배우이고, 연출이기도 합니다. 국내에서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이고, 저 역시 작가의 전작을 보지는 못했기에 <피와 씨앗>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c) 두산아트센터

<피와 씨앗>은 생명 윤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인간이 생명의 가치를 판단하고 그것을 함부로 통제할 권한이 있는지 묻죠. 이것은 종교로 보면 신의 역할이죠. 희곡에 들어가기 앞서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트롤리 딜레마'에 관한 이야기 합니다. 트롤리 열차가 다섯 명의 인부들이 일하는 쪽으로 달려오는 상황에서, 이들을 구하기 위해 한 명이 서 있는 쪽으로 철로를 돌릴 것인가? 혹은, 다섯 명의 인부를 구하기 위해 한 명을 밀어 열차를 멈출 수 있다면, 한 명을 희생시킬 수 있는가? 작가는 다섯 명의 목숨이 한 명의 목숨보다 가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죄책감과 마음의 짐이 생긴다고 강조하죠. 여기까지 보면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불가피함을 절대 가치로 이야기 하나 싶은데, 이 딜레마에 한발 더 나아가 희생자의 '도덕성'이라는 조건을 겁니다. 선한 자를 위해 악한 자를 희생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죠. 도덕성이 더해지면서 이 작품은 종교적 관념을 기저에 깔게 됩니다. 도덕성에 대해 가장 많은 판단이 이뤄지는 것이 바로 성서, 신앙이니까요.

(c) 두산아트센터

이 질문을 위해 <피와 씨앗>은 '장기기증, 살인자, 피해자, 어린아이'란 설정을 가져옵니다. 은퇴한 수의사 소피아는 신장 질환으로 투병 중인 손녀 어텀과 어텀의 이모 바이올렛과 함께 농장 일을 하며 삽니다. 어텀의 엄마는 후반에 밝혀지는 어떤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죠. 소피아는 어텀을 살리기 위해 신장이식을 알아보지만, 번번이 실패합니다. 결국 그녀는 유일하게 신장이 맞는 사람, 자신의 아들이자 어텀의 아빠인 아이작에게 신장이식을 부탁합니다. 하지만 아이작은 죄를 지어 옥살이를 하고 있는 상태라, 그의 보호관찰관인 버트가 그를 데리고 소피아의 집으로 찾아옵니다. 소피아는 아이작에게 신장을 기증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아이작은 두려워하며 쉽게 결정하지 못합니다. 감옥에서도 심리적으로도 불안했던 아이작은 소피아를 경계합니다. 버트는 아이작의 선택권을 존중하자고 말하지만, 소피아와 바이올렛은 어텀을 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며 아이작을 몰아붙입니다.


이 작품을 단순하게 보면, 어린아이의 목숨과 살인자의 목숨을 놓고 윤리적으로 답이 정해진 논쟁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장 이식을 해도 버트는 (수술이 잘못되지 않는 이상) 계속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버트의 신장이 없으면 어텀은 죽게 되니까요. 소피아는 사랑하는 손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희망을 붙잡고, 버트는 예전처럼 살고 싶은 욕망을 내비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켈트 신앙(종교적이고 신화적인)의 메타포가 깔려있습니다. 서서히 밝혀지는 사건의 전말 역시 신앙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c) 두산아트센터

소피아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는 전통적으로 '밀알의 여신'이라는 종교적 의식을 치릅니다. 짚으로 만든 인형에 쨈이나 피를 발라 제물처럼 바치는 거죠. 어텀이 주문처럼 외우고 다니는 말이 있는데, 마치 자신의 탄생신화 같습니다. "12년 전 어느 날 밤, 위대한 희생의 외침에서 한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리고 사람들은 그 아이를 어텀이라 불렀다." 어텀이라는 이름은 수확을 하는 가을을 뜻하죠. 어텀은 이 마을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주는 수호신이나 마찬가집니다. 적어도 소피아 가족 에게는요. 소피아는 이 마을의 토속신앙을 신봉하는 사람이고, 아이작이 어릴 때부터 의식에 대해 이야기했을 겁니다. 그리고 소피아는 또 한 번 희생을 통해 수호신을 지키려 합니다. 소피아는 “우리도 똑같은 동물이야”라고 말하지만, 여기엔 이분법적 사고가 보입니다. 세상에는 유일무이한 신과 그를 제외한 다른 존재가 있다고. 때문에 그를 위해서 인간은 희생될 수 있다는 믿음에 달합니다. 어텀은 순교자의 희생으로 태어난 존재이고, 지켜야 할 존재이죠. 소피아에게 어텀이 사라지는 건, 손녀가 죽는 것인 동시에 마을과 농장이 사라지는 것과 다름없을 겁니다. 해마다 추수 달이 뜨면 밀알의 여신을 위해 마을 사람들은 희생자를 만들었고, 피가 넘치는 한 곡물도 넘처날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제목은, 그 자체로 '어텀'을 상징하기도 합니다.(제목 번역이 '피와 씨앗'이라고 대등하게 나열했는데, 저는 오히려 '피의 씨앗'이 더 작품이 보여주려는 의미에 맞지 않나 생각도 합니다.)


<피와 씨앗>은 스릴러적 성향이 강합니다. 감추는 게 많고 정보를 쉽게 주지 않죠. 관객에게 얼마만큼의 어떤 정보를 언제 주느냐에 따라 긴장과 이완, 반전이 생기는데, 이를 최대한 불친절하게 주는 장르가 스릴러죠. 극 초반, 소피아와 버트의 대화가 시작될 때 관객은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파악하기 힘듭니다. 신장이식이라는 말도 중반쯤 되어야 나오기 때문에, 버트와 아이작이 그곳을 방문한 이유도 모호하게 처리하고요. 이후 일어나는 사건도 계속 의문을 가지게 만듭니다. 작가는 의문을 풀어 줄 단서를 하나씩 천천히 던집니다. 아이작이 왜 감옥에 갔는지, 왜 그의 신장이 필요한 지, 소피아와 바이올렛은 왜 저렇게 화가 났는지, 어텀과 아이작은 무슨 사이인지... 조각조각 맞춰지던 퍼즐은 공연이 끝나는 순간 완성됩니다.


작품의 텍스트만 보면 등장인물이 굉장히 매니악합니다. 이를 테면, 버트 같은 경우는 깐깐하고 원칙적이고 차갑지만, 내면에는 치유되지 못한 상처가 있어 건들면 터져버릴 듯한 인물로 보입니다. 신발에 묻은 가축 배설물을 털어 내고, 블랙커피를 마시고, 이름이 아닌 성을 부르고, 이번 연극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원작 희곡을 보면 소피아와 대화할 때도 깨알 같이 노트합니다. 소피아는 겉으로는 친절하고 침착해 보이지만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자기 신념을 지키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살아온 고집 있고 극단적인 인물이고요. 아이작은 어릴 때부터 삶이 망가져버린, 그리고 그 원인을 엄마에게 있다고 여기는 인물로 모성에 대한 결핍과 원망과 증오가 있어요. 죄를 저지른 것도 커다란 악몽인데, 감옥에 있는 동안 면회 한번 오지 않고 자신을 버린 엄마가 신장이 필요하니 내놓으라고 하니 야속하겠죠. 하지만 자신의 핏줄을 생각하면 죄책감과 책임감이 들어 혼란스러울 테고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관객마저 불안한 마음으로 보게 되는 인물입니다. 어텀은 조금 신비로운 존재라 생각합니다. 모두의 희망이자 염원이고 생명이자 죽음인, 그 한 끗 차이를 오가는 절대자 같아요. 어텀이 중얼거리는 대부분의 말이 의식의 일부인 것을 포함해서요.  


무대에 오르면서 이런 캐릭터가 다소 건조해진 느낌이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텍스트가 담고 있는 인물의 에너지를 절반 정도만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어요. 외국 배경의 번역극이라 대사가 어쩔 수 없이 좀 이질적으로 걸리는데, 윤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번역투의 말이 있어서 그런 것도 같아요.

(c) 두산아트센터

이 작품에 시간이나 공간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신화적인 느낌이 드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인데요. 장기 이식이 이렇게 야매(?)로 안일하게 행해질 수 있는 배경으로 보아, 현대는 아닌 것 같단 생각도 듭니다. 제의를 하거나 이를 믿는 설정 역시, 먼 과거에나 더 어울릴 법하죠. 공간적 배경은 그래도 보다 구체적입니다. 일단 스코틀랜드의 한적한 농가로 보이죠. 작가가 스코틀랜드 출신이기도 하고, 원작 희곡에 보면 첫 지문에 '커다란 창문 밖으로 밀밭이 보인다'라고 되어 있거든요. 헛간, 마구간, 양 떼들이 노는 초원, 도살장 같은 것들이 있는 커다란 목장일 겁니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꽤나 현대적이었습니다. 의상이나 소품, 무대 배경을 봐도 모던한 느낌이 강했어요. 특히 공간은 마치 장기밀매가 오가는 창고 같은 오싹한 분위기도 주는데, 그럼에도 차갑고 도시적인 느낌이 들었습니다. 연출적인 특징은 라이브 비디오의 활용입니다.  영상이란 또 하나의 프레임을 씌워, 무대에서 보이지 않는 장면(무대 밖, 무대 뒤)을 촬영해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게 공간적 한계를 탈피하는 효과를 주기도 했습니다. 오리지널에 기대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고민한 흔적이 담겨 인상적이었고요. 다만 영상의 상황이 바로 무대 뒤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걸 관객이 너무도 잘 알 수밖에 없고, 배우가 카메라에 시선을 두지 않다가 두다가를 병행하다 보니 감정을 따라가기 어렵기도 했습니다. 어텀의 방처럼 특정 공간에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너무 자주 사용되다 보니 혼란도 오고요. 소품은 좀 아쉬웠는데, 연극에서 꼭 리얼리티를 살릴 필요는 없지만 그게 등장하는 순간 극의 몰입을 깨면 위험하다고 봅니다. (저는 양고기와 양고기 수프가 특히 그랬네요....) 음향과 음악은 확실하게 극을 밀어주고 힘을 더해줍니다.   


저는 이 작품을 가족 간의 갈등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종교적 가치, 윤리적 가치에 따른 갈등으로 보입니다. 만약 이 작품이 가족에 중점을 두었다면, 아이작이 아들이 아니라 사위라는 설정이 더 설득력 있죠. 가족이라는 연대로 묶다보면 작위적인 부분이 많아집니다. 일단 소피아가 손녀를 위해 아들의 장기를 원한다는 건데, 손녀보다는 아들이 더 자신과 가까운 혈육이니까요. 소피아가 어텀을 살리려는 건, 앞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손녀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마을, 농장의 평화를 위해 어텀이 살아줘야 하는 겁니다. 어텀과 아들의 1:1 교환이 아닙니다. 아들을 희생하면, 다수가 평온할 수 있는 논리가 됩니다. 아이작 역시, 가족보다는 종교적 해방을 원하는 인물로 보입니다. 어텀의 마지막 말을 들은 아이작의 모습에서 제물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엿보였습니다.  


<피와 씨앗>은 배경부터 생경한 작품입니다. 동시대 우리 모습과는 다소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경험이 되죠. 또한 종교적 구원을 위한 (비) 윤리적 (비) 도덕적 범주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딜레마에 대한 답은 관객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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