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창업을 해서 밤낮없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사람, 박사과정 이후에도 포닥을 하면서 주말에도 논문에만 몰두하는 사람, 일주일 내내 쉬지 않고 본인이 운영하는 가게에 전력을 쏟는 사람 등등이다. 이들은 나와 다른 결이라고 해도, 같은 회사 내에서도 그런 사람은 종종 목격된다. 타 부서에 있는 한 동료는 매일 퇴근 후 공부만 하고 있다. 주말에도 애인과 독서실에 간다.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있는 일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 말하는 사람이다.
그에 비해, 나는 어제저녁 치킨을 시켜먹고 배가 불러 꼼작도 하지 못해 소파에 누워 있었다. 배가 좀만 꺼지면 운동해야겠다고 다짐했건만, 역시 스마트폰이 문제였다. 잠시 있으려는 나의 다짐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스마트폰의 마력에 시간도 어느 새 2시간이나 훌쩍 지나버렸다. 빈둥대면서 보낸 시간 앞에 괜한 자책감이 들고 말았다. 나는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데 정말 열심히 사는 그들은 무엇이 동기가 되어 그토록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자조적 표현일 뿐 진짜 동기가 궁금한 것은 아니다. 다만 비물질적 부분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질 뿐이었다.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조스는 하루에 빈둥대는 시간이 일정 부분 필요하다고 말한다. 온전히 업무에 몰두하는 것보다 적절한 휴식이 업무의 효율을 높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오전 시간을 가족들과 빈둥거리면서 보낸다고 한다. 분명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건 그 자리에 오른 제프 베조스 정도 되어야 그리 편한 맘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가만히 쉬고 빈둥대는 행위가 유쾌하지 않게 느껴졌다. 꼭 그 시간에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가만히 있으면 도태될 수도 있다는 무의식적인 강박이 작용하는 것일까.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환영이 우리의 휴식마저 온전히 누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듯하다.
Stresslaxing이란 신조어가 있다. 휴식을 취하면서도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신조어가 탄생했다는 것은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박탈당했다. 마치 쉬지 않고 움직이는 공장의 로봇처럼 매 순간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할 것만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를 상상해 보았다. 남들보다 적게 돈을 벌 수 있다. 동료들에 비해 진급이 미뤄질 수 있다. 성과가 나지 않아 회사에서 잘릴 수 있다. 음, 끝인가? 신기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생각보다 큰일이 일어나는 것 같진 않다. 돈을 적게 벌면 적게 버는 대로 살면 될 것이고, 진급이 느리면 자존심 좀 죽이고 살면서 되고, 회사에서 잘리면 새로운 일을 구하면 된다.
우리가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예측하지 못할 때이다. 점쟁이를 찾아가거나 사주를 보는 이유는 결국 미래를 예측해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함이다.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대충 상상해보니 그리 불안하지만은 않다. 목숨을 위협하는 어마무시한 결과는 아니었다. 그러니 조금은 더 빈둥거려도 좋을 듯하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