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허브차 이야기
나는 외국계회사에 다닌다. 외국계회사들 모두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지만, 최소한 내가 다녀본 회사들은 대체로 조직문화가 “비교적” 오픈되어 있다. 그리고 영어로 얘기하는 경우, 사장님을 사장님이라 부르지 않고 하이 철수, 하고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맞다. 그러나 그렇다할지라도 직책의 저울이 노골적이고 권력의 풍향계가 냉정하기 그지없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오히려 한국조직과 본사조직이라는 두 시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경우가 많다. 외국계회사에 다니다보면, 본사에서 오는 직책 높으신 ‘방문자’들을 자주 맞이하게 된다. 군대에서 쓰리스타가 한 번 뜨면 난리법석, 없던 도로도 깔고 없던 연못도 판다던데, 회사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최근에도 본사에서 온 방문자가 3일간 머물다 갔는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나는 그 3일간 그의 전속비서가 되었다. 그 방문자는 똑똑하고 점잖고 친절하여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나를 때때로 지원사격해주는 사람이기도 해서 방문기간 동안 업무적으로 업무외적으로 기꺼이 챙겨주고 싶은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는 높은 직책의 사람이었다. 그것도 내 업무와 관련이 많고 내가 옮겨갈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부서의 장이었다.
그 방문자는 출장길에 아들을 동행했기에 속으로 나는, 그럼 저녁에는 아들과 시간을 보내겠네, 하는 생각에 내심 쾌재를 불렀는데, 섣부른 예측이었다. 그의 방문 이틀째 날, 긴장된 하루를 마치고 이제 퇴근이구나 하고 한숨을 쉬려던 즈음, 그가 내게 이메일을 보냈다. “나 지금 내 아들이랑 남대문 구경 갈 건데 너도 시간되면 같이 갈래? 대환영이야.”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했다. “시간은 되지만, 아드님과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래도 무슨 일 생기면 아무때라도 제 핸드폰으로 연락주세요.” 나중에 입술을 씹었을지언정 이 답변은 진심이었다. 그러고나서 회사 동료와 다른 일로 얘기를 하다가 이 남대문초대에 대해 얘기했더니, “바보냐, 가이드해달란 소리잖아. 뭐, 이미 거절했다니 됐어, 우리가 회사를 또 얼마나 오래 다닐 거라고. 신경쓰지마” 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가능한 최대로 쾌활한 목소리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다시 생각해보니 저도 오랜만에 남대문에 가보고 싶어졌는데, 제가 함께 가도 괜찮으실까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은 그가 이미 남대문으로 출발했기를 바랬고, 만약 출발했다면 “아! 벌써요? 저엉~말 안타깝네요. 제가 가이드해드리려고 했는데”라고 강하게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었지만, 헛된 바램이었다.
그래 잘한 거야, 하고 생각을 만들었다. 자조적이고 부정적인 단어 몇 개가 눈을 얇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 단어들을 물리치는 것보다는 남대문시장에 대해 검색하는 게 더 급했다.
남대문시장에서 명동까지 설렁설렁 길거리 구경을 하였다. 걷는 내내 쥐어짜듯이 겨우겨우 대화를 이어갔다. 세련되게 아부도 좀 하고 싶었는데 매번 티가 났다.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와 표현하지 못하는 영어에 더하여, 유머러스하거나 풍성하지 못한 내 본연의 대화능력이 무거운 짐처럼 내 등에 업히고 내 손에 들리고 하여 천근만근이었다. 길거리에 잡다한 구경거리가 많아서 다행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동시에 불행이기도 했다. 나는 그 구경거리들을 영어로 제대로 설명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외국계회사를 십여년 다닌 관계로, 말하자면 회사생활이 곧 나의 어학연수인지라 나의 영어는 업무영역에만 제한되어 있어서 길거리나 식당에 가면 나의 영어는 벙어리나 매한가지다. 가처분금지, 특허침해, 회생절차, 불가항력, 위임장 같은 단어는 알아도 어묵튀김, 번데기, 양념꼬치, 찹쌀떡, 갈치조림 등등 유치원에 다니는 꼬마들도 알 단어들을 나는 영어로는 모른다. 설상가상, 장고 끝에 악수라더니 밥을 먹으러 들어간 명동교자는 후회스러운 선택이었다. 나는 배가 많이 고팠었는데, 망했다는 생각에 반절도 못 먹었다.
명동교자에서 나서면서는 똥줄타는 기분마저 들었다. 어디라도 가야겠기에 마침 시야에 들어온 명동성당으로 두 관광객을 데려갔는데, 오 신이시여, 그들은 의외로 성당을 좋아했다. 북적이는 남대문시장과 명동거리를 거쳐 들어온 숙연함 때문이었을지, 서울에서 이런 유럽스런 고즈넉한 성당을 봤다는 신기함 때문이었을지는 모르겠다.
나는 신자가 아니지만 마리아님이 눈물나게 감사했다. 표현만 눈물나게가 아니라, 정말로 눈물이 후욱하고 올라왔다. 기계처럼 일어나서 기계처럼 양치질을 하던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한 줄기 눈물이 드륵 흘러떨어졌던 것처럼 그렇게, 당황스런 눈물이 부적절한 타이밍에 솟아났다. 화장실로 잠시 피신하여, 이것이 종교의 힘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명동성당을 끝으로 하고 방문자들을 택시로 호텔까지 데려다줬다. 푹 쉬시고 내일 다시 뵈요, 라고 활짝 웃으며 인사하고 돌아서서는 똥 씹은 표정으로 걸었다. 어찌보면 오히려 나도 기분좋게 즐길 수 있는 것인데, 또 임원과 가볍게 친분을 쌓을 수도 있는 좋은 기횐데, 이 지치고 눅눅한 기분은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답은 어렵지 않다. 내가 못나서가 답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베란다로 향했다. 편한 저녁을 누리고 있는 남편이 괜히 미워서 애꿎은 화살을 날리지 않기 위해 베란다로 갔다. 흙 색깔이 말라보이는 화분마다 손가락을 쑤셔보고는 물을 주기 시작했다. 식물에 주는 물은 수돗물을 하루정도 받아놨다가 주는 것이 좋기도 하고 또 물줄기가 너무 세차면 화분 흙이 튀고 패이고 하므로, 보통은 받아놓은 물을 물조루에 담아 졸졸졸 물을 주는편인데, 이 날은 물조루로 성에 안 차서 샤워기로 물을 막 뿌렸다. 흙이 지저분하게 많이 튀었다.
그러고나니 향기가 고팠다. 사람의 오감 중에서 일상생활에 대한 지배력이 가장 큰 것은 시각이겠고 육체에 대해서는 미각이 아무래도 크겠지만, 마음에는 후각이 강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집 베란다에는, 아래에서 위로 쓸어올리면 손안 가득 피톤치드 향을 담아주는 율마가 있고, 톡톡 건드리면 몇 초 정도 향을 풍기는 레몬유칼립투스가 있고, 가만히 코를 대고 있으면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운 향을 뿜는 유칼립투스 베이비블루와 실버드롭이 있고, 오며가며 다리로 엉덩이로 건드리면 숭덩숭덩 짙은 향을 내는 구문초가 있고, 달콤하게 상쾌한 애플민트가 있고, 살살 흔들면 달달한 풀내가 나는 장미허브가 있고,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코를 박고 숨을 들이쉬게 되는 로즈마리가 있다.
이 중에서 나는 로즈마리의 향이 제일 좋다. 로즈마리는 아주 흔한 허브로 식물은 어느 동네화원에라도 있을 것이다. 폭이 2-3미리 정도 될까 싶은 성냥개비 반절만한 짱짱한 초록잎들이 사시사철 짙은 향을 풍긴다. 실내에서는 통풍과 햇빛이 부족하여 흰가루병이 곧잘 생기기도 하고 아무래도 키우기가 쉽지 않지만, 베란다에 두면 의외로 만만한 식물이다. 또, 겨울에 베란다에서 월동이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조금 자라기까지 한다.
로즈마리는 향이 좋아 향기 제품에 두루두루 쓰이고, 음식할 때 고기 잡내를 없애는 데에도 쓰이는 것처럼 그 활용 용도가 다양한데, 이에 그치지 않고 약초처럼 치유의 효능도 있다는 기특한 허브이다. 기억력과 집중력 향상, 살균, 소독, 방충, 심장강화, 시력개선, 피로해소, 두통해소, 지방분해, 소화촉진 등등등 사람들이 로즈마리의 효능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거의 만병통치약에 가깝다. 사람과 함께 한 역사가 아주 오래된 만큼 이런저런 전설이나 얽힌 이야기도 몇 가지 버전이 있는 것 같은데, 사람과 오래 함께 해서 개개의 사람마다 갖는 효능이 각양각색인 것인지, 효능이 많아서 사람과 오래 함께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전자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 날 나는 피로해소 및 심신회복의 효능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플라시보이거나 말거나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흔하고 만만한 로즈마리지만, 로즈마리 “생”허브차는 조금 특별하다. 허브잎을 따서 씻은 후에 차주전자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 게 다일 뿐인데 (물을 조금 붓고 얼음을 타서 아이스티로 먹어도 좋다), 뜨거운 김이 퍼져나가면서 나는 향은 꼭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잠시 눈을 감고 흐음—하게 만든다. 향초나 디퓨저의 향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이 생허브차 향에는 댈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백화점 화장품코너에 들어섰을 때처럼 압도하는 향내는 아니다. 은근하고 어렴풋하다. 찻잎을 덖을 때 이런 냄새가 나지 않을까 싶은 덥숙한 향도 난다. 생각지도 못한 향기 풍년에 잠시 멈추어 있다보면 말간 연둣빛 차가 우러나와 있다. 어쩜 이리 고울까. 천장을 향해 한번, 창밖을 향해 한번, 찻잔에 댄 손가락을 향해 한번, 아, 좋다아, 하는 말이 자꾸 나온다. 향과 빛깔 못지 않게 맛도 좋아서 입안이 화사해진다. 안구정화라는 말이 있던데, 로즈마리차의 경우에는 구강정화라고 해도 될 것이다.
생허브차의 향과 맛을 타고 잠시 시선을 멀리 두면, 그간의 내 모습이 보인다. 사람들이 강하다 말하지만 속으로는 멍투성이였고, 웃음으로 많은 일을 넘기지만 항상 마음끝에 눈물 고여있었고, 무심하게 단순하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생각과 정이 쓸데없이 많았고,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쿨한 사람도 되지 못했고, 논리적이지도 감성적이지도 못해 허우적대고 있었고, 혼자서도 씩씩하다 했지만 실은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그득했고, 그리고 나를 참 많이 가두며 살고 있었다. 여자는 우물의 맨 밑바닥에 다다랐다가 스스로 다시 솟아오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생허브차가 나를 끌어올려주는가보다 한다.
이렇게 차 한 잔이 식을 동안, 이 차향이 머무르는 동안, 이 차 한 잔을 마실 동안 향과 맛을 누리고 나면 나는 조금 나아진다. 로즈마리 화분에 코를 박고서 갈증난 사람마냥 흐읍흐읍 숨을 들이마시는 것은 사실 아름다운 모양새는 아니지만, 이렇게 로즈마리 생허브차를 마시는 것은 모양새도 괜찮다. 퇴근할 때 등에 업고 왔던 답답함이 가벼워진다. 바람 빠진 내 마음에 새로운 마음 속살을 불어넣어 다시 부풀려주는 로즈마리는, 마음을 가진 향기이다.
시인 김소연이<마음사전>에서 “밥은 육체에 주는 양식이라면 차는 마음에 주는 양식”이라고 하였는데 많이 공감한다.
오늘 글은 조금 길었지만, 결론은, 로즈마리 차 한번 잡숴봐, 이다.
간단 프로필:
국내 유통명: 로즈마리
학명: Rosmarinus
영명: Rosemary
생물학적 분류: 현화식물문 쌍떡잎식물강 통꽃식물목 꿀풀과 로즈마리누스속
원산지: 프랑스 남부 등 남 유럽 지중해 연안
햇빛:
원산지를 생각하면 햇빛과 바람이 더없이 필요한 식물인 것이 당연한 것 같다. 로즈마리는 직광 내지는 땡볕을 받을 수록 건강하다. 그러나 직광이 아니어도 베란다 안쪽이라고 해서 시들시들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로즈마리 잎 특유의 딴딴함이 부족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바람:
그러나 햇빛과 바람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바람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지중해 출신 허브들이 그런 것 같은데, 바람 안 통하면 맥을 못춘다. 우리집 로즈마리는 베란다의 바람 잘 통하는 한편에서 주로 살다가 가끔 베란다걸이로 요양여행 간다.
물주기:
흙이 좀 푸석푸석하다 싶을 때 물을 준다. 과습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여느 식물과 다를 바 없지만, 지중해 해변가에서 센 바람을 직통으로 맞아가며 살아온 종족이기에 건조함에 강할 뿐 아니라 다소 건조한 듯 자라야 건강한 것 같다. 그러나 로즈마리 역시, 며칠에 한번, 과도 같은 물주기 공식은 존재할 수 없다. 개개의 로즈마리가 존재하는 환경에 따라 다르다.
내한성/ 월동:
내한성이 약하다고 하여 실내에서 월동해야 한다고 한다. 키워본 바로는 베란다에서 월동해도 잘 산다. 베란다에서 월동한다고 해서 겨울 내내 얼음땡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겨울에도 조금씩 자라기까지 한다. 식물의 내한성도 역시 식물 개개의 적응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성장:
자생지에서는 2미터까지 자란다고 하나, 우리나라의 환경에서 화분에 기를 때는 대체로 소품이거나 대품이더라도 내 키를 넘기기는 힘들 것이다. 내가 생허브차 끓여먹는답시고, 혹은 수형을 가꾼답시고 이발을 자주 해줘도 금새금새 자라나는 것을 보면 로즈마리의 성장세는 결코 더디지 않다.
번식:
삽목과 씨앗발아 둘다 가능한데, 나는 물꽂이를 해두었다가 흙에 옮겨심어보았다. 그래서 지금 우리집 베란다에는 꼬맹이 로즈마리가 세 화분 살고 있다. 이발한 가지를 물에 꽂아놓으면 며칠 안되어 가느다란 실 같은 뿌리가 나온다. 뿌리 하나 기어나온다고 뭐 대수냐 싶겠지만, 어느 날 불현듯 뿌리가 희미하게 보이면 기분이 참 좋다.
매력 포인트:
로즈마리는 역시 향이다. 학명 rosmarinus는 라틴어의 ros marinus의 합성어로 바다의 이슬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지중해 해변가에서 특유의 매력적인 향을 발하는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손으로 로즈마리 잎들을 부비부비해도 좋고, 어쩔 땐 아예 얼굴을 로즈마리 잎수풀 속에 푹 처박고 흐으읍하며 향을 맡는다. 아주 좋다. 로즈마리향이 여기저기 도처에서 쓰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흔하디 흔해도 최고다. 클래식 음악에서 모짜르트와 베토벤이 너무 흔하고 익숙해서 좀 덜 흔한 작곡가의 음악으로 탐색해 들어갔다가 다시 결국에는 모짜르트와 베토벤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할까.
유의사항:
과습주의, 통풍필수가 기본이요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흰가루병 같은 벌레들이 꼬이기 쉽다. 집에 참충균 (상품명) 같은 약을 한 병 놔두고서 흰가루나 거미줄 같은 벌레들이 생기면, 참충균을 희석해서 (설명서에는 500배 희석) 분무해주고 바람 잘 통하는 자리에 놔두면 금새 괜찮아질 것이다.
보너스:
생허브차로 마시기에 참 좋다. 애플민트를 함께 넣어서 마셔도 좋지만, 애플민트는 모히토에 어울리는 만큼 향이 좀 더 직접적인데 반해 로즈마리는 좀 더 은근하다. 어쨌든 둘 다 쑥쑥 자라는 데다가, 아주 조금만 따서 넣어도 차 주전자가 향과 맛으로 그득히 찬다. 우리가 주로 마시는 말린 허브잎 차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향과 맛이 좋다. 2-3센티 정도씩 3개 정도 따서 차주전자에 넣고 뜨거운 물 부어 우려먹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