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식물생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철쑤 Jul 22. 2016

아가베 아테누아타: 내 마음의 보일러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까지만 해도 우리집은 반지하방에 살았다. 서울의 변두리 지역 중에서도 역세권과는 거리가 한참 있는 골목과 골목이 겹쳐있는 주택가의 작은 연립이었다. 창문을 열면 바깥 풍경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발이 보였다. 온 나라가 후텁지근해지는 장마철에는 구석구석의 곰팡이가 방학에 친척집에 놀러와있는 아이처럼 눌러붙어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장마철에 보일러를 돌렸다. 더워죽겠는 여름에 에어콘이 있을리 만무한 반지하방에 보일러를 틀면 도저히 집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보일러를 돌리는 동안에는 밖에 나가 있기도 했지만, 그래도 서너시간 나가 있다가 집에 들어오면 덥기는했어도 조금 뽀송해진 집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반지하에는 더 이상 살지 않게 되었지만, 이따금씩 그때처럼 눅눅해질 때가 있다. 이제는 집이 아니라 내 마음이 눅눅해진다. 그 때는 보일러를 돌리는 방법이 묘책이었는데, 마음에는 묘책이 없을 때가 많다.


마음이 눅눅해지는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눈썹 모양이라는 것이 거기서 거긴데 여자는 아침에 화장할 때 눈썹이 잘 안 그려졌다고 기분나빠한다더라고 누가 그러던데, 그 말에는 백프로 동의할 순 없지만 그런 자잘한 이유들도 셀 수 없이 많기는 하다. 그런데 최근에 내 마음이 주로 축 쳐지는 이유는 주로, 어느 날 문득 느껴지는 내 마흔살의 초라함인 것 같다.


지난 주에 미국 샌디에고에 있는 본사에 출장을 다녀왔는데, 거기서 아가베 아테누아타를 아주 많이 봤다. 샌디에고는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다. 햇빛은 좀 강하다 싶을 때도 있지만 습하지 않고 바람이 술술 불어대는 날씨가 대체로 연중 내내 지속된다. 우리나라의 늦여름이나 초가을 날씨와 비슷하달까. 그래서 그런지 벌레도 별로 없다. 그런 날씨에서 자라는 아가베 아테누아타는 눈에 띄는 것마다 대품이었다. 그리고 그런 대품 아테누아타들은 하나 같이 거의 방치되어서 길가에 혹은 화단에서 살고 있었다. 마치 덩치 큰 잡초처럼 살고 있는 아테누아타를 보고 내가 느낀 것을 문명의 충돌이라고 할 수는 없겠고 뭐라해야 맞을런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충격이긴 했다. 한국에서 아테누아타는 엄청 비싸다. 샌디에고에 도처에 널린 아테누아타 정도의 크기면 한국에서는 백만원은 할 것이다. 샌디에고에 있는 아테누아타 덩치들을 보면서 내 집에 있는 아테누아타가 그립기보다는 내 껀 너무 시시하다는 생각이들었다. 내 아테누아타의 몸통은 엄지손가락 두 개 정도 두께나 될까 싶은데 샌디에고 아테누아타들은 몸통이 내 팔뚝이나 종아리 두께를 훌쩍 넘는 것들이 많았다. 한 마디로 게임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아테누아타가 워낙 비싸서 이만원짜리 소품을 들인지라 내 아테누아타가 비록 좀 작긴 했지만, 그래도 웬지 고고해 보이고 식물스런 카리스마가 있어서 참 좋아했는데, 아이고야, 샌디에고에 와서 보니 내 아테누아타는 어디 낄 자리도 없겠구나 싶었다.


마치, 덩치 큰 사람들의 영어권 나라에 와서 서바이벌 영어로 어떻게든 버텨보겠다고 용쓰는 왜소한 아시아인의 모습 같았다. 마치, 다이소에서 원목트레이로 쓸만한 꽤나 있어보이는 나무도마를 삼천원에 샀다고 좋아하다가 친구가 백화점에서 샀다는 진짜 원목트레이를 봤을 때의 기분 같았다. 마치, 예정에 없던 공식일정에 평소에 입고 다니는 남방과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 그대로 갔는데 나 빼고 모든 사람이 정장이나 정장 비스무레한 차림을 하고 있을 때와 같았다. 마치, 나는 십년도 더 된 쏘렌토를 끌고 갔는데 친구는 비엠더블류세븐을 몰고 나온 때와 같았다. 아, 나는 아직도 초라해지는 때가 너무너무 많구나.


출장에서 돌아와 짐을 풀기도 전에 베란다에 들어서서,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식물들이 잘 살아있었나부터 살펴봤다. 마음이 꼬인 데가 있어서 그랬는지 아테누아타에게는 시선을 주기가 싫었다. 예전과 다름 없이 카리스마 있는 잎파리들을 꼿꼿하게 벌리고 있었지만 너무 작고 초라해보였다. 그래도 하루 지나고 이틀 지나며 여독이 풀리듯 내 눅눅한 마음이 다시 뽀송해졌는지, 내 아테누아타가 다시금 아름다워 보였다. 화분은 자리를 자주 옮기면 식물이 스트레스를 받아서 안 좋다던데, 나는 아테누아타를 안방으로, 거실로, 베란다 구석으로, 베란다 중심으로 수시로 옮겨댔다. 게다가 지난 3월엔가는 날씨가 채 따뜻해지기도 전에 성급하게 베란다로 내놨다가 꼿꼿한 잎파리 너댓개를 흐물흐물 골로 보냈다. 그러다 죽는 줄 알았는데 아테누아타는 생각보다 강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변덕이 죽 끓듯 한데다가 조급하기까지 한 주인을 만났어도 변함없이 고고한 자태를 보이는 내 아테누아타를 함부로 초라하게 생각했다. 살판났을 고향 떠나 물 안 맞고 땅 설은 한국에서 사느라 고생이고 기특하기만 한데, 내가 너무 남의 떡에 눈이 멀었다.


어린 왕자의 장미에 비교하는 거창함까지는 아니어도, 나의 아테누아타는 내게는 참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다시 한다. 아테누아타의 은회색 빛 나는 꼿꼿한 잎의 먼지를 닦아주면서, 나 자신의 초라함은 그 누구도 아닌 내 마음이 만드는 것이구나 생각한다. 이래서 식물들과 함께 하는 것은 단순한 취미 활동이 아닌, 눅눅한 내 마음에 보일러를 돌리는 것과도 같은 치유이자 자정 활동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식물생각 핸드북


간단 프로필:

유통명: 아가베 아테누아타 혹은 아테누아타

학명: Agave attenuata Salm-Dyck

영명: Agave attenuata

생물학적 분류: 속씨식물문 아스파라거스목 용설란아과 아가베속

원산지: 멕시코


햇빛:

직광은 피하는 것이 좋고 간접광에서도 잘 산다고 하여 거실에서 키우기 좋은 식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은데, 거실에서도 잘 사는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원산지 멕시코에서가까운 미국 샌디에고에서 아테누아타 대품들을 도처에서 보고 온 나는 결론을 달리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직광 많이 받고 쭉쭉 크는 식물이랍니다, 라고.


바람:

허브처럼 바람을 많이 필요로 하지는 않는 식물인 것 같다. 나도 거실이나 안방에 놓아둔 기간이 꽤 길었었는데 벌레가 꼬인다던가 하는 문제는 없었고 잘 살았다.


물주기:

아테누아타는 다육식물이다. 그러므로 물은 자주 주지 말고 흙이 푸석푸석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보름에 한번, 한달에 한번, 식으로 말할 수는 없고 어떤 환경에 어떤 계절에 있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니, 화분흙을 손가락으로 쑤셔 봐서 많이 말랐다 싶을 때 주면 될 것 같다.


내한성/월동:

햇빛, 바람, 물에 대해서는큰 탐욕이 없어서 주인이 게을러도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추위에는 약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3월초에, 봄이 왔으니 이제 베란다고 보내줄게, 라고 선심 쓰듯 베란다로 내보냈는데, 아래쪽 잎파리 너댓개가 흐물흐물대면서 녹아내렸다. 그렇게 그냥 떠나가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잎파리안쪽 중심의 아직 펴지지 않은 잎파리기둥이 딴딴한 것으로 살아있음을 믿었다. 화원 주인 말이, 중심 잎파리가 물렁하면 그건 가망 없는 것이라고 한다.


성장:

더디게 자란다. 중심 잎파리가 알에서 깨어나듯 조금씩 슬슬 펴지면서 기다란 곡선형의 잎파리로 되어 옆으로 벌어지는데, 이제나저제나 언제 벌어지나 싶다가도 어느 날 보면 신통하게 짠 벌어져 있다. 내 아테누아타는 잎파리가 18개 매달려 있는데, 이렇게 꼿꼿하게 유지되던 잎파리들 중 가장 아래쪽 오래된 잎파리는 하나씩 천천히 누래지면서 추욱 쳐지고 이내 시든다. 시든 잎은 잘라내는데 너무 몸통 가까이 바짝 자를 필요는 없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자르면 되고, 그러고 나면 이내 말라서 떨어진다. 몸통은 150센티까지 자라고 잎파리는 70센티까지 자란다고 하는데 이건 원산지에서 사는 아이들 얘기이고, 서울에서 사는 아테누아타에게는 언감생심일 것이다. 이만원짜리 소품을 들이면서 주인에게 얘는 언제 쟤처럼 되나요, 라고 아테누아타 대품을 가리키며 물었더니, 십년 갖고도 모자랄 것이라고 했다.


번식:

포기나누기가 가능하다고 되어 있는데 나는 시도해본 적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매력포인트:

존재감 내지 카리스마가 확연하다. 화원이나 꽃시장에 가서 대형 아테누아타를 보면 절로, 오—하는 감탄사가 나온다. 그래서 아테누아타 대품들은 그래서 비싼 몸값에도 불구하고 인테리어 용품으로 인기가 많다고 한다. 은회색을 띠는 잎의 색감도 우아함에 한 몫 한다.


유의사항:

물을 자주 안 주는 것과 겨울 및 초봄에 추위 타지 않게 해줄 것. 벌레는안 꼬이는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투키: 지혜로운 반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