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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쑤 Jul 29. 2016

스킨답서스: 인연의 구간

모지스 할머니 (Grandma Moses)라고 알려진 분이 있었다. 75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01세까지 살면서 많은 그림을 그린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은 따뜻하고 명랑하다. 무식한 게 뽀록 나면 안 되니까 최대한 나도 그림을 이해한 척 해야지 하는, 유명한 그림들 앞에 설 때면 으레 생겨나는 긴장감이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들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 그런 마음을 먹기도 전에 그림 속 이야기들이 조곤조곤 눈에 들어온다. 옛날엔 이랬단다, 니 아비어미는 이랬단다, 그 땐 참 재밌었더랬지, 라고 할머니가 구구절절 얘기해주시는 것 같기도 하고 동화책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그림을 시작한 나이와 그림 활동을 지속한 나이 만으로도 존경받을 만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명랑하고 귀여운 모습마저 엿보이는 모지스 할머니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앨라배마에 다섯 개의 작은 무덤을 두고 왔습니다.”


할머니는 할머니가 살았던 시대의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여러 자녀들을 낳았지만 그 중에서는 몇 해 살지 못하고 떠난 아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그래도 살아가는 것이니, 할머니는 떠나간 아이들을 마음에 묻고 밝고 따뜻한 그림을 그리며 살았답니다, 라고 쉽게 말하기에는 할머니의 이 짧고 담담한 문장의 무게가 많이 무겁다.


모지스할머니와 같은 엄청난 일은 아직 겪어보지 못했으나, 나도 살아가다보니 마음에 묻는 인연들이 꽤 생긴다. 불교에 생자필멸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니 죽음으로 인해 이별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떠날 것이고 나도 떠날 것이다. 또 생자필멸과 함께 붙어있는 회자정리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죽음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모양이다.


마냥 좋아서 언제까지고 곁에 머물고 싶고 내 옆에 바짝 붙들어 매두고 사람도 어느샌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생긴다. 예전에는, 그리고 사실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여전히, 떠나간 인연에 대해 일종의 죄책감을 느꼈다. 하루가 멀다하고 시시콜콜 연락하고 밥 때 되면 밥 먹듯이 당연스레 자주 만나던 친구와 어느샌가 연락이 뜸해지고 그러다 이내 핸드폰에 저장된 낯선 이름처럼 남아있는 것을 볼 때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내가 더 노력하고 더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그 친구와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 마음에 다시금 손을 건네보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치, 영화 식객에서 군대 시절 눈물나도록 맛있게 먹었던 라면 맛을 다시 맛보고 싶어서 고참병을 찾아가고 군복을 입고 때려달라고 청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 라면 맛을 못 느꼈던 것처럼.


그런가하면, 회한과 분노가 남는 인연들도 있다. 이불킥이라는 말이 있던데, 평소에는 잊고 살다가도 까만 밤에 자려고 누웠을 때 갑작스레 생각나서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나 화닥거리는 심장을 느끼게 하고 내 머리통을 철썩하고 때리고 싶게 하는 인연들도 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런 사람을 만났을까 하고. 가깝게 지내던 얼마간에는 참 좋았던 사람과의 인연도 그렇게 둔갑하는 경우가 있다. 상대방이 내게 그런 만큼 나도 그 상대방에게 그런 이불킥 인연이겠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면 그 날밤의 숙면은 쉽지 않다.


나이가 드는 만큼 깊이와 폭과 색깔이 천차만별인 관계들과 인연들이 많아지니 내 마음이 스스로를 보듬으려는 작용을 하는 것인지, 몇 년 전부터인가 나는 인연에는 구간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퇴근길에 마침 반갑게 마주쳐서 같은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지하철역까지 같이 걸어갔는데 어떤 이는 같은 방향이지만 어떤 이는 반대방향이기도 하고 같은 방향의 사람과 함께 지하철을 타더라도 나는 이수역에서 갈아타야 하는데 그 사람은 고속터미널역에서 먼저 내려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인연을 가벼이 여기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대신 인연을 무조건 끝까지 이어가야한다는 의무감이나 집착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법정스님이 말하던, 단 한번의 인연을 소중히 하라는 일기일회의 깨달음까지는 아니어도 말이다.


스킨답서스는 하트 모양을 아래로 잡아끌어 조금 길쭉하게 한 듯한 잎들이 줄기를 따라 한번은 이쪽 한번은 저쪽하는 식으로 마주보며 피어나고 매달려 있다. 큰 잎도 있고 작은 잎도 있고, 초록색 물감을 큰 붓으로 한번 죽 칠한 듯 초록색이기만 한 것도 있고 초록색 잎 중간에 노란색이나 흰색 물감을 똥 떨어뜨린 듯 대리석 마블과 같은 무늬가 번져있는 것도 있고, 줄기가 아래로 계속 뻘어나가는 것도 있는가하면 도통 줄기가 길어질 줄 모르는 것도 있고, 꽤 오랜동안 줄기에 매달려 있는 잎들이 많지만 그 와중에 노랗게 시들어 떨어져 나가는 잎들도 있다. 이런 모든 잎들이 넘실넘실 모여 풍성한 스킨답서스의 풍경을 만든다. 이렇게 일관되지 않은 모습과 제멋대로인 것 같은 줄기의 길이와 새로 솟아나는 한편으로 시들어 떨어지는 잎들로 인한 변화가 있어야 오히려 스킨답서스만이 보여줄 수 있는 풍성한 초록의 모습이 제대로 갖춰진다.


또 스킨답서스는 생명력과 번식력과 적응력이 강하다. 화장실에서도 살더라면서 그래서 오히려 조금 징그럽다는 남편의 말처럼, 햇빛과 바람이 많이 부족해도 잘 산다. 줄기를 잘라서 물병에 꽂아놔도 일주일쯤 지났을까 하는 때에 들여다보면 어느새 하얀 뿌리가 새로 돋아나고 그 뿌리를 키우면서 물병 속에서도 쑥쑥 자란다. 남편과 달리 나는 그래서 스킨답서스가 좋다.


뻗어나갈 수 있는 줄기는 계속 뻗어보내면서 그 몸에 잎들을 계속 피워내고, 뻗어나가길 멈춘 줄기는 또 그 때까지 돋아난 잎을 오래동안 품고 있고, 줄기가 잘려나간 자리 즈음에서는 새로운 줄기를 뿜어올리고, 줄기째 잘라져서 물병으로 이사간 줄기는 또 그 곳에서 새로이 뿌리를 내리면서 새 삶을 살아간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리고 내 삶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인연의 지속에 집착하거나 인연의 단절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든 언제가 됐든 인연의 구간마다 스킨답서스의 하트모양 잎처럼 행복한 마음을 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내게 다가오는 인연들이 이불킥의 인연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진정성을 지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킨답서스가 줄기는 더 이상 뻗어나가지 않을 지언정 매달려 있는 초록 잎은 싱싱하게 품고 유지하면서 풍성한 전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은 추억으로 산다고 하기도 하고, 시인 한용운이 이별은 꽃을 남긴다는 말을 했다고도 있던데, 사람이 멀어져도 내 마음속 그 사람과의 인연은 아름답게 남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내 인생은 과분하게 아름다운 꽃밭일 것이다.


모지스할머니도 마음에 묻은 많은 인연들을 아름다운 꽃으로 품었기에 담담하면서도 밝고 명랑한 그림들과 함께 백세인생을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식물생각 핸드북


간단 프로필:

국내 유통명: 스킨답서스

학명: Scindapsus aureus 혹은 Epipremnum aureum

영명: Scindapsus 혹은 Epipremnum

생물학적 분류: 속씨식물문 외떡잎식물강 천남성목 천남성과

원산지: 태평양 솔로몬제도


햇빛:

실내 공기정화식물 중의 대표주자 격인만큼 햇빛이 부족해도 잘 자란다. 거실 안쪽이나 방안에 두어도 크게 웃자라거나 시들하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바람:

바람에 대해서도 특별히 까다롭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환기가 잘 안되는 밀폐된 공간에 둔다면 생명력 강한 스킨답서스에도 응애나 깎지벌레 같은 벌레가 생기기도 한다. 거미줄 같은 것이 끼거나 하얀 이 같은 것이 붙어 있다 싶으면 닦아내고 참충균 같은 약의 희석액을 뿌려준 후 바람을 잘 쐬어주면 금새 또 괜찮아진다.


물주기:

물주기에 대해서도 별로 쓸 말이 없을 만큼 스킨답서스는 까다롭지 않다. 흙이 좀 말랐나 싶을 때 물을 주고, 기분이 내키면 화분 전체에 샤워도 시켜주고 하는 정도이다.


내한성/월동:

열대지방이 원산지라서 그런지 월동 온도가 8~10도라고 하니 우리나라의 한겨울은 힘들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킨답서스를 실내에서 키울 것이므로 별로 문제될 것은 없을 것 같다. 한겨울에 베란다에 놔뒀더니 잎이 노랗게 조금 물러지고 시드는 것 같았다.


성장:

볼품 없다 싶은 작은 화분도 반년 정도만 지나면 머리숱이 많은 파마머리처럼 수북해진다. 취향에 따라 아래로 길게 내려오는 것이 좋으면 행잉화분에 심어 매달아놓으면 되고, 긴 것 보다는 위로 옆으로 풍성한 것이 좋으면 쇼커트하듯 줄기를 짧게 잘라주면 구름마냥 넘실넘실해진다.


번식:

스킨답서스의 줄기 마디마다 공기뿌리 같은 것이 나 있는데, 공기뿌리와 공기뿌리의 사이를 절단해서 잘라낸 줄기를 물병에 꽂으면 금새 뿌리가 돋아난다. 계속 물에 꽂아둬도 살아가고, 뿌리가 많이 났다 싶을 때 화분에 옮겨줘도 살아간다.


매력포인트:

실내 대부분의 곳에서 적응하여 잘 살아가는 생명력과 번식력이야말로 스킨답서스의 강점이자 매력이다. 다른 식물들은 힘들어하는 실내에서 일년 내내 윤기가 나는 초록잎을 선사하는 스킨답서스는 공기정화 능력도 월등하다고 하는데, 미국 NASA가 선정한 공기정화식물 목록에서 12위에 올라있다고 한다.

유의사항: 추운 겨울과 환기만 조심하면 될 것 같다.


보너스:

물꽂이가 잘 되는 만큼, 꽃꽂이를 하듯이 스킨답서스 한다발을 예쁜 물병에 꽂아두면 싱그러운 초록 장식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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