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쇼트트랙 1000미터 경기에서 호주의 스티븐 브래드버리는 금메달을 땄다. 나는 최근에서야 당시의 동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이 사람만큼 운빨 날린 사람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가선수들의 체력이 굵은 허벅지를 뚫고 나올 것 같은 쟁쟁한 남자 쇼트트랙 경기에서 브래드버리는 당시 29살 노장이었고, 조별예선에서는 두 번이나 부정출발을 했지만 실격의 위기에서 다행히 예선을 통과했다. 여기까지는 그저 다행의 수준이다. 그 다음 준준결승전에서는 1등과 2등만 다음 라운드로 가게 되어 있었는데 브래드버리는 3등으로 들어왔다. 집에 가야겠구나 할 즈음, 2등 선수가 반칙으로 실격되는 바람에 브래드버리가 2등이 되었다. 어부지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또 그 다음 준결승전에서는 꼬랑지그룹으로 경기를 했지만 앞달리던 선수들이 허무하게 넘어지는 바람에 또 통과했다. 그리고 대망의 결승전에서는 일찌감치부터 꼴등으로 트랙을 돌고 있었는데, 뒷짐지고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이 마치, 앞선수들 어디 안 넘어지나하고 기다리는 것 같았다. 경기해설자가, 아 브래드버리 선수 이대로 메달권에서 멀어지나요, 그동안 운이 참 좋았는데 아쉽네요, 이제 메달순위는 거의 확정된 것 같군요, 라고 속사포처럼 예견할 즈음, 정말 거짓말처럼 혹은 신적인 존재가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린 것 처럼, 앞 선수들이 모조리 쓰러져서 미끄러져 나갔고, 브래드버리 홀로 결승선을 고고하게 통과했다. 그의 표정도 마치, 엄머, 나야? 내가 금메달이야? 대애박, 하는 것 같았다.
운도 능력이라는 말을 곧잘 듣는다. 마키아벨리도 군주론에서 행운과 군주의 재능이 동등하게 필요하다고, 운이 없음을 재능으로 메꿔볼 여러 방법과 전략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이 없으면 확고한 군주가 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지하철에서 앉아 가려고 해도 운이 필요하고, 복권 당첨처럼 엄청난 일에도 운이 필요하다. 우연과 필연 사이 어디쯤엔가 운은 항상 꽂혀 있는 것 같지만, 운은 거의 항상 나의 통제 범위 밖에 있으니, 브래드버리처럼 기분째질 때보다는 쩝쩝하며 입맛만 다실 때가 더 많다. 이처럼 행운의 자기장이 세지 않은 나의 인생살이에서 이따금씩 생각나는 말은 ‘존버 정신’이다. 이외수 작가가 했다는 이 말의 뜻은 ‘조낸 버틴다’이다. 단어창작의 기발함과 발칙함에 키득거리게 되지만, 자꾸 생각나는 이 말은 사실 약간 마음이 아리고 버겁다.
어느 쪽인가를 굳이 판단한다면 나는 운빨보다는 존버에 확연히 가까운 사람이고, 또 존버에는 어느 정도 이력이 나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존버의 와중에도 갑갑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떻게 저런 사람이…?, 라는 화딱지나는 의문 내지 울화가 마음 속에서 피어오를 때 가장 기운이 빠진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라는 것은 대체로, 어떻게 저런 사람이 아직도 회사를 다니지, 어떻게 저런 사람이 저 자리에 올라갔지, 회사는 정말 저 사람이 저러는 걸 모르나, 걸핏하면 비용절감을 떠들면서 회사는 도대체 저런 사람한테 그 많은 월급을 주는 거지, 등의 의문이다. 귀신은 저 사람 안 잡아가고 뭐하나 싶은 심정마저 들 때도 있다.
사회생활 초년병시절에는 그럴 때마다 화도 많이 나고 억울했다. 당장이라도 신문고를 울리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고, 조직 내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귀신도 안 잡아가는 그런 사람들의 존재가 정말로 이해가 안 갔다. 조직 내에서는 일을 잘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았고 ‘차카게’ 사는 것이 과연 중요한 것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정의와 진리를 위하는 것이랍시고 상급자에게 혹은 회사에게 반기를 든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지속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정의와 진리는 금새 잊혀지는 반면, 반기를 들었다는 것과 개겼다는 것과 누군가에게 공격적이었다는 인상들은 짙게 오래 남겨진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복잡한 이해관계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저마다의 사연으로 얽히고 설켜있는 이 세상에서 정의와 진리라는 것이 항상 완전하고 명확한 것도 아니다. 나 스스로도 회색지대에 서있는 것처럼 헷갈리는 때가 많아졌다.
초년병은 한참 전에 졸업했으나 조직 위계질서에서는 여전히 중하층 백성에 머무는 나는, 최근에 들어서 회사 동료들과 가끔 ‘한끗’에 대하여 얘기한다. 조직에서 버티는 사람들을 보면 여전히 왜 귀신도 안 잡아가는지 의문을 갖게 하는 존재들이 많지만,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역시 뭔가 한끗이 있구나, 하고 인정하게 되는데, 대체로 이 한끗은 업무 능력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은 리더라기보다는 약탈자에 가깝고 관리자라기보다는 염탐꾼에 가깝다. 어떤 사람은 좋게 말하여 청산유수 언변을 갖췄으나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이빨 까기의 달인으로 말로 다 해먹는다. 어떤 사람은 협업을 빙자한 숟가락 얹기에 선수고 어떤 사람은 조언을 빙자한 채가기의 달인이다. 어떤 사람은 구두로만 지시할 뿐 이메일이나 문서등의 기록은 남기지 않곤 하는데 그러다가 사고라도 터질 때면 오리발과 책임전가를 훌륭히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본연의 업무보다는 의전에 목숨을 걸고서 기꺼이 의전대상의 몸종이 되다가도 힘없는 ‘아랫 것들’에게는 맘껏 함부로 대하는데, 많은 경우 이런 사람들에게 본연의 업무란 게 과연 존재하는가 싶을 정도로 놀고 먹는다. 어떤 사람은 권력에 대한 촉이 기가 막히게 발달해 있어서 권력자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끈을 놓아 호가호위하고 동급자들중에 눈에 띄는 능력자들은 짓밟지는 못할 망정 견제를 하며 하급자들을 대상으로는 대장놀이를 한다. 어떤 사람은 야간에 발생하는 온갖 다채로운 일들에 주력하고 상부에 진상함으로써 그가 주간에 다니는 회사의 인사고과 점수를 올리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늘어놓는 나도, 독야청청 옳고 맑은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면모들 중 나의 처세에 크게 공헌할 만큼 독보적인 점이 없어서 그렇지, 내게도 이런 모습들이 조금씩 새나온다. 새나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런 면모들로 종종 보여지는 처세술을 갖추려고 노력을 하기도 한다.
내가 가장 잘하고 내게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을 회사와 업무에 내어놓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들은 업무와 관련 있는 능력이나 전문성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는데, 어쩌면 조직의 상층부가 원하는 것은 내 업무능력보다는, 그들이 가장 기뻐할 수 있는 무언가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시기에 따라 상황에 따라 내 앞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가장 기뻐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하는 능력, 그것이 지금 조직에서 오래 버티는 사람들이 갖춘 한끗인게 아닐까. 그리고 윗분들도 사람이다보니 정의와 진리로 기뻐하기 보다는, 좀 더 물질적이고 권력적인 것에 더 기뻐하게 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렇게까지 생각은 하지만, 나는 아직 내 처세를 위한 한끗이 확고하지는 못하다. 내게도 나름의 촉이 박혀있는 것 같긴 하지만 내 촉의 주파수는 좀 약한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초야에 묻혀 생육신처럼 지낼 수 있는 그릇도 아니고, 앞으로도 꽤 오랜동안 회사라는 조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무사히 월급을 잘 받아먹고 살려고 생각하는 이상은 나도 한끗이든, 처세든, 필살기든 뭔가 확실히 갖추어야한다고 생각은 한다. 그러면서도 아마도 나는 좀 덜 처세스러운 쪽이 내 성향에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올해 봄에 베란다로 들인 월계수는, 내가 품었던 열망을 무색케할만큼 아주 무심하다. 들여오던 순간부터 희끄무레한 벌레같은 것들이 달라붙어 있어서 참충균이라는 꽤 비싼 유기농 약도 사서 몇날을 뿌려주고 잎파리 하나하나를 닦아주고 했는데, 나의 정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벌레는 이내 사라졌지만 여지껏 고모양 고크기 그대로이다. 더디게 자란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조화마냥 살 줄은 몰랐다.
내가 월계수에 가장 꽂혔던 것은, 월계수의 잎 모양이다. 율마처럼 싱싱한 연둣빛 뾰족잎들이 보기좋은 덩어리로 형성되거나 유칼립투스처럼 동글동글하거나 몬스테라처럼 큼지막하거나 아가베아테누아타처럼 카리스마있거나 하지 않은 월계수의 잎은 그야말로 기본이고 클래식이다. 이국적이고 다채로운 다른 식물들을 새하얀 A4용지에 그린 화려한 그림이라고 한다면, 월계수의 잎은 A4용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반듯한 타원형에 정직한 초록색이 깃든 가장 기본적인 잎의 모습이다. 한편으로는, 월계수 잎을 활용하는 용도가 무궁무진하다고 해서 나도 이제 관상용 식물을 뛰어넘어 생활투입형 식물을 꾀해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월계수 잎을 말린 후 빻아서 월계수 소금을 만들 수도 있고, 육수를 만들 때 월계수 잎을 넣거나 향신료로 쓸 수도 있고, 고기를 삶을 때 월계수 잎을 넣어서 누린내를 잡을 수도 있고, 피클을 만들 때 같이 넣어서 살균효과도 낼 수 있고, 말린 월계수 잎을 포푸리주머니에 넣어서 옷장이나 신발장에 탈취방향제로 쓸 수 있고, 월계수 향을 벌레들이 싫어하니 천연방충제로도 쓸 수 있는 등등 온갖 월계수의 용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월계수가 좀 자라나야 잎을 팍팍 따서 뭐라도 좀 해보지, 이건 거의 식물계의 나무늘보이다. 마트에 가면 월계수 말린 잎이 가득 담긴 큰 병이 판매되던데, 이 월계수 잎들은 어디서 뭘 먹고 이렇게 잘 자라나서 수확된 건지 참 궁금하다. 아마도 원산지인 지중해에서는 무럭무럭 자라나보다. 잎파리를 그래도 몇 개 따보고 싶어서 아래 언저리의 잎을 몇 개 땄는데, 아직 생활투입은 못 해봤고, 향초 장식용으로만 시도해 본 정도이다. 그래도 역시 월계수의 잎모양은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고 예쁘다.
그래도 고대 아테네에서 승자에게 월계관을 씌워주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올림픽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월계수는 승리와 영광을 상징한다. 올림픽 월계관에 실제로 쓰인 것이 월계수가 아니라 올리브나뭇가지라고 하는 말도 있지만, 어쨌거나 사람들은 월계관으로 인식한다. 월계수의 학명인 Laurus nobilis도 라틴어로 ‘칭송하다’라는 뜻인 ‘laudis’와 ‘고귀하다’라는 뜻인 ‘nobilis’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니, 월계수가 상징하는 뜻과 이미지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잡아온 것인가보다.
폭풍성장을 하는 식물, 짙거나 은근한 향을 흩뿌리는 식물, 이국적인 모양을 뽐내는 식물, 희한한 색을 뿜어내는 식물, 꽃을 피우는 식물 등등 각자의 특성으로 베란다 주인장인 나의 관심을 끌고 이쁨을 받는 식물들 속에서 월계수는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모습으로 더디지만 일관되게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의 나의 처세가 월계수처럼 된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 월계수의 뜻이 승리와 영광과 명예라서가 아니라, 월계수의 잎이 기본에 충실하기 때문이고, 월계수에게 인간을 이롭게 하는 많은 쓰임새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새 쫓아가려다 괜히 가랑이만 찢는 뱁새가 되지 말고, 나의 생겨먹은 모습에 억지로 뭔가를 갖다 붙이려 하지 말고, 나의 롱런하는 한끗을 월계수로부터 가져와보자고 생각했다. 마치, 집에서 좋은 냄새가 나게 하기 위해 방향제를 사들일 것이 아니라 수시로 청소와 환기를 하고, 예쁜 얼굴이 되기 위기 화장을 더 할 것이 아니라 음식을 조심하고 잠을 잘 자서 피부를 맑게 하고, 날씬해지기 위해 지방흡입수술을 할 것이 아니라 운동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그간 불만만 쌓이고 조급해하기만 했지, 제대로 기본을 돌보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기본에 충실하기에도 얼마나 할 게 많고 어려운가! 우리집에 월계수를 오래오래 두고 함께 해야겠다.
간단 프로필:
국내 유통명: 월계수
학명: Laurus nobilis
영명: Laurels 혹은 Bay tree
생물학적 분류: 현화식물문 목련강 녹나무목 녹나무과 월계수속
원산지: 지중해 연안, 유럽 남부
햇빛:
햇빛을 좋아하니 야외에서 키우면 좋을 것이다. 지중해가 원산지인 만큼 로즈마리와 같은 허브들처럼 햇빛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도 햇빛이 좀 약한 곳에서도 잘 자란다고 하니 아파트 베란다에서 키워봄직하다.
바람:
햇빛을 좋아하는 것과 비슷해서 바람도 좋아하니, 아무래도 실내에서 키우면 금새 거미줄이 생기거나 벌레가 꼬일 것이고, 집안에서는 베란다가 최적의 위치인 것 같다.
물주기:
적당한 햇빛과 바람이 갖추어졌다면 물마름도 더디지 않으니, 겉흙 색깔이 말라보인다 싶을 때 손가락으로 흙을 쑤셔보고 물기가 없으면 물을 흠뻑 준다.
내한성/ 월동:
지중해 원산 식물이니 당연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남부지방의 환경이 적합하여 그곳에서는 월동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도 추위에는 약하다고 하니 우리나라 한겨울에는 베란다 안쪽 거실로 옮겨주는 것도 방법이겠다.
성장:
원산지에서는 15미터까지 자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환경이라서 그런지 우리집 베란다 환경이라서 그런지 지난 1.5센티 자라는 것도 보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번식:
이건 잘 모르겠다.
매력 포인트:
답답한 나무늘보같지만, 반듯하고 군더더기없이 매끈한 타원형의 짙은 초록 잎이 참 예쁘다. 그리고 잎을 문지르면 살짝 기분 좋은 향이 난다.
유의사항:
월계수 잎 외의 부분에는 독성이 있다고 한다. 월계수 잎도 말리기 전 생잎은 쓴맛이 강하게 나니 말려서 활용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보너스:
서양에서는 향신료의 어머니라고 불릴 만큼, 거의 모든 서양 요리에 다양하게 쓰인다고 한다. 또, 류머티즘·신경통 완화, 두통 완화, 소화촉진, 방부·방충 효과 등등 월계수의 효능으로 소개되는 바를 보면, 거의 한약재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