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 여러가지 유형의 동호회 활동을 지원하는데, 나는 그 중에서 꽃수업 동호회에 참여하고 있다. 그래서 분기마다 회사 근처의 플라워샵에 가서 동료 직원들과 함께 꽃수업을 하는데 근래 들어 몇 분기에 걸쳐 꽃수업을 받았던 플라워샵이 있다.
샵에 처음 들어섰을 때는 후욱하고 뿜어져 나오는 꽃집 특유의 촉촉한 꽃 내음에 일단 흐음하고 코가 즐거웠지만 코는 금새 그 향기에 익숙해졌고, 그 다음부터는 다른 것들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소소한 것부터 큼직한 것까지 감각적이고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는 내부의 인테리어도 훌륭했지만, 꽃집 주인장의 미모와 성향이 나로 하여금 시샘하는 마음을 갖게 했다. 서른 두세살 쯤 되어 보이는 그녀는 낭랑하면서도 나긋한 목소리와 선하고 해맑은 미소를 지닌, 내 기준으로 봤을 때 딱 부잣집 딸내미의 전형 같았다. 꽃수업을 하다보면 꽃집 주인들의 친절함 속에서 순간순간 배어나오는 장사치 마음을 엿볼 수 있고 이것은 사실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인데, 이 주인장은 그런 계산속 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샵을 열기 전에는 부모님 집에서 함께 살면서 그 집에서 꽃수업을 했다는 것을 보니 그 부모님 집이라는 것은 꽤나 큰 집이었을 것이고, 꽃을 배우러 유학 가는 비용이 상당할 텐데 뉴욕과 런던 두 군데로 모두 유학을 다녀왔다는 것을 보니 집 크기 못지 않게 경제 자산도 풍족한 집이었을 것이며, 건물 1층에 위치한 샵의 구조를 뜯어보다 보니, 이 건물은 애초 건축 당시부터 꽃집을 오픈할 것을 염두에 두고 지은, 그러니까 아마 부모님의 건물일 것이다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게다가 그녀는 훤칠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녔고 몇번인가 마주쳤던 그녀의 남자친구는 알고보니 유명 모델이기까지 했다.
열심히 꽃 설명을 하는 그녀 앞에서 있노라니, 수업에 참가하고 있는 내 꼬락서니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세파에 찌든 듯 느껴졌고, 피부는 칙칙하고 미간에는 짜증 주름으로 골이 패여 있으며, 아침에 나름 산뜻하게 입고 나온 옷이 이 때 따라 꾀죄죄하게 구겨져 있었고, 꽃수업에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이 꽃은 얼마짜리 저 재료는 얼마짜리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고, 수강생들 몫으로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는 꽃재료들을 힐끔거리면서 내 몫의 재료가 남들 몫의 재료보다 혹시 양이 적거나 덜 신선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꽃수업을 할 정도의 여유공간이 있는 집 혹은, 두 번이나 유학을 다녀올 수 있는 집에서 살지 못한 사람이었다.
나는 꽃재료들로 뭔가를 만들면서도 그녀를 흘끔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나는 유학은 못 갔다왔어도 영어는 잘 해, 키는 작아도 등짝에 살은 없어, 피부는 안 좋아도 머리숱은 많아, 라는 전혀 앞뒤 문맥 안 맞는 유치한 입장 해명을 혼자서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몇 개 내세울 게 없었다.
흙수저라는 말이 언제부턴가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고 있다. 나도 이따금 이 생각을 한다. 아마 나는 온실 밖에 굴러다니는 흙수저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온실 안의 안온함과 정갈함을 성냥팔이소녀마냥 들여다보며 동경해 마지 않으면서도, 그런 것들은 내 것이 아니라고 큰 한숨 내뱉으며 체념했던 시간들이 많았다. 온실 밖 언저리에서 비 오면 그 비 다 맞고 바람 불면 그 바람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사람들 발길에도 채이고 그랬던, 길가에 무수히도 자라나 있던 풀이나 울타리 관목, 그 중에서도 보일까 말까 한 존재가 나 아니었을까 한다. 누군가가, 이 나라는 상속이 없이는 제대로 살 수가 없어, 라고 말하면 맞아맞아, 하면서 맞장구를 쳐대는 걸 보면, 지금에도 흙수저 신세는 크게 면하지 못한 것 같다.
코로키아.
코로키아를 사서 집에 갔더니, 집에 있던 남편이, 왜 죽은 걸 사왔느냐,고 했다며 어떤 사람이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을 보고 웃었던 적이 있다. 또, 내가 즐겨 찾는 기흥에 위치한 화원에서는 매장에 놓아둔 대형 코로키아에, 죽은 것 아니에요, 라는 미니 팻말을 꽂아두기도 했었다.
뉴질랜드가 원산지라는 이 식물 코로키아는 그런 오해를 살 법도 한 것이, 무신경하게 바라보면 시들어 버린 듯 보인다. 뻗어나간 가지들은 깡마른 약골처럼 가녀리고 비실비실해 보이고, 직경 5미리가 될까말까한 자글자글한 잎파리들은 초록빛 보다는 잿빛에 가깝고, 그 숫자도 많다고는 할 수 없어 풍성함과는 거리가 먼데다가, 그나마도 겨우 매달려 있는 듯 하다.
코로키아는 뉴질랜드가 원산지인 식물이라고 한다. 뉴질랜드의 날씨는 총평을 하자면 연중 대체로 온화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변덕이 팥죽 끓듯 하는 날씨라 한다. 게다가 바람이 불라치면 우산이 뒤집히고 길바닥이 들고 일어날 정도로 강풍이 불기도 하고, 햇빛이 들라치면 타들어가듯이 강렬한 뙤약빛이 내리쬐기도 하며, 바람도 햇빛도 잦아들어 이제 좀 살만하다 싶으면, 이제는 또 대기가 너무 건조하여 피부가 갈라터지겠구나 싶기도 한다고 한다. 누군가는 하루에 사시사철의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 뉴질랜드의 날씨라고 하였으니, 이렇게 뒤죽박죽인 날씨에서 살아남은 것이 코로키아이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는 직장 상사 아래서 써바이벌한 말단 사원 같다고 할까.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강풍을 견디다보니, 잎의 크기는 작아질 대로 작아지고, 가지는 가늘어졌다. 잎이 컸다면 큰 바람 한번에도 훅 넘어가고 갈가리 찢겨나가고 했을 것이고 가지가 굵직했다면 뚝 부러지기 쉽상이었을 것이다.
또, 이글거리며 내리쬐는 뜨거운 햇빛을 버텨내다보니, 잎의 색깔은 쾌활한 초록빛을 잃고 잿빛으로 바랬다. 새순이 돋아날 땐 그래도 초록빛으로 명랑하기도 한데,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마음을 닫아걸고 감정을 내치듯이, 코로키아의 잎도 시간이 지나면서 컬러감이 빠진 무채색의 어두운 잿빛 초록으로 변해간다. 그런가하면, 어디 그늘을 찾아 숨어들거나 누가 가림막이라도 쳐주길 바랄 수도 없이 지독히도 강한 햇빛에 견디다보니, 그 자그만한 잎파리에는 솜털이 생겨났다. 솜털이 자외선차단제라도 되는 양, 아니면 썬그라스라도 되는 양 말이다.
아마 이 솜털은, 햇빛을 막아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잎에서 너무 많은 수분이 증발되는 것을 막아주기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딱 말라죽게 생겼는데, 그나마 얼마 없는 물기가 다 날라가버리면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또 이 솜털은, 비바람이 몰아칠 때 물기를 한껏 머금고 있다가, 대기의 건조함이 못 견딜 정도일 때 큰 도움을 줄 것이리라고 생각한다. 물 마실 기운도 없는 사람에게 거즈에 물을 묻혀 입술을 적셔주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되듯이 말이다.
코로키아에 대한 이런 나의 생각들은 사실과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분석은 정확성을 위해서 했다기 보다는, 코로키아를 좀 더 이해하려는 나의 노력에서 나왔으니 틀렸다고 하여 비난하는 사람은 없기를 바란다. 아니 좀 더 솔직히는, 코로키아를 통해 내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나를 위로하려는 의도가 다분할 것이니 오히려 틀린 해석이 많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코로키아는 애잔하다. 온실에서 곱게 자라나는 식물과는 애초에 운명이 달라서 그저 길가의 울타리 관목이었다. 코로키아는 누가 굳이 사정을 봐주지 않는 바깥의 풍진 세상에서 살았다. 녹록지 않은 삶이지만, 일년에 한 번은 아껴둔 사치를 한 번에 누리려는 듯, 잿빛의 코로키아는 이맘때쯤 노오랑 꽃을 자글자글 많이도 피워낸다. 사는 것이 버겁고 심난해서 주저앉고 싶은 순간도 많았을 텐데 살고 살고 또 잘 살아서, 이제는 먼 나라 한국에 와서 고급스런 인테리어 식물로 비싼 대접을 받고 있다. 이는 마치, 칠순이 넘어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으로 데뷔한 멋진 할아버님들의 모습과도 같다고 할 수도 있겠다. 앨범으로 데뷔하기 전까지, 속된 말로 밤무대를 뛰고 행사를 뛰고 한편으로는 구두닦이를 하며 생을 이어오던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멤버 이브라힘 페레르 할아버님의 과하지 않은 미소는 코로키아와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질투라는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가 사람으로 하여금 더 노력하고 분발하도록 하는 동기부여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질투는 한편으로 그 끝간 데를 모를 수도 있다. 나보다 많이 가진 자를 험담하고 끌어내리려 하거나, 내가 동경하는 세상이 내 것이 아니라며 비관에 빠질 수도 있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 라는 말도 예전에 한참 떠돌았던 것 같은데, 동경하고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론 쿨한 척 애써 그런 마음을 부정하려고 하고, 또 아닌 척 하면서도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대상에 대해 적의를 품고 시시탐탐 공격의 기회를 노리기도 한다. 그 적의가 심해지면, 예전 어느 개그 프로에서 나왔던 말처럼 “예쁜 것들은 다 죽어야 해”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도 코로키아는 질투의 덫에 걸려들지 않았나보다. 좋은 주인 만나 온실 속에서 뽀송하고 안온하게 사는 식물들을 시기하지 않고, 똑같이 밖에서 사는 식물들 중 코로키아와는 달리 풍성하고 탐스러운 초록잎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식물들을 적대시하지 않고, 큼지막하고 향기로운 색색의 꽃이 만개하는 식물을 헐뜯지 않고, 매일매시 비바람과 햇빛에 시달렸을지언정 자신의 방법으로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오고 있다.
그렇게 살아온 모습에 대해, 먼 타국의 사람들이 고고하고 신비한 모습이라느니 겨울을 생각나게 하는 나무라느니 동양화적인 느낌이 있는 고급스런 인테리어 효과가 있다느니 속사정 모르는 소리 하는 것에 정작 코로키아는 헛웃음이 날 수도 있겠으나, 분명한 것은 코로키아는 그 어떤 식물들과도 비교될 수 없는 독보적인 느낌과 아름다움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앙상한 가지일지언정 초록이 다 바래버린 자잘한 잎파리일지언정 그 가지들과 그 잎파리들이 생존을 지속해 오면서 이제는 마치 서정적인 오케스트라와도 같이 고매한 자태를 지니게 되었다. 코로키아가 평온하지 않은 날씨 속에서 죽을동살동 적응하고 때로는 닳기도 하면서 생존해 온 것이 그 자체로 시와 같은 애잔함을 갖게 하였다. 흙수저로 산 인생이 코로키아의 특별함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올봄에 코로키아를 우리집 베란다에 들였다. 코로키아가 내 관심대상에 들어온 것은 한참 전의 일이지만, 이제야 들였다. 아마도, 코로키아의 앙상한 모습에서 나의 척박했던 시절이 떠올라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고, 좀 더 속세적으로는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서 망설여지기도 했다. 이번에 산 것은 애기 코로키아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나무이고, 사람들이 탄복하는 코로키아의 매력을 뽐내려면 앞으로 몇 년 더 자라나야 할 것이다.
나는 코로키아의 현명함과는 거리가 먼 인간으로, 수시로 질투에 휩싸이고, 동경과 체념을 끈질기게 끼고 사는 인간이지만, 내 베란다에 자리한 이 코로키아가 나를 조용히 일깨우고 다독여 주리라고 생각한다. 나의 인생은 아직, 세상이 비싸고 귀한 대접을 해주는 정도로 빛나지 않고, 자잘한 인생사에 하루에도 몇번씩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하는 일희일비 인생이며, 언감생심 나의 생이 한편의 시와도 같다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이 작은 애기 코로키아가 커다란 코로키아가 되어 가는 동안, 그리고 이 코로키아의 가지가 이쪽저쪽으로 마디마디 꺾이면서 자태를 키워나가는 동안 나도 나의 생존의 시를 완성해 나가리라고 생각한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 >
식물생각 핸드북 간단 프로필:
국내 유통명: 코로키아
학명: Corokia cotoneaster (코로키아 속에 10여종의 코로키아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것은 대체로 이것이라고 한다)
영명: Corokia
생물학적 분류: 속씨식물문 쌍떡잎식물강 국화목 아고르필름과 코로키아속
원산지: 뉴질랜드
햇빛:
연중 온화하나 하루에도 사시사철의 날씨가 발생한다는 뉴질랜드에서 울타리 관목으로 끈질기게 사는 식물인 것을 보면 다양한 날씨 환경에 강한 식물이라고 생각된다. 인터넷상의 식물 정보에도 대체로 양지, 반양지, 그늘 모두 생장 가능하다고 되어 있으나, 그늘보다는 양지가 낫지 않겠나. 베란다에서 키우기 적당하다고 본다.
바람:
코로키아는 바람이 너무 거칠고 강하게 불어 힘든 때가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바람 없는 곳에서는 제대로 살기 힘들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중해에서 바람과 볕을 만끽하며 자라는 허브 식물들이 서울의 가정집에 들어오면 맥을 못추는 것과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욕심 같아서는, 단촐하게 꾸민 집 안 어느 공간에 하얀 여백과 함께 코로키아 화분을 덩그라니 놓아두고 싶지만, 그 욕심은 애저녁에 던져버리고 바람 잘 통하는 베란다에 자리를 잡아주었다.
물주기:
코로키아를 새로 들여 기존의 플라스틱 화분에서 내가 마련한 토분에 옮겨주느라 분갈이를 했는데, 그러면서 보니 뿌리의 모양새가 로즈마리의 뿌리처럼 수북한 실뿌리였다. 그래서 로즈마리 물 주듯이 물을 주려고 한다. 건조함에 적응된 식물이니 화분 속 흙이 너무 습하면 안 될 것 같고, 흙이 좀 푸석푸석하다 싶으면 물을 주려고 한다.
내한성/ 월동:
뉴질랜드 태생인 식물이지만, 내한성이 꽤 강한 편인지 어떤 사람은 영하 8도까지도 월동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베란다에서 키울 생각이니 월동은 걱정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우리나라, 특히 서울의 날씨를 생각하면 겨울에 노지에서 월동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성장:
성장에 대해서는 쓸 말이 없는 것이, 나는 이제 막 애기 코로키아를 들여서 이제 성장을 지켜봐야 하는 입장이고, 인터넷 상의 정보도 성장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다만, 뉴질랜드에서 울타리 관목으로 많이 쓰인다는 것을 보면 성장세가 결코 늦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아파트 화단이나 길가에 울타리 관목들이 많은데, 정원사들이 때만 되면 각잡힌 카스테라 만들듯이 관목들을 인정사정 없이 쳐내지 않는가. 그렇게 숏커트질 해도 금새 순풍순풍 자라나는 것이 울타리 관목이니, 코로키아도 아무리 고향 아닌 한국에서 자랄 지언정 너무 더디 자라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번식:
가지치기로 한다고 한다. 새로 나온 가지와 나온지 좀 된 가지를 가치치기하는 시기가 조금씩 다른 것 같은데, 이건 내년이나 내 후년쯤에야 한 번 시도해 봐야 내 스스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뿌리가 로즈마리와 비슷한 것을 근거로 로즈마리 가지가 물꽂이되듯, 코로키아도 새끼치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한다.
매력 포인트:
은회빛이 도는 둥글한 화살촉 모양의 작은 잎들이 자글자글 모여, 짙은 고동색의 메마른 가지들과 어울려 독특한 아우라를 선보인다. 영화 가위손의 주인공이 나와서 손질해주고 싶어질 것 같은 가지들은 이쪽저쪽으로 뻗어있는데 마치 관절 인형의 관절이 마디마다 꺾여져 있는 모양 같다. 사람들이 코로키아를 보고서, 겨울이 생각나게 하는 나무라고 하는 것도 참 자연스러운 것이, 쌀쌀한 겨울 양수리 두물머리에 있는 고목을 바라보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 코로키아에게는 있다.
유의사항:
울타리 관목으로 쓰이는 나무는 대체로 병충해에 강한 편이니 병충해 걱정은 별로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2008년 겨울. 뉴욕 여행. 이 사진의 나무는 코로키아는 아닙니다]